2017년 8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 헤이룽장성

黑 검은 용이 휘도는 白山黑水의 땅

  •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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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에서 중화학공업이 가장 먼저 발달한 헤이룽장성은 그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낙후한 공업지대가 됐다. 스스로 약점을 잘 알기에 산업구조를 선진화하고, 금융·물류업, IT 서비스 분야를 육성하며, 러시아·몽골 등과의 교류에 나서지만 성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대제국 청나라를 세운 근거지 헤이룽장은 이제 러시아, 몽골, 남북한, 일본, 미국 등 주변국들의 공존공영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여행 가이드북의 대명사 ‘론리 플래닛’은 헤이룽장 여행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로 중국 최북단 마을 모허(漠河)를 꼽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좀처럼 보기 힘들지만 장엄한 오로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보라.”

    하지 무렵 오로라를 볼 확률이 가장 높고, 이때 오로라 축제(北極光節)가 열린다고 했다. 나도 생애 처음 오로라를 보길 기대하며 한번 가보려는데 마침 모허에 갔다 온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모허에 하루 이틀 머무른 게 아니라 제법 오래, 한 달이나 있었다고 했다.

    “그럼 오로라 봤어?”

    “못 봤어.”



    “한 달이나 있었는데도 못 봤단 말이야?”

    “내 친구 아버지는 사오십 년을 모허에 살면서 오로라를 딱 두 번 보셨대.”

    “그런데 매년 하지에 모허에서 오로라 축제가 열리잖아?”

    “거짓말이지(騙人).”

    그는 친절하게 조언을 계속했다.

    “오로라를 보고 싶으면 캐나다, 러시아, 북유럽에 가봐. 중국에선 보기 힘들어.”

    생각해보니 론리 플래닛도 오로라를 “좀처럼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오로라를 볼 수 있길 기대해보라”며 사람을 현혹한 것이다. 가이드북의 대명사 론리 플래닛도 결국 중국의 상술과 타협한 걸까.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약칭은 ‘검을 흑(黑)’ 자다. 세계에서 10번째, 중국에서 장강, 황하 다음으로 긴 흑룡강에서 따온 약칭이다. 흑룡강은 이름 그대로 검은 용처럼 동북아시아를 휘감고, 양대 강국인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가른다. 그래서 중국 이름은 흑룡강이고, 러시아 이름은 아무르(Amur) 강이다.


    동북아를 휘감는 龍

    프랑스 작가 아멜리 노통브는 소설 ‘공격(Attentat)’에서 “‘아무르’는 프랑스어로 ‘사랑’을 뜻한다”며, 아무르 강을 ‘사랑의 강’으로 해석한다.

    “강과 사랑의 닮은 점 중에 가장 놀라운 건,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점이야. 가뭄이 들면 얕아지고 심하면 없어져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 옛사람들이 왜 강을 신으로 섬겼는지 알 만하지.”

    감수성이 남다른 노통브답게 매우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실제와는 동떨어진 해석이다. 아무르는 ‘큰 강’ 또는 ‘검은 물’이란 뜻의 퉁구스어에서 나온 이름으로 추정된다.

    추운 북방, 산은 항상 눈에 덮여 있어 희고, 차디찬 강은 검푸르다. 백산흑수(白山黑水). 만주 남쪽의 백두산과 북쪽 흑룡강은 동북의 자연환경을 상징한다. 중국인은 찬탄한다.

    “흰 산이여, 높고도 높구나! 검푸른 강이여, 흐르고 또 흐르는구나!(白山兮高高,黑水兮滔滔)”

    대흥안령과 소흥안령이 둘러쳐진 헤이룽장성에는 헤이룽강, 쑹화강, 우수리강이 흐르며 비옥한 토지를 만든다. 나선정벌에 참가했던 조선 무장 신류도 헤이룽장의 흑토 대지에 감탄했다.

    “이달 6월은 지난 5월보다 가뭄이 더 심했다. 그런데도 밀, 보리, 수수, 조 등 밭곡식이 말라 죽지 않는다. 이곳 땅이 얼마나 기름진지 알 만하다.”

    흑수(黑水)가 흑토(黑土)를 적셔주는 흑색의 헤이룽장은 황하(黃河)와 황토(黃土)가 어우러지는 황색의 중원과 색채부터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중원과 이질적인 이곳에는 누가 살았을까. 중국 사서는 만주의 북부에 살던 이들을 ‘숙신(肅愼)’이라고 기록한다. 숙신계는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등 쟁쟁한 종족을 포괄한다. 남부의 예맥계(고조선·고구려), 서부의 동호계(거란·몽골)와 팽팽하게 겨루던 세력이다.

    그러나 숙신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헤이룽장에는 다우르족, 허저족, 오로첸족, 에벤키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산다. 중국의 소수민족 분류는 엄밀한 문화인류학적 분류라기보다 행정관리를 위한 편의적 분류의 성격이 강한데도, 이처럼 여러 집단으로 나눈 것은 동북방 일대 민족들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부족마다 성격이 상당히 다르고 독립성 역시 더욱 강했을 것이다. 그러니 ‘숙신’이란 말은 ‘북만주 일대에 살던 온갖 사람들과 세력들’을 통칭한다고 생각하자.



    다우르, 허저, 오로첸, 에벤키族

    삼림이 빽빽한 추운 북방의 산에 살던 이들은 생존을 위해 농사·채집·수렵·어로·목축 등 매우 다양한 활동을 했다. 만주 삼림의 유목민은 몽골 고원의 유목민과도 크게 달랐다. 몽골 유목민이 소·양·말을 키우며 초원의 풀을 뜯게 했다면, 만주의 에벤키족은 순록을 키우며 삼림의 리트머스 이끼를 먹게 했다.

    헤이룽장 모허 출신 작가 츠쯔젠(遲子建)의 소설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에서 에벤키족의 순록 예찬을 들어보자.

    “순록은 머리는 말을 닮았고, 사슴처럼 생긴 뿔, 나귀 같은 몸집에 발굽은 소와 비슷하다. 말과 흡사하지만 말이 아니고, 사슴과도 비슷하지만 사슴이 아니고, 나귀와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나귀도 아니고, 소 같기도 하지만 소도 아니었다. 한족은 이러한 모습을 두고 ‘사불상(四不像)’이라고 불렀다. 순록은 말머리처럼 위풍당당하고, 사슴의 뿔처럼 아름답고, 나귀의 몸처럼 건강하고, 소발굽처럼 강인하다.”

    숙신의 용맹함과 뛰어난 궁술은 멀고 먼 중원까지 알려졌다. 공자는 새에 꽂힌 정체불명의 화살을 보고 숙신의 화살임을 알아맞혔고, 진수도 ‘삼국지 동이전’에서 숙신의 후예인 읍루(挹婁) 사람들은 대부분 용감하고 힘이 세며 활쏘기에 뛰어나다고 했다.

    숙신 땅은 부여보다 훨씬 춥고, 인구는 적고,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진수는 읍루에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마을마다 대인(大人)이 있다”고 했다. 즉, 통일된 지도자가 없고 마을 단위로 족장이 있을 뿐이었다. 국가체제를 정비하지 못하고 군소 부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다. 훗날 부여와 고구려가 헤이룽장까지 영향력을 미치기는 했지만, 헤이룽장을 중심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헤이룽장을 중심으로 삼은 첫 국가는 발해다. 고구려 멸망 후 만주는 당·돌궐·신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해 힘의 공백지대가 됐다. 698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해 요동에서 탈출한 후 지린성 둔화시 동모산에 이르러 발해를 건국했다. ‘동북의 왕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은 만주 일대의 호응을 얻었다. 727년 무왕은 성공리에 주변 세력을 통합했음을 일본에 알렸다.
    “열국(列國)을 주관하고 제번(諸蕃)을 거느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잇게 되었다.”

    발해는 흑수말갈·당·신라의 도전을 물리치고 동북의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를 굳혔다.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안정되자 발해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제도를 정비해 내실을 다졌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756년 문왕은 상경용천부(헤이룽장 닝안현)로 천도했다. 안록산은 3개 절도사를 겸해 허베이·랴오닝·산시(山西)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발해는 안록산의 습격을 우려해 방어에 더 유리한 상경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상경용천부는 넓은 평야지대에 무단강(牡丹江)과 징푸호(鏡泊湖)를 끼고 있다. 무단강은 쑹화강 최대 지류이고, 징푸호는 95㎢ 면적에 오늘날에도 40종의 물고기가 사는 천연 저수지다. 이처럼 상경용천부는 강·호수·산으로 둘러싸여 농어업과 방어에 유리했다.

    마침 8세기는 지구적 온난기여서 추운 만주에서도 농경·목축 여건이 좋아졌다. 안록산의 난 이후 기운이 크게 쇠퇴한 당나라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대내외적 호재가 겹쳐 발해는 ‘동방의 풍요로운 나라(海東盛國)’가 되었다. 발해 영토는 고구려의 두 배에 달했고, 상경용천부는 당시 아시아에서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상경용천부의 둘레는 16km. 600년 뒤에 세워진 조선 한양(둘레 18km)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무궁화 나라, 화살의 나라

    이런 재원은 어디서 나왔을까? 발해 특산품인 가죽·모피·인삼·꿀을 수출한 덕분일 것이다. 920년 일본 왕자가 담비 모피옷을 여덟 벌이나 겹쳐 입고 발해 사신을 맞이했을 정도로 모피는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국력이 충실해지자 문화도 발전했다. 발해는 당나라에 60번 이상 사신을 파견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빈공과 급제자도 신라 다음으로 많았다. 당나라 시인 온정균은 당나라를 방문한 뒤 귀국하는 발해 왕자를 전송하며 노래했다.

    “그대의 나라는 비록 바다 너머에 있으나, 수레 타고 글 읽는 문물은 본디 한집안이네(疆理雖海重, 車書本一家).”

    국력이 신라보다 강해졌다고 생각한 발해는 당나라에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은 거절했다.

    “국명의 선후는 (국력의) 강약에 따라 칭하는 것이 아니니, 조제의 등급을 어찌 지금의 성쇠(盛衰)로써 바꿀 것인가. 마땅히 옛 관례에 따르도록 하라.”

    이에 신라의 최치원은 ‘발해에 윗자리를 허락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표문(謝不許北國居上表)’을 올렸다. 최치원은 당대 최고의 명문장가답게 찬사에도 능했지만 조롱에도 능했다. 지증대사가 별세했을 때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고 애도한 최치원은 발해에 대해서는 신랄한 조롱을 아끼지 않았다.

    최치원은 발해가 본래 말갈족 오랑캐의 무리로 “고구려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때는 본래 사마귀처럼 보잘것없는 부락이었는데 (중략) 올빼미 같은 자들이 백산에서 소란스럽게 모여들고 솔개 같은 무리는 흑수에서 떠들썩하게 울어대” 천하를 혼란케 했으니, “만약 폐하의 뛰어난 생각과 외로운 결단이 신필로 내려지지 않았다면, 근화향(槿花鄕, 신라)의 염치와 겸양의 기풍이 가라앉고 호시국(楛矢國,발해)의 독통(毒痛)이 더욱 성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신라를 아름다운 ‘무궁화의 나라’로 칭하고, 발해를 사나운 ‘화살의 나라’라고 칭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발해와 신라 사이의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해동성국 발해의 최후는 어이없을 정도로 허망했다. 925년 12월 16일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출격한 지 한 달도 안 돼 926년 1월 12일 발해는 멸망했다. 발해 국경의 부여부가 함락된 지는 11일, 수도 상경용천부가 포위된 지 고작 사흘 만이었다. 역사서에 전하는 바가 없어 속사정은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역사가들이 추측하기로 발해는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중앙집권력은 크게 떨어졌다. 수많은 토착 세력이 각 촌락의 군사·행정적 권한을 갖고 있어 이들의 합의와 지지가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발해 말기 기강이 해이해지고 내분이 일어났을 때, 요나라가 발해의 토착세력들을 포섭하며 진격해 순식간에 발해를 제압한 듯하다. 야율아보기 스스로도 말했다.

    “발해 사람들의 분열을 틈타 출격했기에 싸우지 않고 이겼다.”



    만주의 해동청, 여진족

    요나라는 유목민족 최초의 대제국이었다. 몽골, 만주, 화북의 요지를 장악한 요나라는 송나라에 막대한 세폐를 받고, 교역을 장려하며 부강한 나라가 됐다. 흑룡강 일대에 살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고구려·발해도 제압하지 못했으나, 요나라는 흑룡강까지 손을 뻗쳐 흑수말갈에 조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과도한 조공 요구는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 되었다.

    흑수말갈의 하나로 여진족이 있었다. ‘여진(女真)’은 해동청이라는 뜻이다. 날래고 용맹한 해동청은 여진족의 이상형이었고, 만응지신(萬鷹之神)이었다. 요나라는 여진족에게 해동청을 공물로 바치기를 강요했다. 해동청은 10만 마리의 매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데다 여진족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터라, 요나라의 처사는 여진족의 공분을 샀다. 동북의 왕자 부여·고구려·발해에도 굽히지 않은 흑수말갈의 후예 여진족은 거란족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이때 영웅 완안아골타(완옌아구다)가 등장해 여진족을 규합하고 요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요나라 역시 막강한 대제국이었지만, ‘1만 명이 뭉치면 천하가 당할 수 없다’던 여진족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골타는 1114년 요의 10만 대군을 출하점(出河店, 헤이룽장성 자오위안현)에서 격파하고, 1115년 금(金)나라 건국을 선포했다.

    “요나라는 ‘빈철(賓鐵)’을 국호로 삼아 철의 강인함을 취했다. 그러나 철이 비록 강하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부서지고 변할 것이다. 오직 금(金)만이 변하지 않는다.”

    요 황제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했지만, 아골타는 겨우 2만 명으로 요나라 군대를 궤멸시킨다. 이후 금나라는 거칠 것 없이 1122년 베이징을 함락하고 3년 뒤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금나라는 아골타의 희망대로 영원한 제국이 되지 못했다. 금나라는 요나라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금나라는 용맹한 몽골족을 쥐어짰고, 희대의 영웅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규합해서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금나라는 화북·만주 일대를 100여 년간 지배하며 여진족의 정체성을 확실히 잡아놓았고, 동시에 역량을 키웠다. 비록 금나라는 몽골족에게 망했지만, 그 몽골족을 쫓아낸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천하를 제패한다. 청나라는 첫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지었을 만큼 금나라 계승 의지가 뚜렷했다.



    대제국 러시아의 등장

    그런데 청나라가 중국을 삼키고 있을 때, 저 멀리 서방에서 라이벌이 나타났다. 또 하나의 대제국으로 비상하고 있던 러시아였다. 몽골의 압제에 시달리던 러시아는 부지런히 힘을 키워 마침내 몽골을 몰아냈다. 이반 4세(이반 뇌제)는 대외 정복사업을 활발히 벌였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발트해를 둘러싼 북유럽 일대였지만, 북방의 사자 스웨덴을 제압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치열한 전투에 비해 실익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동쪽은 달랐다. 몽골의 잔여 세력을 제외하고는 큰 세력이 없어 러시아의 질주를 막을 수 없었다. 더욱이 시베리아의 풍부한 담비 모피는 러시아의 큰 수입원이 됐다.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의 은이 쏟아져 들어오며 상업혁명이 일어났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귀족·상인 계급은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한 사치에 열을 올렸다. 그중에서도 어둠보다 까맣고, 백설보다 부드러운 담비 모피는 유사 이래 절대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러시아는 모피를 찾아 끝없이 동쪽으로 진군했다. 1650년대 러시아 총수입의 10~30%가 모피 무역에서 나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정복으로 영토 대국이 됐을 뿐 아니라, 담비·물고기·소금 등 시베리아의 특산물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이렇게 축적한 재원으로 러시아는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며 막강한 군대를 조직했다. 시베리아 정복을 통해 대제국 러시아가 탄생했다.

    거침없이 동진하던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맞수 청나라를 만났다. 만주와 시베리아가 교차하는 헤이룽장성에서 양대 제국 청나라와 러시아는 교전을 벌였다. 다만 양국 모두에 변방이었기에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고 소규모 교전에 그쳤다.

    이때 청나라 주력은 중국 본토를 평정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마침 당시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내자며 북벌(北伐)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정예 포수들을 육성했다. 효종은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 지원군을 보내 청군과 함께 러시아 원정대를 격퇴했다. 이 때문에 청·러 국경분쟁 사건은 우리에게는 ‘나선정벌’로 유명하다. 청나라를 치자는 대의명분으로 양성한 군대가 오히려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친 것은 분명 아이러니지만, 조선 포수의 탁월한 사격술은 러시아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러시아군은 벙거지(戰笠) 쓴 조선군을 두고 말했다.

    “머리 큰 병사들이 두렵다.”

    이후 청나라는 중국 전역을 장악하고 삼번의 난을 평정하며, 대만의 정씨 왕조를 정복해 중국 지배를 공고히 했다. 내부가 안정되자 청나라는 러시아의 알바진 요새를 공략하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북만주의 국경 분쟁을 끝냈다. 이때 만주는 태평양까지 이어진 광활한 땅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력이 역전되면서 국경선도 변했다.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위기에 몰린 틈을 타서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 연해주를 확보했다. 니콜라이 1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러시아 제국의 국기는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지 않는 법이니라.”

    1860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만주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의 랴오닝, 다롄을 양 날개 삼아 남하했다. ‘동방을 정복하라’는 뜻인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야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때 러시아는 하얼빈을 동북의 허브로 삼았다. 하얼빈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블라디보스토크, 다롄을 잇는 북만주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심각한 위기를 느낀 것은 일본이었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일본의 북진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일본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대국 러시아가 ‘제국의 통로’ 철도를 완비하고 나면 막대한 물량을 순식간에 만주로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러시아를 선제공격했고, 1년 반의 전쟁 끝에 힘겹게 승리한다.



    “코레아 우라!”

    지금 돌이켜보면 희한한 일이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을 때 많은 아시아인이 환호했다. 당시 아시아는 영국·미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며 서양에 열등감을 느꼈다. 황인은 제아무리 애써봤자 백인에게 안 된다고 자조하는 풍조가 퍼졌다. 그런데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자, 아시아인들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중국의 쑨원, 인도네시아의 네루도 모두 일본의 승전에 기뻐했고, 인도의 간디는 “일본의 승리가 사방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이제 그 열매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까지 했다.

    조선의 청년 안중근도 일본의 승리에 기뻐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로 보면 큰 오판이었다. 조선의 고종과 명성황후는 신진 강호 러시아로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1895년 청나라를 꺾고 명성황후를 살해하며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지만, 이듬해 고종은 궁을 탈출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면서까지(俄館播遷) 친일내각을 견제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전략[引俄拒日]’이 효과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유일한 견제 세력인 러시아가 사라졌다. 이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데 방해될 것이 없었다.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 체결을 강행했다. 이로써 조선은 정식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이 되어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고종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이상설·이범진을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지만, 열강의 동정을 샀을 뿐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었다. 1907년 고종 황제는 퇴위했고, 조선의 군부와 무관학교가 폐지되어 외교안보 주권이 모두 사라졌다.

    그 후 2년 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청나라 영토지만 러시아 동청철도가 관할하는 하얼빈 역에서 조선 독립군 참모중장이 일본의 수상을 벨기에제 권총 FN M1900으로 사살하며 에스페란토어로 외쳤다.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하얼빈이 얼마나 다양한 세력 간 이해관계가 얽혀 돌아가는 땅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안중근은 먼저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돼 심문을 받았으나, 러시아는 그가 조선 국적을 가졌기에 러시아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일본에 인계했다. 일본은 ‘한국 신민과 일본제국 신민을 동등하게 대하는’ 을사늑약과 일본제국의 형법에 의거해 안중근을 사형시켰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받아내며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다스리는 일제강점 시대가 되었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푸이의 괴뢰정부를 내세워 만주국을 사실상 식민통치했다. 일본제국은 미국·영국과 적대하며 교류·유학이 모두 끊어졌고 서양 문명을 만날 곳이 없었다. 이때 하얼빈은 “일본인이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서양”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많은 백계(반공) 러시아인, 유대인, 동유럽의 폴란드인,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까지 하얼빈에 망명했다. 하얼빈은 30여 민족이 섞여 사는 국제도시였고 ‘서양문명의 프런티어’였다.

    더욱이 나라가 망하고 비참한 신세가 된 러시아인을 보며 일본인은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소설가 다치바나 소토오는 말했다.
    “하얼빈! 바다가 없는 상하이…(중략)…엽기와 소설적인 것(로맨틱한 것)과 모험이 소용돌이치며, 과거와 미래가 지그재그로 교향악을 울리고 있는 북만의 국제도시! 그리고 쇠락한 제정 러시아의 대공작이 길모퉁이에서 행인의 구두를 닦으며 제실(帝室) 가극단의 간판 무용수가 나이 들어 길가에서 성냥을 팔고 있는 슬픈 도회!”


    새로운 무기, 세균

    그러나 일본의 기고만장함은 오래갈 수 없었다. 중국은 연이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항일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소련은 힘겨운 내전과 혼란을 극복한 뒤 5개년계획으로 경제를 추스르고 다시금 대국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군사모험주의에 맛들인 일본은 소련을 공격해보았으나 연달아 패했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력을 집중한다고 해도 광활한 중국 대륙을 정복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일본은 물량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세균전 무기를 개발했다. 당시 일본군 수뇌는 주장했다.

    “일본은 철·광물 등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원자재가 부족하므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 세균전 무기가 그중 하나다.”

    하얼빈에 설치된 731부대는 사람을 통나무(마루타) 취급하며 잔학한 생체실험을 했다. 또한 일본은 “다 죽이고, 다 태우고, 다 뺏는(殺光, 燒光, 搶光)” 삼광작전(三光作戰)을 수행하며 중국을 잔혹하게 지배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패전했다. 일본은 끝내 중국을 제압하지 못했고, 미국은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으며, 소련은 만주로 진격했다. 소련의 명장 바실레프스키는 ‘8월의 폭풍’ 작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국민당에 비해 절대 열세였던 공산당은 역전의 순간이 온 것을 직감했다. 마오쩌둥은 말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근거지를 다 잃는다 해도 동북만 있다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견고하다. 물론 다른 근거지도 잃지 않고 동북도 있다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더욱더 공고하다.”

    국민당의 장제스도 만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공산당의 주력이 북방에 있는 반면, 국민당의 주력은 남방에 있었다. 더욱이 소련은 다롄항을 폐쇄해 국민당의 수송선을 들여보내주지 않았고, 철도도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국민당의 발이 묶인 사이에 공산당은 재빨리 만주 요지를 장악했다. 소련은 노획한 일본군 항공기 925대, 전차 369대, 야포 1226문, 소총 30만 정 등 막대한 무기와 탄약·식량·군수품을 대부분 홍군에 넘겨주었다.

    1948년 린뱌오가 만주 전역에서 국민당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공산군은 확실히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결국 공산당은 만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통일한 청나라의 정복을 재현했고, 압도적 우위에 있던 장제스는 거짓말처럼 마오쩌둥에게 밀려 대만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원을 얻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해왔지만, 청나라 이후로는 “만주를 얻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생겼다.



    “만주 얻어야 천하 얻는다”

    공산혁명 초기에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매우 굳건했다. 그러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던가. 소련이 사회주의 진영의 맹주로 나서며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내정에 간섭하자 중국은 크게 반발했다. 양국의 긴장은 헤이룽장성 지역 국경분쟁으로 이어졌다.

    츠쯔젠의 소설 ‘돼지기름 한 항아리’는 중국·소련의 미묘한 관계 변화에 휘둘리는 헤이룽장 사람들의 일면을 그려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좋았을 때, 헤이룽장의 한 산촌에서 살던 여자가 출산을 앞두고 극심한 진통이 왔다. 산촌에서 중국 읍내까지 가기보다 차라리 강 건너편 소련 읍내에 가는 게 훨씬 빨랐다. 그래서 가족은 썰매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소련의 병원에서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양국 관계가 험악해지자, 소련에서 출산한 가족 전체가 소련 스파이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모든 광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 그녀는 “날개를 활짝 펴고 강 양안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한다.

    외교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였지만, 오늘날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다.

    오늘날 헤이룽장성은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 중화학공업이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곳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중국에서 가장 낙후한 공업지대가 됐다. 중국·러시아·몽골·한반도를 잇는 동북아의 허브임에도 인근 지역의 경제가 그리 발달하지 않고 경제교류가 제한적이라 물동량 부족으로 허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대(對)러시아 창구이나 러시아는 중국과 협력·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마어마한 중국 인구가 연해주를 잠식할 것을 우려해 극동 교류에는 소극적이다.

    헤이룽장의 경제는 과거의 덫에 걸려 있다. 1차산업은 쌀·옥수수·콩 위주고, 2차산업은 노후한 중화학 공업이며, 3차산업은 유통·요식·교통 등 전통 서비스업 위주다. 헤이룽장도 스스로의 약점을 잘 알기에 산업구조를 선진화하고, 금융·물류업, IT 서비스 분야(클라우드 컴퓨팅) 등을 육성하며, 러시아·몽골 등과의 교류를 촉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걸리며 성과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헤이룽장을 둘러싸고 있는 중국·러시아·몽골·남북한·일본·미국 등 여러 나라가 화해 협력하고 공존공영을 추진할 때 헤이룽장에 진정한 번영이 찾아오지 않을까. 과거 긴장의 땅이었던 헤이룽장이 미래에는 협력의 땅이 되기를 바란다.




    김용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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