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호

北, ‘민간단체 핵 사찰’ 자청해 미 대선까지 지연전술

외무성 온건파 주도권 장악, 개방파 경제관료 내각 포진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3-09-25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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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민간단체 핵 사찰’ 자청해 미 대선까지 지연전술

    9월3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제11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

    ‘북한, 9·9절 군사 퍼레이드서 노동미사일 공개’ ‘북 9·9절 11년 만에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 ‘대포동보다 첨단형, 주변국 긴장’ ‘북, 탄도미사일 9·9절 공개 주목’…

    9월8일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국내외 언론들은 ‘북한이 정권수립 55주년 기념일 행사장에서 사거리 4000km의 신형 미사일과 노동미사일을 공개하는 등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일 예정’이라는 보도를 쏟아냈다. 이 때문에 6자회담으로 조성된 대화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을 것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추석 연휴와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던 통일부와 외교부 등 관계기관은 갑작스러운 뉴스에 분주해졌다. 소식은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칠 만큼 빠른 속도로 파급됐다. 한 석간신문이 9월9일자에서 ‘노동미사일 등을 비롯한 각종 신구형 무기들을 총동원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는 기사를 ‘미리’ 출고했을 만큼 ‘9·9절 무력시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각군 의장대가 집결한 열병식과 시민 100만명이 참가한 군중행사는 있었지만 미사일 무력시위는 그림자도 없었다. 결국 수많은 언론들은 ‘빗나간 예측’ 혹은 ‘뼈아픈 오보’를 남긴 셈이 됐다.

    그날 저녁 기자와 만난 통일부 관계자는 “언론이 최근 평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미처 따라잡지 못한 채 외신보도를 과신한 측면이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지난 일이니 쉽게 말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부 내에서는 ‘9·9절 위기설’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는 설명이었다. 오히려 경제개방정책을 보다 극적으로 선언하는 조치가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뚜렷한 결과가 없어 아쉽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더 이상 초강수는 없다”

    한편 9·9절 직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인사는 “수십만 명이 동원되어 행사준비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지만 무력시위나 군사 퍼레이드 연습 같은 건 없었다”고 전했다. 북한의 분위기가 지난 봄과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미리 감지했다면 무더기로 빗나간 예측보도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촌평이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8월 이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인사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우선 미국이 선제공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상당부분 해소됐다고 한다. 평양에서 열린 학술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민주당 김성호 의원은 “여유가 느껴졌다. 지난해 10월 방문했을 때보다 에너지 사정도 나아진 듯했고 평양 시민들도 안정돼 있는 등 최악의 상황은 벗어난 것이 확실해 보였다”고 전했다. 김의원은 또 “대남사업 담당기구인 아태평화위 리종혁 부위원장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는 핵무기 보유가 목적이 아니라고, 미국이 우리를 오해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또한 경제를 개방해도 체제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2월에 이어 8월말 다시 평양을 방문해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고 돌아온 한 인사는 “외무성 사람들이 ‘우리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2월 방북했을 때 상황을 주도하고 있던 군부 강경파들이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계기로 정책과정에서 배제됐다는 전언이었다.

    “2월에는 강경하게 밀어붙이면 결국 1994년 제네바합의 때처럼 미국이 양보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클린턴과 부시는 다르다’고 아무리 설득해봐야 말이 먹히지 않았다. 4월 3자회담에서 리근 대표가 ‘핵보유 선언’을 한 것 또한 ‘미국을 움직이려면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강경파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고 들었다.

    위기가 고조되면 강경한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월만 해도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불안감이 최대치에 이를 때였다. 이 무렵에는 김정일 위원장도 군부에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지난해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납치 시인’으로 망신을 당한 후 외부활동에도 은근히 견제를 받아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외무성 당국자들, 그 중에서도 경제파트나 대외협력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한 40~50대 인물들이 의사결정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이 결코 핵무장을 용인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 이들은 대화 분위기를 유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했다. 핵실험이나 무력시위, 초강경 발언 등으로 섣불리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9월초 베이징에서 북한 당국자들을 접촉했다는 한 한반도문제 전문가는 “북한이 6자회담을 받아들이기로 한 과정에서 외무성과 군부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북한 당국자들이 “군부가 3자회담을 고집한 반면 6자회담은 외교분야 인사들이 주로 지지했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더라는 것. ‘6자회담은 동북아를 분열시키려는 미국의 술책이니 말려들면 안 된다’는 것이 강경파의 입장이었던 데 반해, ‘일단 위기를 벗어나 시간을 벌자’는 것이 온건파의 논리였다고 한다.

    특히 8월30일 외무성이 “6자회담은 탁상공론에 불과했고 백해무익한 것이었다”고 발표한 것은 향후 회담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고 강경파의 입장을 배려해주기 위한 ‘플레이’로 봐야 한다고 이 전문가는 분석했다. 북한의 이러한 ‘플레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갑자기 급진적인 유화책을 들고 나올 리도 없지만, 그 속내나 배경은 이미 달라졌다는 설명이었다.

    북한 당국자들, 특히 대외사업을 담당하는 인사들이 외국정부 관계자들과 만난 사석에서 ‘강온파 대립’ 혹은 ‘군부의 반발’을 언급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외국 주재경험이나 국제감각이 있는 외교분야 종사자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놀랄 만큼 소탈하고 자유분방하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이들은 특히 ‘듣는 귀가 많다’는 이유로 영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해 속내를 털어놓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도 유사한 발언을 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은 지난 2000년 10월 평양 방문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나는 북미 관계개선을 원하지만 군부가 반으로 갈라져 있고, 외무성에도 반대파들이 있어 어려움이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사실 북한의 대남·대외정책 결정과정에서 ‘강온파의 대립’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정보기관과 북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논란을 거듭해온 주제다. 우리 정부의 정보분석파트나 몇몇 전문가들은 이러한 발언을 ‘고도로 계산된 협상전술’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한 사전포석이나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들이대는 핑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기관 본위주의’에 따른 마찰은 존재한다는 견해가 보다 지배적이다. 미국식 강온 대립과는 그 수준이나 강도가 다르겠지만, 외교나 대외경제를 담당하는 사람들과 국방을 담당하는 군인들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최종결정권자인 김위원장의 ‘마음’을 살 만한 정책대안을 만들기 위한 경쟁과 이견이 존재한다는 분석이다.

    북한에서 구체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는 작업은 주로 정무원 외무성에서 담당하고 있다. 원래 외무성은 당 전문부서가 행정기구를 통제하는 북한의 정부조직 원리에 따라 노동당 중앙위 산하 국제부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외무성은 이러한 통제에서 벗어나 김정일 위원장 직할체제에 놓여 있다.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검증을 받지만 정책통제는 받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자율성이 있다고 외무성 출신 탈북자들은 증언한다.

    1990년대 이후 핵문제 관련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외무성이 원자력공업부나 인민무력부 등과 협의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이를 취합해 보고하면 백남순 외무상을 거쳐 김위원장에게 전달되는 것이 공식적인 시스템. 지난 1989년 설치된 외무성 산하 싱크탱크 ‘군축평화연구소’도 비교적 자유롭게 정책대안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종 이너서클 ‘서기실’

    그러나 탈북한 고위인사들의 증언과 북한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직표에는 드러나지 않는 ‘최종 이너서클’이 존재한다. 김위원장의 집무실 내에 존재하는 ‘서기실’이 바로 그것이다.

    서기실은 김위원장의 후계구도가 공고해진 1980년대 중반부터 당 중앙위에서 독립해 지금과 같은 기능을 하게됐다. 다른 어느 기관의 지휘도 받지 않고 오직 김위원장의 지시에만 따른다는 서기실은, 조직 자체가 베일에 싸여 있고 그 구성원들 또한 공식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우리 정보기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서기실의 구성원 수는 대략 40~50명선. 우선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의 제1부부장들이 서기를 겸임하고 나머지는 김위원장이 직접 선발한다. 이들은 김위원장에게 올라오는 정책과제들을 치열한 내부토론을 통해 일일이 검토하고 때로는 김위원장 명의로 서명하기도 한다. 이는 외무성에서 작성한 정책보고서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우리의 대통령비서실 혹은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 해당하는 셈. 주요이슈가 발생하면 서기실 내에 태스크포스를 설치하는 것이 관례이므로 핵문제와 관련해서도 팀이 꾸려져 있으리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北, ‘민간단체 핵 사찰’ 자청해 미 대선까지 지연전술

    9월9일 오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공화국 창건 55주년 기념 열병식’

    탈북한 외무성 관리들에 따르면 핵 문제와 관련한 정책결정과정에서의 마찰은 대략 두 차례에 걸쳐 빚어진다. 우선 외무성이 인민무력부나 원자력공업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입장 차이. ‘개방파’ 외교관료들과 ‘강경파’ 군부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여기서 나타난다. 또 한 차례의 마찰은 밑에서 보고된 안을 놓고 서기실에서 벌이는 의견충돌. 서기실 또한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까닭에 경제부흥에 중심을 두는 이들과 체제안보에 무게를 두는 이들 간에 이견이 생길 수 있다.

    주로 70대 이상의 노장인 강경파들은 ‘핵 보유만이 조선의 살길’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지만 50대 이하의 젊은 관료들은 입장이 다르다. 미국을 불신하기는 마찬가지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 실체는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개방파들은 모험주의에 가까운 적대정책 대신 경제발전을 노리는 편승전략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등의 온건파가 김영춘 인민군 총참모장 등의 강경파를 대신해 주도권을 잡았다는 최근의 전언에 따르면 정책생산과정에서는 외무성이, 서기실 검토과정에서는 ‘경제 중시파’의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노장파 군 지휘관들의 열세와 젊은 전문관료들의 득세로 요약할 수 있는 것. 이러한 변화는 지난 8월 치러진 제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나 9월3일 열린 1차회의의 결정사항을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이 인사조치를 상징하는 핵심 키워드는 ‘세대교체’와 ‘경제중시’. 이같은 경향은 최고인민회의, 군, 내각에서 두루 발견된다.

    먼저 11기 대의원선거 결과를 살펴보면, 군부에서는 리하일, 박기서 차수 등 노장파 야전 사령관들이 탈락하고 당에서 통제할 수 있는 소장파 정치위원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송호경 부위원장,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정운업 회장 등 대남업무를 담당하는 인사들은 전진배치됐다. 전체적으로 보면 선출된 대의원 686명 가운데 55세 이하가 전체의 52.3%를 차지하고 있다.

    9월3일 1차회의에서 임명된 박봉주 총리 등 경제전문가로 짜여진 새 내각도 이전보다 10년 이상 젊어진 50~60대가 주를 이룬다. 특히 이번 인사에서는 경제계획을 총괄하는 국가계획위원회를 비롯해 주요 공업부문의 장관급 책임자가 모두 교체되어 경제 부흥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의지가 확인되었다.

    국방위원회의 경우는 연형묵 노동당 자강도위원회 책임비서가 부위원장으로 승진하고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위원으로 내려앉았다. 연형묵은 1992년 정무원 총리를 지내며 남북고위급회담 등에 참석하다가 자강도 책임비서로 문책성 좌천(앞서나간 ‘경제개방’ 주장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을 당했던 인물. 이후 군수공업 기지가 밀집해 있는 자강도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부흥시킨 덕분에 ‘북한 군수경제의 민수경제 전환’이라는 난제를 맡을 적임자로 떠오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총체적 변화들은 북한이 ‘미국과의 강경대립’보다는 ‘편승전략’을 선택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허문영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분석한다. “기본적으로 적화통일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우선순위는 ‘경제 부흥을 통한 생존 그 자체’라는 데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당연히 향후 북한의 핵문제 해결방향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더이상 경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핵개발을 강행할 자세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관심의 초점은 향후 북한 외교파트가 핵문제 및 미국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이와 관련해 ‘신동아’는 북한 외무성 관계자들, 구체적으로는 싱크탱크 역할을 맡고 있는 군축평화연구소 당국자들이 ‘제3자에 의한 핵 검증’을 마지막 카드로 준비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대신 제3의 국제기구에 핵개발 의혹을 검증받는다는 것이다.

    그 주체로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은 영국 런던에 사무국을 두고 있는 군축·평화회의기구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 지난 8월 이 단체의 고위인사가 평양을 방문해, 내년 봄에 핵문제 등 동북아 안보문제에 관한 워크숍을 열기로 외무성 관계자들과 합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북한측은 워크숍에 참가하는 각국의 핵 과학자 20~30명에게 영변 핵시설 등 ‘주요 의혹대상’을 공개하는 ‘민간사찰’ 방안에도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퍼그워시 회의’는 195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버트런드 러셀의 공동선언이 계기가 되어 1957년 캐나다 퍼그워시에서 첫 회의를 연 반전·반핵 민간국제회의체. 미국이나 영국은 물론 독일,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의 회원과 임원진을 보유하고 있으며 199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공신력 있는 기구다.

    ‘제3자 검증’이라는 카드에 담겨 있는 북한의 의중은 한마디로 미국과 IAEA에 대한 불신이다. 특히 그동안 북한은 수 차례에 걸쳐 “IAEA는 미국의 꼭두각시일 뿐이며, NPT체제는 허깨비”라고 주장한 바 있다. 북한 외무성이 퍼그워시 회의를 선택한 것은 ‘핵 의혹이 문제가 되었으니 검증은 받겠지만, 그 주체가 IAEA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표시인 셈이다. 또한 ‘외부세력에 의한 핵 검증’이라는 아이디어 자체에 부정적인 군부 강경파에 대한 배려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퍼그워시 회의측은 “애초에 문제가 있었는지부터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는 입장이다. 미국 첩보기관들의 관측정보와 북한의 모호한 태도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상황을 악화시킨 만큼, 폐연료봉 재처리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실제로 가동되었는지부터 다시 따져나가겠다는 자세다.

    “中, 디젤유 10만t 추가공급”

    그러나 퍼그워시 워크숍의 핵 전문가들이 검증절차를 마친다 해도 미국 등 국제사회가 이를 100% 수용해 ‘핵 의혹이 풀렸다’고 인정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특히 폐연료봉 재처리와 달리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유무는 매우 정밀한 사찰방법으로만 검증이 가능하다. 이를 잘 알고 있을 평양 외무성이 퍼그워시 워크숍을 수락한 것은 명분 쌓기와 시간 끌기용이 아닌가 보여진다. 퍼그워시의 조사결과 그동안의 핵 의혹이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결론이 날 경우 미국이 제한공격, 정권교체 등으로 북한을 압박할 명분은 상당부분 사라지게 된다. 대신 북한은 미국에게 “왜 근거도 없이 난리를 치느냐”고 반박하며 시간을 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을 끄는 것이 최근 중국이 북한에 디젤유 10만t을 추가로 공급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8월 북한을 다녀온 한 소식통은 “같은 시기 평양에 머문 중국 고위인사로부터 디젤유 10만t 공급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했다. 기존에 공급되던 원유 이외에 6자회담 등 유화국면에 대한 ‘당근’으로 추가분량을 공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극심한 에너지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에게 디젤유 10만t은 적은 분량이 아니다. 한국은행의 GDP 분석에 따르면 북한의 원유도입량은 1990년대 후반에 매년 50만~90만t 규모였다. 그나마 북핵 위기가 첨예화된 지난해 말 미국이 제네바합의에 따라 매년 50만t씩 주기로 했던 중유공급을 중단한 후에는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최소한의 분량’이 전부였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동용승 북한연구팀장은 “이런 상황에서 디젤유 10만t의 추가공급은 최소한 수 개월 동안은 ‘숨통을 터주는’ 희소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앞서의 소식통은 “북한의 올해 작황이 좋아 식량문제가 한풀 꺾인 것도 시간 끌기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한 배경”이라고 전했다. 2모작으로 경작되는 감자와 벼가 모두 풍년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9월10일 세계식량계획(WFP)의 코르시노 북한담당관은 “꾸준히 추진된 종자개량과 좋은 날씨 때문에 북한의 올해 작황이 좋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식량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6자회담으로 조성된 진정국면을 최대한 활용해 내년 봄까지 현상태를 유지한 다음, 퍼그워시 워크숍을 통해 다시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 북한 지도부의 복안인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간 끌기의 최종목표가 2004년 미국 대선이라고 분석한다. 부시 행정부 대신 온건한 민주당이 집권하면 현재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개방파, 섣부른 이용은 금물

    결국 북한 지도부는 6자회담 자체가 문제해결의 장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위기국면을 진정시키고 추후 일정을 잡아가며 시간을 버는 수단일 뿐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회의에는 임하되 가시적인 결과를 만드는 데 머뭇거리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벼랑 끝 전술’은, 11월로 예상되는 2차 회의 이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에서 개방파가 주도권을 잡게 됐다는 관측은 한국 입장에서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국이나 한국이 개방파를 섣불리 이용하려 들다가는 오히려 그들을 실각하게 하거나 소극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체제 특성상 외부로부터 ‘말이 통하는 상대’로 평가받는 것 자체가 내부 경쟁자들의 공격빌미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북한의 전략 변화를 바라보는 한국의 시선이 조급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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