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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제청 파문’ 계기로 본 판사의 세계

철저한 서열제, 잘 나가는 ‘왕당파’

  • 글: 한겨레 경제부 기자 ryuyigeun@hani.co.kr

‘대법관 제청 파문’ 계기로 본 판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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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관 제청 파문 때 판사들이 가장 갈등했던 문제는 바로 집단적으로 뭘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말했다. 판사들은 스스로 알아서 ‘독립적’으로 판단하면 됐지, 어떤 의견에 대한 동의여부를 내놓고 밝히길 꺼린다는 것이다.

‘집단서명을 할 필요까지 있느냐’며 인식의 정도를 달리하는 법관도 많았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문제제기에는 동감이지만 지금 따라갈 만한 사안은 아니다”고 했다. 서울지법의 한 형사부장판사도 “대법관 인사뿐만 아니라 법원 인사개혁이 필요하지만, 사표나 서명의 의사표현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보탰다.

밀리면 사표 제출

이번 사태에 대한 판사간의 인식 편차는 법원행정처 출신 대 비(非)법원행정처 출신 구조에서 더욱 커졌다. 행정처 출신의 한 판사는 “대법관 제청 파문에 따른 갈등은 면밀히 따져봤을 때 행정처 출신과 그렇지 않은 출신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법관 경력 12∼13년차 판사가 행정처 심의관을 거치는지 여부에 따라 법관인사 등 법원내부 문제에 대해 상당히 엇갈린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행정처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판사들이 간다’는 게 법원 내부에서도 정설이다. 사실상 행정처 경력은 고등부장 승진의 보증수표다. 행정처 심의관은 통상 사법고시와 사법연수원 성적에 따라 뽑았는데, 최근에는 근무평정을 고려해 발탁하고 있다. 행정처 출신들은 재학중이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판사인 경우가 많다.

법원 내에서는 행정처 출신을 종종 영국의 청교도 혁명시대에 찰스 1세를 지지한 ‘왕당파’에 빗댄다. 왕당파처럼 대법원장의 결정이나 정책방향에 충성하는 무리란 뜻이다. 이들 행정처 출신 판사들은 사실상 현 인사제도가 유지될 경우 가장 큰 수혜자로 남는다.

그래서일까? 대법관 제청 파문이 불거졌을 때 상당수 행정처 법관들이나 행정처 출신 법관들은 판사들의 연판장 서명을 두고 “대다수 판사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파문을 진화하거나 현 제도의 당위성과 부득이함을 법원 안팎에 알리는 데 애썼다.

이번 서명이 비행정처 출신들이 주도한 ‘비주류의 외침’이 아니냐는 얘기도 들린다. 행정처 출신의 한 판사는 “행정처와 비행정처 출신의 정서가 갈리는 게 사실이다. 나는 판사를 하다 관두고 싶지 변호사 개업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비행정처 출신에다 서열이 중간이 안 돼 지방으로 초임을 나가는 절반 이상의 판사들은 언제 개업하는 게 좋은가를 두고 술자리에서 상의도 하고 고민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개업을 고민하는 같은 기수의 동료 판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할 만큼 판사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인식이 크게 다르다. 개업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판사와 개업할 때를 저울질하는 판사 사이에는 고등부장 승진이 놓여 있다. 법원행정처 근무를 ‘고등부장 승진의 터잡기’란 차원에서 봤을 때, 사실상 모든 문제의 뿌리는 고등부장 승진 여부로 이어진다.

고등부장 승진비율은 임관 동기 현직 법관 중 57%로, 해방 이후 거의 같은 수준이다. 지난 2월에 이어 9월에 있은 사시 11기의 고등부장 승진도 이와 비슷했다. 따라서 현행 승진 제도에 절반은 만족하고, 절반은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법관들은 중간 이탈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승진 인사 구조에 불만을 갖는 비율이 훨씬 높은 편이다.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서는 최고 엘리트들이 법관이 되기를 희망하지 않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최고 엘리트들이 법관을 지원하는 현실이 고등부장 승진탈락 이후 법관들을 사직으로 몰아가는 아이러니한 정서적 환경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한 판사는 “판사들은 엘리트 의식이 무척 강해 동료한테 밀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밀리면 자연스럽게 사표를 낸다”고 말했다.

승진이 되지 않더라도 명예롭게 법원에 남아 근무할 수 있는 인사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고등부장이 누리던 혜택을 이번 기회에 아예 없애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고등부장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만이 차관급 혜택을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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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겨레 경제부 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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