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천하장사 이만기(李萬基·40)씨에게 씨름은 곧 그의 인생이다. 고향인 경남 의령 곡소마을에서의 어린 시절 그는 매일 아침 6시면 소 두 마리를 끌고 뒷산에 올라 꼴을 먹이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되던 해 마산의 무학초등학교로 전학을 하면서 그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된다. 특별활동반으로 선택한 게 바로 씨름반이었는데, 거기서 황경수 감독을 만나게 되었던 것. 황감독은 이씨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고 그와의 인연은 중·고교를 거쳐 민속씨름 선수 때까지 이어졌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씨름을 시작한 걸 뒤늦게 알고 공부해야 한다며 반대를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몸이 왜소했거든요. 그런데 황감독이 씨름에 소질도 있고, 몸은 나중에 크는 아이도 있다며 부모님을 설득했죠.”
중학교 1학년 때 이씨의 번호는 8번. 66명 중 8번째로 작은 학생이었다. 신체조건상 그는 기술을 이용해 상대를 쓰러뜨리는 ‘낮춤씨름(변칙기술)’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교에 진학하면서 이씨의 키와 몸무게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1년에 10cm씩 키가 크고, 10kg씩 몸무게가 불었다. 고3이 되면서 그는 힘으로 상대를 들어올려 제압하는 ‘큰씨름(들기술)’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1983년 제1회 전국 천하장사대회. 경남대 체육학과 2학년생 ‘이만기’를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까지 이씨는 단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는 신출내기 선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4강에서 만난 선수는 당시 씨름계를 주름잡던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였다. 결과는 2대1로 이만기의 극적인 승리. 이변이었다. 이씨는 내쳐 달려, 전날 한라급 경기에서 무릎을 꿇었던 최욱진을 결승에서 다시 만나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영원한 천하장사 이만기의 시대’를 연 순간이었다. 그 후 1991년 은퇴하기까지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 등 통산 49회의 우승을 차지하며 씨름계를 평정했다. 그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