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구름 속에서 잠자는 여자, 그게 내 인생인지도 몰라요”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3-12-29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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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였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는 여자였다. 그는 플레어 스커트 자락을 휘날리며 애인에게 성깔 있는 발길질을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여배우를 육체와 사이즈로 재단하기 시작한 1950년대, 감히 섹시하다는 말조차 수줍어 야성녀라느니 대담하다느니 하는 수식어로 장식되던 그 여자 최지희는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도회적 이미지와 관능미를 동시에 갖춘 배우였다.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같은 시대의 글래머 스타 김혜정이 풍만한 에로티시즘으로 스크린을 휘어잡았다면, 최지희는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감수성으로 1960년대 청춘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스타였다. 간혹 엄앵란이나 최은희 같은 여배우들이 발랄한 여대생 혹은 관능미 넘치는 악녀의 역할을 하다가도 금세 청순 가련형의 여인으로 돌아와 시대의 부름을 따랐지만 최지희만은 달랐다. 그는 끝끝내 능동성과 불량함이 혼합되어 내재된 에너지를 억눌린 여성성과 맞바꾸지 않았고, 그 역동성 때문에 결국 액션과 코미디 같은 장르의 영화로 배우의 삶을 마감하고야 만다.

    그의 전격적인 은퇴과정은 한 시대가 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감당하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그려낸 완벽한 각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지희가 사라진 197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영화의 전성기 또한 막을 내렸다. 어찌 되었든 호스티스 영화에 나오는 최지희를 상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영화사적으로 볼 때 최지희의 등장은 엄앵란, 최은희, 조미령 등 동양적 외모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배우들의 대를 이어, 197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할 유지인이나 윤정희 같은 서구형의 지적인 냄새가 풀풀 풍기는 미인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최지희는 무엇보다도 ‘모던 걸’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각인시킨 여배우다. 1964년 작 이형표 감독의 ‘연애 졸업반’에서 그는 당시의 여성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직업인 여자 비행사로 나왔는가 하면, 이후 수많은 코미디물에서 여자 택시 운전사, 말띠 여대생 같은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을 연기해왔다.

    자신의 연기생활 중 가장 호연한 것으로 평가받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전근대적 결혼제도에 희생당한 셋째딸 용란으로 분한 그는 그해 영화상을 모조리 휩쓴다. 머슴 애인이 죽자 광기에 휩싸여 죽음으로 빠져드는 비극의 주인공 용란은, 그의 글래머러스한 육체와 도발적인 정신에 깃든 시대와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배역이기도 했다.

    이후 ‘서양적 가치관을 습득한 자유분방하면서도 정열적인 여인’이라는 최지희의 이미지는, 1970년대 영화계 컴백 이후 액션 장르에 흡수되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드세고 불량스러운 음지의 여성’으로 안착한다. 결국 1973년 피폐해진 영화판의 현실과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의 물결에 밀려 은퇴하게 되지만, 최지희의 여정은 이후로도 통큰 여장부 사업가로 계속되었다.



    한국의 브리지트 바르도, 한국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로 불렸던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그의 등장은 1960년대 한국 영화의 전성기에 무척이나 다양한 여성상이 스크린에서 소화되었으며, 당시 한국 사회가 여성의 사악함을 공개적으로 아름답다고 예찬하는 대담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짧고도 빛나는 증거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후 철저한 군사문화의 압력으로 호스티스, 버스 차장, 공원 같은 도시 주변부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정서적으로 착취하는 영화만이 충무로를 이끌던 시절, 평생 여배우로 남겠다던 이빈화, 남미리, 김혜정, 전계현, 태현실, 최난경 등의 ‘탐스러운 미인’들은 스크린에서 죄다 사라졌다. 그러한 면에서 브리지트 바르도나 그레타 가르보가 그러했듯, 최지희 역시 시대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시대를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오로지 가난 때문에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제가 열다섯 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왔는데 3년 전쯤에 모든 것을 중단하고 현장을 떠났어요. 요즘 하는 일은 앉아서 기획하고 조율하는 일이에요. 녹음실도 하나 갖고 있고요. 예전에 비하면 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보니 역시 현장에서 뛰는 게 좋구나, 일을 좇는 게 훨씬 행복하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현역 시절 최지희씨는 야성적이고 반항적인 여성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첫 영화 제목 또한 이와 딱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악녀’여서 이후 이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는데요.

    “그렇죠. ‘아름다운 악녀’라는 영화로 데뷔할 때 열다섯 살이었는데, 솔직히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 생활고 때문이었어요. 영화를 하면 밥은 먹여주니까요. 사실 그때는 영화가 뭔지도 잘 몰랐죠.”

    -어떻게 픽업되신 거예요? 다른 배우들처럼 등교길에 만나셨나요, 아니면 소문을 듣고 학교로 찾아왔던가요?

    “솔직히 저는 학교공부도 별로 못했고, 부산여고는 들어갔다가 중도에 그만두었어요. 그때는 월사금 안 갖다주면 학교 못 가던 시절이잖아요. 대신 돈 많은 부잣집 딸인 친구 덕에 무용학교로 옮겼죠. 부모님이 약국을 하는 친구였는데 저보고 ‘내가 돈을 댈 테니 같이 무용을 배우자’고 하더라고요. 무용을 배우면 악단에 무용수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죠.

    무용학교에 다니는 동안 어느 극단에 둘이 찾아가서 겨우겨우 입단을 했는데 그만 극단이 망해 여관에 붙들린 거예요. 단장님이 돈 가지고 올 때까지 단원들이 전부 여관에 그냥 머물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거기서 ‘산적의 딸’이라는 영화를 찍고 있던 윤애남 감독님의 여동생을 알게 됐어요. 그 여동생이 ‘산적의 딸’ 주연이었거든요.

    그 배우를 ‘언니 언니’ 하면서 흡사 강아지처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그 언니의 비서가 돼 있었죠. 어느 날 그 언니를 따라 서울의 ‘은하수’라는 다방-당시에는 그 다방이 연예계 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였거든요-구경을 갔다가 마침 배우를 찾고 있던 기획자를 만났어요. 그 영화가 1956년에 김일해 감독님이 만든 ‘인걸 홍길동’이라는 영화였어요. 황해남씨랑 내가 스카우트되어 함께 출연하게 됐어요. 영화는 한번보지도 못했는데 덜컥 데뷔하게 된 셈이죠.

    저를 픽업한 제작자 최남용씨가 저에게는 양아버지나 마찬가지예요. 그때는 감독보다 제작자가 더 힘이 있는 시절이었어요. 서울에 올라왔는데 갈 데가 없으니까 그분 집에서 기거했죠. 딸이 없어서 저를 딸같이 생각하셨어요. 이만큼 길러 두 갈래로 땋고 다니던 머리도 미장원에 데려가 자르고는 난생 처음 파마도 시켜줬지요. 이름도 그분이 지어주셨고요.”

    -그래서 예명의 성이 최씨가 된 거군요.

    “그래서 최지희예요. 예전에 최지혜씨라는 여배우가 계셨는데 내가 그분과 닮았대요. 그때 최지혜씨는 이미 미군 공보관하고 결혼해서 미국에 간 뒤였거든요. 저를 스카우트한 그 제작자가 그분을 참 좋아했었나 봐요.

    그렇게 ‘인걸 홍길동’을 찍는 도중에 ‘아름다운 악녀’에 픽업이 됐어요. 영화계에 나오자마자 겹치기 촬영을 하게 된 거죠.”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화가를 사랑하는 창녀 아니었던가요?

    “창녀는 아니고 소매치기였어요. 깡패들이 전쟁고아 소녀를 데려다가 소매치기 교육을 시킨 거죠. 첫 장면이 화신백화점에서 지갑을 훔치는 장면인데, 그걸 이 화가가 봐요. 그래서 파고다공원에 데리고 가서 ‘너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죠. 그러다 그 화가가 사는 남산의 아파트에 같이 가는데, 이 소녀가 ‘아, 알았다. 당신이 나를 집에까지 데려온 이유를 알겠다’고 그러면서 갑자기 옷을 막 벗죠. 그때만 해도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흔치 않은 시절이었거든요. 그 화가와 청계천 복개하기 전에 즐비하던 선술집에 같이 가서는 술에 수면제를 타서 먹이고 지갑을 훔쳐 나오죠. 그런 캐릭터였어요.”

    ‘여자 제임스 딘’

    지금도 올드팬들은 ‘최지희’라는 이름 석자에서 곧바로 영화 ‘아름다운 악녀’를 떠올릴 것이다. 김화가 쓴 ‘한국영화전사’는 최지희에 대해 ‘그녀처럼 데뷔작의 이미지가 강한 배우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데뷔작은 시나리오 작가 박종호와 이강천 감독이 오로지 최지희를 위해 만든 영화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그녀는 아름다운 악녀 그 자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름다운 악녀’처럼 6·25 직후 1950년대 초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창녀, 양공주 등 밑바닥 여성을 그린 영화를 흔히 ‘아프레 걸’ 영화라 한다. 조정호 감독의 1957년작 ‘전후파-아프레 걸’이란 영화제목에서 따온 이 말은 이전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여성과는 사뭇 다른 주인공을 그린 영화들을 지칭한다. 쾌락을 위해 혹은 독립할 수 있는 돈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거리낌없이 이용하고, 당시 여성들에게 강요되던 헌신과 수용의 역할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캐릭터들. 일종의 팜므 파탈을 그린 이들 영화에 등장한 매혹적인 ‘안티 히로인’으로는 신상옥 감독의 1958년작 ‘지옥화’의 최은희, 조긍하 감독의 1964년작 ‘육체의 고백’의 황정순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지희의 ‘아름다운 악녀’는 사랑을 믿지 않으며 무심히 남자를 유혹하고 명동의 거리를 방황하는 10대 아프레 걸의 이미지를 선사한다. 이전의 아프레 걸들과는 달리 보헤미안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가 더해진 그는 고아로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완전히 절연한 반항아의 이미지, 한마디로 ‘여자 제임스 딘’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당대 젊은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얻었다.

    이러한 과잉 성애의 아프레 걸들은, ‘오발탄’이나 ‘이 생명 다하도록’ 같은 그 시대 영화에서 남성들이 대부분 성불구 혹은 다리가 없는 거세된 남성으로 묘사된 것과 묘한 상보관계를 갖는다. 과잉 성애의 창녀와 성불구의 상이용사. 이들은 6·25가 낳은 1950년대 전후시대의 불안과 방황을 반영하는 어둠의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첫 영화다 보니 고생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요.

    “화가 덕분에 개과천선해서 깡패 세계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다가 마지막에 죽지요. 그 영화에 비 내리는 신이 참 많았는데 죽는 장면에서도 비가 와요. 상대배우인 조황씨가 ‘은미 은미’하고 엉엉 울면서 죽은 저를 팔로 받쳐들고 가거든요. 그런데 비 오는 장면을 만드느라 청계천의 지저분한 물을 퍼부었어요. 11월이니 날은 엄청 추운데 냄새나는 물이 쏟아지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우성치고, 조황씨도 발음이 새서 ‘엉미 엉미’가 되지, 나는 시체 역할이었는데도 웃음이 나서 견딜 수가 없지….

    얼마나 추운지 이강천 감독님이 다방에서 몸 녹이라고 위스키티라는 걸 시켜주더라고요. 그게 내 생애 처음으로 먹어본 술이었어요. 죽는 장면에서 비틀거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연기가 아니었어요. 술을 먹여놓았으니 비틀거릴 수밖에요. 청계천에 고가도로가 생기고 나서 이강천 감독님이 ‘그 영화 필름이 남아 있었으면 옛날 청계천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더라고요.”

    -없어진 거예요?

    “그 무렵의 영화필름들은 모두 밀짚모자 테두리 만드는 데 들어갔어요. 엿장수가 영화사 근처에 오면 필름통째로 들고 가서 엿하고 바꾸어 먹은 걸요. 내가 그런 광경을 실제로 본 사람이에요. 너무너무 안타깝죠, 뭐. 스틸 사진도 지금은 한 장 한 장이 귀중한 자료지만, 그땐 바쁘니까 누구 하나 챙길 생각을 안 했어요.”

    -그게 그러니까 17세 때 일인가요.

    “정확하게 계산하면 16세 때죠. 내가 1940년생이고 그때가 1956년이니까.”

    -학교도 그때 그만두셨고요.

    “학교는 그전부터 그만뒀어요. 학교라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죠. 지금도 별로 달라진 건 없어요. 학교가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요즘도 절감하지만 오히려 안 배운 사람은 잘 모르니까 밀고 나가는 부분에서는 힘이 있고, 배운 사람은 조심하다가 만날 놓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독한 연기는 불행한 삶 때문

    -‘아름다운 악녀’를 찍고 나서 참 많은 역할을 맡으셨어요. 이후 영화인생을 죽 돌이켜보면 저는 개인적으로 최지희씨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제 운명이죠. 제가 워낙 술술 풀려나가는 인생은 아니거든요(웃음). 저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징용에 끌려가 고생을 엄청나게 하신 분인데, 첫 결혼에서 아들 딸 낳고 살던 중에 아내가 달아나버렸대요. 일하다가 놓친 거죠. 그러다가 우리 어머니와 재혼해서 나를 낳았죠.

    해방이 돼서 가족만 먼저 귀국을 하고 아버지는 전 재산을 정리해 다른 배로 왔는데, 글쎄 그 배가 풍랑을 만나 빈털터리가 된 거예요. 달랑 목숨만 건져서 빈손으로 고향으로 온들 무슨 수가 있었겠어요? 다시 돈을 벌어보겠다고 일본행 배에 밀항했다가 붙잡혀서 형무소 신세를 지셨죠. 온갖 고초를 겪은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셨고, 어머니는 혼자서 행상을 하며 힘겹게 자식들을 키웠죠. 지금도 눈에 선해요, 피곤해서 온통 입이 부르터 있던 어머니 모습이.

    그 뒤에도 쉽게 풀리는 일이 없었어요. 귀국해서 처음 정착한 여수에서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 집안이 온통 뒤집어졌고, 이를 피해 고향으로 가니 이번에는 6·25가 덮쳤죠. 그러는 동안 저도 참혹한 광경을 많이 봤어요. 한마디로 소녀시절 내내 공포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아직 어려서 제대로 못 느꼈던 게 다행이죠.

    제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나, 배우생활 내내 남들과는 다른 이미지였던 건 그런 제 경험 때문이었을 거예요. 촬영할 때 가장 자신 있는 표정이 증오에 가득 찬 표정이었거든요. 그런 걸 잘했어요. 내 생활이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녀는 터질 듯이 아름다웠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당시 사람들은 최지희씨의 섹시함,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면에 열광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최지희씨의 모습에 자신들을 투사한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스스로 섹시하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단지 사람들이 섹시하다고 말하면 그런가 보다 했죠. 데뷔 무렵에는 어렸으니까 가슴도 작고 말랐어요. 지금처럼 성형수술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그저 속옷 속에 스펀지나 고무, 양말 같은 걸 넣고 촬영을 했죠. 감독들도 자꾸 ‘더 올려, 더 올려’ 하며 가슴을 크게 부풀려 섹시하게 만들라고 주문하곤 했어요. 그렇지만 그때 제 허리 사이즈가 22인치였어요. 일을 너무 많이 하니까 살찔 틈도 없었고. 어쨌든 그렇게 영화를 신나게 찍었죠.”

    -그러니까 그 섹시한 이미지는 만들어진 거였다는 이야긴가요.

    “만들어졌다고 하기는 어렵고, 섹시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는 거죠. 스펀지를 어떻게 넣으면 예쁠까, 어떤 표정을 지으면 예쁘게 보일까, 늘 고민했던 기억이 나요.”

    - ‘아름다운 악녀’가 개봉되고 나서 반응이 대단했죠.

    “엄청났어요. 순식간에 최고배우 대접을 받게 됐으니까요. 그 영화가 1957년 1월1일에 개봉했는데 무대 인사를 하러 부산에 갔더니 ‘경남이 낳은 영웅’이라는 거예요. 아버지 고향인 진주를 제 고향이라고 했거든요. 원래는 하동에서 태어났지만 사람들이 하동을 잘 모르니까 진주라고 하고 다닌 거죠.”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① 최지희의 데뷔작 ‘아름다운 악녀’ 포스터.<br>② 1980년대 사업에 몰두한 당시의 모습.<br>③ 1964년 최은희(왼쪽)와 함께 출연한 영화 ‘해녀’

    -신성일씨 수기를 읽어보면 ‘아름다운 악녀’의 최지희씨를 두고 ‘그녀는 터질 듯이 아름다웠다’고 표현했어요. 여담인데요, 지난달에 신성일씨 인터뷰기사 중에 당시에 최지희씨가 엄앵란씨와 함께 신성일씨를 두고 “네가 청혼 안 하면 내가 청혼하겠다”고 농담삼아 신경전을 벌였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신성일씨 별로 안 좋아했어요. 신성일씨와는 ‘자매의 화원’에서 처음 같이 공연을 했는데 키스마크 찍어 갖고 촬영장에 나타났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놀리곤 했죠. 신성일씨는 연출부 시절부터 알고 지냈어요. 내가 선배죠. 스태프 시절의 인상이 남아 있으니 좋아할 리가 없죠.

    나는요, 배우나 연예계 있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그 생활을 잘 아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가난인데 당시 연예인들은 다 가난했단 말이에요. 나 좋다고 따라다니다 내가 싫다고 하니 자살하려고 약을 먹은 감독도 있었어요. 그래도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거든요. 그 정도였으니 배우와 결혼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 해봤죠.”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아름다운 악녀’가 대성공을 거둔 후 상당히 많은 작품에 한꺼번에 출연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찍은 영화가 ‘애모’라는 작품이었어요. 황정순씨, 이민자씨, 제가 나오는 세 자매 얘기죠. 저는 막내역을 맡았어요. 기생인 언니가 돈을 벌어 여대생 동생들을 공부시키는 스토리였는데, 그 영화도 꽤 성공했어요. 그 다음 찍은 영화가 구봉서씨 애인으로 나온 ‘오부자’고. 워낙 작품을 일사천리로 찍던 시절이라 출연한 작품수도 많고, 어떻게 찍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운명의 남자, P

    -1961년에 미국에 유학 가셨더군요. 워싱턴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뉴욕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에서 공부를 해 오필리아 역을 맡았다고 돼 있던데요.

    “미국을 어떻게 가게 됐는지 이야기하려면 남자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웃음). 누구라고 하면 금방 알 만한 사람이니까 그냥 P씨라고만 해두죠. 그 사람을 1958년 김지미씨 결혼식장에 갔다 오다가 명동에서 만났어요. 당시에 그 사람은 조지타운대 유학생으로 학생회장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만남이 계기가 됐죠.”

    -쉽게 말해 사랑을 좇아 미국까지 따라가신 거네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갔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날 더 좋아했으니까. 처음에는 그 사람만 미국 학교로 돌아가고 나는 한국에 있었어요. 연앤지 뭔지도 몰랐죠. 그 사람은 부잣집 아들이고 나는 하찮은 배우였으니, 그 사람이 나를 가르쳐야겠다 싶으니까 선생님도 보내주고 영어공부도 시켜주고 그랬어요. 나를 키워서 자기 부인으로 삼으려고 했던 거죠. 일종의 신부수업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지내다 보니 너무 간섭을 해서 지겹더라고요. 파티를 가도 사람을 꼭 하나 딸려서 보내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안 그러면 훌쩍 날아갈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하고.

    그렇게 한 2년 편지도 쓰고 목소리도 녹음해서 보내주고 왔다갔다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걸로는 성이 안 차니까 결국 유학을 가게 된 거예요. P씨가 초청장도 만들어주고 장학금도 주선해주고 그랬거든요. 워싱턴에 건너가서는 한동안 공무원 하는 가정집에서 하숙하며 영어를 배웠는데, 처음 갔을 때는 신났죠. 그때가 5·16 직후였는데 대사관에서 여는 파티에 가서 호스트 노릇을 하기도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그때 처음 만났고요.

    한 달쯤 지내고 나니 ‘내가 연기를 배우러 왔지 영어 배우러 왔나’ 싶더라고요. 고집을 피워서 뉴욕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로 옮겼죠. 갑갑한 워싱턴에 있다가 뉴욕에 가니까 숨이 탁 트이는 게 살 것 같았어요. 거기서 모던 발레부터 시작해 다 배웠어요.”

    -행복한 시절이었나 봅니다. 그때 얘기를 하니 눈이 빛나네요.

    “그렇게 마냥 잘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사기를 당했다는 거예요. 미국에 건너올 때 믿고 돈을 맡겼던 사람이 사라져버린 거죠. 마음이 급했죠. 내가 소녀가장이었으니 가족들은 쫄쫄 굶을 판이고. 봄방학이 가까워올 무렵에 P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네 문제는 너 스스로 해결해라’ 그러는 거예요. 너는 너 나는 나, 한마디로 미국식이죠. 기가 차잖아요. 이런 남자를 믿고 어떻게 사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 남자가 비행장에 나와서 우는 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와버렸어요.”

    -그렇게 헤어졌군요.

    “아니에요. 그 뒤로도 연락하며 잘 지냈어요, 친구 겸 애인 겸 해서. 헤어진 것은 1966년 내가 결혼하면서예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무슨 관계였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갖기에는 부담스럽지만 남 주기는 아까운 사람이었다고 할까요.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결혼 안 했어요.”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말띠 여대생’ ‘성난 능금’ 등의 장르 영화에 주로 출연했습니다.

    “귀국해서 사흘 만에 새 영화를 계약했어요. 얼른 출연해서 먹고 사는 게 급했으니 영화 엄청나게 찍었죠. 어찌나 바빴는지 그 유명한 ‘김지미·최무룡 사건’ 때, 내가 옆에 있었는데 눈치도 못 챘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커플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내가 좀 불리해졌어요. 분명 나한테 맞는 역인데 엄앵란씨나 김지미씨 같은 커플 여배우들이 맡기도 하고. 그래서 왜 내 역할을 빼앗아가냐고 대든 적도 있어요(웃음). 미국에서 거의 1년을 있었으니 본 게 많잖아요. 그걸 그대로 영화에서 써먹었죠. 청춘물이라는 청춘물에는 다 나갔어요.”

    ‘말띠 여대생’과 ‘말띠 신부’는 이형표 감독과 김기덕 감독이 1964년과 1966년에 만든 일련의 코미디물이다. 말띠 사감과 말띠 여대생의 승강이, 그리고 이윽고 말띠 신부가 된 이들의 에피소드를 담은 일종의 시리즈물. 이들 시리즈는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고 억척스럽다’는 사회적 편견을 답습하는 세태와 편견을 깨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말띠 해에 여자를 낳지 않으려고 금욕과 거짓 임신으로 남편들을 조정하는 말띠 여자들의 모습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반복하는 모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들은 결국 산부인과 의사의 설득에 따라 말띠 딸을 유산하지 않고 낳기로 결정한다. 이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1960년대 여성의 몸이란 산아제한을 권유하는 국가 권력과 개인의 성욕, 사회의 가치관 등이 싸우고 협상하는 일종의 시대적인 테이블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바로 이 영화가 개봉되던 1966년 백말띠 해에 태어났다.

    -그러다가 1963년 최지희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상을 안겨준 영화 ‘김약국의 딸들’에 출연합니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이 작품이 그렇듯 훌륭한 성과를 거둘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그때는 제가 워낙 작품을 많이 찍고 있을 때였어요. 처음에 영화사에서 시나리오를 받고 나니 박경리 선생님이 저희 집으로 오셔서 부탁하시던 게 기억나네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니까 잘해달라’는 당부였죠. 몹시 추운 겨울에 촬영했는데, 저 나름대로 무척 열심히 했어요. 한마디로 비극의 주인공 역이었어요. 집안에서는 머슴하고 연애했다고 쫓아내 아편쟁이 성불구자에게 시집을 보내고, 결국은 이 남편이 어머니까지 죽이고…. 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여자였죠.”

    -그때 각종 영화제에서 조연상을 휩쓸었어요.

    “사실 그 역할이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 챙기느라고 조연상을 많이 탔어요. 한마디로 ‘빽’이 없어서 그랬던 거죠 뭐. 당시 주연상을 받은 사람은 아마 최은희씨였을 거예요. 영화제 주최측에서도 상을 주기는 줘야겠다 싶어 나를 골랐던 모양인데, 왜 주연에게 조연상을 주는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받으러 가지 말까 하다가 결국 받아놓는 게 낫겠다 싶어서 갔죠.”

    -그때 사투리 연기는 어떻게 하셨어요. 더빙이었나요.

    “아니요, 내가 직접 했어요. 목소리 연기까지 직접 하다 보니 가장 어려운 게 웃는 거였어요. 알고 보면 웃음에는 참 여러 종류가 있는데 상황에 맞는 웃음소리를 표현하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그때 목을 심하게 다쳐서 지금까지도 별로 안 좋아요.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계속 밤을 새워가며 녹음을 했으니까요.”

    본능의 백치미, 원시적 여성

    유현목 감독의 1963년작 ‘김약국의 딸들’은 ‘토지’로 유명한 박경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다. 대부분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문예영화는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비평적으로 혹은 예술적으로 가장 대접받은 장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 쿠데타 이후 영화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을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군부와 타협한 산물이기도 했다. 당대의 문예영화 거장으로는 유현목과 김수용 등을 들 수 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범선 원작의 ‘오발탄’(1961), 황순원 원작의 ‘카인의 후예’(1968) 등과 함께 유현목 감독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의 무대는 일제 개항 시기 경남 통영. 20년간 한약국을 경영해온 아버지에게는 네 딸이 있고, 그 네 딸은 각각 성격이 판이해 통영에서는 ‘김약국집 딸들’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입방아가 자자하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첫째딸(이민자), 신여성이 된 둘째딸(엄앵란), 머슴과 사랑에 빠진 말괄량이 셋째딸(최지희), 기독교 신자인 넷째딸. 한창 잘나갔던 김약국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딸들의 결혼과 사업의 실패로 차츰 수렁에 빠져들어간다는 것이 작품의 큰 줄거리다.

    최지희가 맡은 용란은 엄앵란이 맡은 용빈과 많은 면에서 대조적인 여성이다. 서울에 유학한 용빈은 시대의 억압을 뚫고 자유연애를 쟁취하여 고향에 남지만, 계급에 상관없이 자기집 머슴을 육체적으로 사랑한 용란은 결국 아편쟁이와 정략결혼을 해 광기와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즉 용빈이 영혼의 순결성과 인간 계몽의 낙관성을 보여준 근대적 여성이라면, 용란은 육체 하나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완벽한 본능의 백치미를 보여주는 원시적인 여성을 대변한다.

    유현목 감독 특유의 리얼리즘적 연출력이 돋보인 이 영화는, 통영의 바다와 바람을 배경으로 삼대에 걸친 숙명적인 업보와 전근대의 폭압적인 제도가 어떻게 한 집안 여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는지를 보여주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걸작이자 최지희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연기인생의 절정을 달리던 1966년에 결혼을 하셨어요. 딸도 낳으셨죠?

    “네. 아이는 딸 하나밖에 없어요. 그냥 결혼할 나이가 돼서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중매가 들어오자 하루아침에 결혼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애를 낳고 싶어서 결혼한 게 아니었나 싶어요. 영화배우로 절정에 올랐는데 지금 결혼 안 하면 평생 면사포도 못 써볼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그래서 ‘결혼을 위한 결혼이라도 해보자’고 결단을 내린 거예요. 소식을 들은 P가 전화하더니 ‘너 미쳤니?’ 그러더라고요. ‘결정된 거니까 두 번 얘기할 생각 마라’ 하고 시집을 가버렸죠.”

    -신랑이 별로 마음에 안 드셨던가 봐요.

    “사람은 얌전하고 순수해서 좋았는데 뭐랄까, 무기력하다고 할까…. 제 딴에는 남편과 함께 성공하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그게 다 빗나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결혼 3년 만에 위기를 맞았어요. 그 동안 영화해서 번 돈이며 집이며 다 날아가버리고 빈털터리가 됐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가난을 못 견디는 여자인데, 남편만 바라보고 살기에는 생활고가 심한 거예요. 그래서 각자 다른 길을 찾아가기로 했죠. 전 남편은 일본에 살아요. 지금도 한국에 오면 가끔 만나죠. 좋은 사람인데, 생활고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생각해보면 여배우들이 다 결혼을 잘 못해요. 아마 바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게 이유겠지요. 지금도 그럴 거예요. 남자들은 흔히 자기들이 원하는 시간에 나와서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저도 그 무렵 선을 많이 봤지만 대부분 ‘결혼하면 영화배우 그만둬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런데 반대로 여배우들은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남자,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을 찾아요. 그러다 보면 무능력하고 뚜렷한 직업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실패하는 거고.

    그렇게 이혼을 하고 나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왔죠. 그 무렵 찍은 영화가 ‘남대문 출신 용팔이’ 같은 작품들이었어요. 그때 작품을 50개쯤 했는데 대부분이 액션물 아니면 코미디물이었어요. ‘국제간첩’ ‘여자가 더 좋아’ ‘팔도가시나’ ‘여운전사’ 같은 영화들. 오히려 그 무렵에 주연은 더 많이 했어요.”

    1960년대까지 청춘물의 히로인이었던 최지희는 1970년대 들어와서 ‘거친 여성’의 역할을 주로 맡는다. 그가 조폭의 딸이나 유력인사의 정부(情婦) 같은 주변부 인물로 등장하는 이런 영화들은 대개 1970년대 액션 코미디 영화의 유행을 타고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가운데 설태호 감독의 ‘용팔이 시리즈’는 1970년대 초반 박노식을 주연으로 내세운 일종의 B급 컬트영화였다.

    ‘남대문 출신 용팔이’ ‘운전수 용팔이’ ‘위기일발 용팔이’ 시리즈에서 최지희는 용팔을 함정에 빠뜨리지만 결국 그를 위해 희생하는 연인으로 등장해 박노식과 단짝을 이룬다. 맨주먹 하나로 암흑가를 헤쳐나가는 박노식의 모습은, 비록 연인에게는 무뚝뚝하고 배운 것은 없으나 불의를 보면 분노하고 목숨 걸어서라도 의리를 지켜내는 당대의 액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 당시 비평가들로부터는 홀대를 받았지만 용팔이 시리즈는 임권택 감독이나 이두용 감독의 액션물과 함께 남성 관객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 무렵 영화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제 경우에는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 같은 영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박노식씨를 두고 최지희씨와 문희씨가 연적으로 나온 영화인데, 박노식씨가 문희씨를 구하기 위해 작두로 자기 팔을 싹둑 자르는 장면이 있어요. 어릴 때 본 영화인데도 그 장면만큼은 똑똑히 기억이 나네요.

    “저는 임권택 감독하고 작업했던 시대물이 기억에 남아요.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주로 비원에서 촬영을 했는데, 시대물은 머리채 분장을 해야 하잖아요. 무거운 걸 이고 앉아서 마냥 기다리는 거예요. 달랑 세 커트 남았는데 임 감독님이 안 찍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대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젊은 감독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흥분하면 말을 막 더듬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치치치치치’ 하고 운을 떼는 걸 내가 ‘치고 뭐고 빨리빨리 해요’ 이러면서 덤볐으니 얼마나 미웠겠어요(웃음). 임 감독의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 제가 출연했지요.”

    거꾸로 걸린 간판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진짜 악역, 혹은 어떻게 보면 아주 드센 기질을 가진 여자를 연기하셨지요.

    “오히려 ‘진짜배기 악역’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결국은 다 이해가 되는, 혹은 귀여운 악역이죠. 예를 들어 ‘구월산’ 같은 영화에서 맡은 인민군 장교 역은 처음에는 나쁜 역이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국군을 도와주는 인물이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인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어요.”

    -당시 우리나라 풍조가 좀 덜 벗는 배우들, 예를 들어 문희씨나 윤정희씨, 엄앵란씨 같은 배우들의 이미지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적당히 감춰야 매력 있다고 하던 시절이니까요. 그런데 최지희씨는 그런 것에 별로 구애받지 않으셨죠.

    “그런 부분에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작품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벗을 수 있죠. 심지어 ‘숲속의 여인’ 같은 영화에서는 발가벗고 수영도 해봤는데요 뭐. 개봉 전에 그 수영장 사진 한 커트가 신문에 실렸어요. ‘발가벗은 최지희’, 그런 제목이었죠. 그 일 때문에 심의에 걸려서 정작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어요. 그게 1972년일 거예요.

    여하튼 그 즈음부터 제가 동적인 역할을 많이 하게 됐어요. 매일 비슷한 영화만 찍다 보니 실망도 했고, 사생활에서는 아픔도 겪고 해서 결국 영화계를 떠나게 되죠.”

    -1970년대에는 많은 작품을 하셨던 반면 1980년대 들어서는 거의 출연을 안 하셨어요.

    “대신 사회생활은 계속 했어요. 사실 영화 이외의 일은 그전부터도 많이 한 편이죠. 일본에도 자주 드나들었고요. 1971년에는 무교동에 ‘지희네집’이라는 카페를 열어서 장사도 했어요. 일부러 간판을 거꾸로 달아 붙였죠. 그 무렵은 남편과 이혼하고 10만원짜리 사글셋집에 혼자 살던 시절이에요. 결혼할 때 갖고 있던 집 네 채는 훌훌 날아가버리고.

    땅은 조금 있었는데 자본금이 없잖아요. 내가 그때 얼마나 당돌했는지 당시 유명한 맥주회사 회장님을 무작정 찾아가서 그랬어요. ‘최지희가 회장님 회사 맥주 많이 팔아드릴 테니 대부를 해주십시오.’ 재미있는 게 그분이 돈 200만원을 선뜻 빌려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시작한 게 무교동 가게예요.

    하루는 배우협회 위원장이 찾아왔어요. ‘체통이 있지 이런 장사를 해서 되겠느냐’는 거죠. 배우협회에서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장사 좀 하겠다는 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배우는 배우의 길을 가야 한다’ 운운하시는 그 양반한테 내가 대 놓고 그랬어요. ‘들어오실 때 거꾸로 달린 간판 보셨죠? 그건 최지희가 거꾸로 섰다는 뜻입니다. 독하게 맘먹고 시작한 일이니까 참견 그만하세요.’

    장사 잘됐죠. 서울 시내에서 잘나간다는 사람은 모두 드나들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열 달쯤 하고 나니 집 한 칸 장만할 돈이 모이더군요. 그랬는데 하루는 손님들이 억지로 술을 먹이는 거예요. 내가 원래 술을 못하거든요. 자꾸 권하니까 기분 맞춰주려고 내키지 않은 술을 한잔 먹었죠.

    그날 저녁에 촬영이 있었어요. 엑스트라가 한 50명 와 있는데 내가 얼굴이 빨개서 촬영을 못하는 거예요. 아차 싶더라고요. ‘잘못하다가는 주위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는 인간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가게를 팔아버렸어요.”

    -일본에서도 사업을 크게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일본에 잠깐 다니러 갔다가 우리 시어머니가-정확하게는 전 시어머니죠-도와주셔서 ‘지희타운’이라는 가게를 만들었어요. 서울에서 ‘지희네집’ 운영하는 동안 배운 노하우를 발휘해 일본에 한국타운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죠.

    그게 1973년이었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가게를 ‘서퍼클럽’이라고 불렀어요. 밥도 팔고 술도 팔고 노래도 할 수 있고 음악도 나오는, 한마디로 호스티스만 없는 요즘 단란주점 스타일이에요. 장사가 꽤 잘됐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일본에서 지내고 온 뒤에는 한국에서 사업을 했죠. P씨가 운영하던 모 체인점을 인수해서 운영해 화제가 된 적도 있었고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88올림픽이에요. 저랑 자니윤씨가 함께 ‘프리올림픽쇼’를 열었거든요. 딸 유학문제로 미국에 건너갔다가 우연히 자니윤씨를 만났어요. 그 사람하고는 예전부터 친한 사이예요. 그 사람에게서 ‘프리올림픽쇼’ 얘기를 들어보니 ‘이거다!’ 싶은 거예요. 다른 계획은 모두 접고 매달렸죠. 결국 KBS에서 200만달러에 프로젝트를 받았어요.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르고 나니까 짜릿했죠.

    일본에서도 연예계 관련 일을 열심히 했어요. 한국영화를 NHK에 처음 소개한 것도 저고, 조용필씨가 NHK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추천한 것도 저예요. 대단한 시절이었죠.”

    얼굴이 밉게 나오더라도

    -1970년대 한 주간지와 했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본인의 연기를 ‘스피디 플레이’라고 평하셨더군요.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인가요?

    “성격이 급하다기보다는 촬영에 들어가서 엉뚱한 연기를 잘했어요. 리허설 할 때는 안 하다가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즉흥연기가 튀어나와요. 욕심이 많으니까 남들 흉내내는 게 싫어서 저 나름대로 표현하는 연기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김약국의 딸들’에서 속옷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치마를 걷어올리는 장면은 내가 설정한 거예요. 감독이 시킨 게 아니죠. 그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감독님 이렇게 해도 되죠?’하고 허락 받고는 앵글 한번 맞추고 그냥 가는 식이었어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인물들이 더 살았던 것 같아요. ‘김약국의 딸들’만 해도 동적인 역할이잖아요. 그러면 더 동적으로 가는 거예요.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최지희 본인의 느낌을 살린 경우가 더 많았어요.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상상하다 보니 억양이나 행동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죠. 계산된 연기는 어색하잖아요. 언제나 자연스럽게, 비록 얼굴이 좀 밉게 나오는 한이 있어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그게 참 연기가 아닐까 생각해요.”

    -같이 일한 감독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분을 한 사람 꼽는다면요.

    “아무래도 저를 데뷔시켜준 이강천 감독님이죠. 이형표 감독님도 함께한 기억이 많아요. 연기를 가장 많이 시켜준 분이니까. ‘서울의 지붕밑’ ‘말띠 여대생’ ‘연애 졸업반’ 등등 작품이 많았어요.”

    이강천 감독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54년 ‘아리랑’으로 데뷔해 1971년 ‘타인이 된 당신’에 이르기까지 17년간 28편의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다. 1948년 영화 ‘끊어진 항로’의 미술을 담당하며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이후 극장을 운영하는 친구의 권유로 영화 연출을 시작했다 한다. ‘백치 아다다’ ‘사랑’ 등의 멜로드라마와 ‘아리랑’ ‘피아골’ ‘두고 온 산하’ 등의 전쟁영화, ‘팔검객’ ‘공산성의 혈투’ 같은 시대극을 주로 만들었다.

    이 감독은 이 시기 한국 영화를 이끌어간 배우들을 발굴해 데뷔시켰다. ‘아리랑’의 허장강, ‘피아골’의 김진규, ‘아름다운 악녀’의 최지희, ‘종말 없는 비극’의 전영선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바르도와 카르디날레

    -최지희씨 본인은 스스로 어떤 배우라고 보세요?

    “다양한 배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무슨 역할이든 소화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어요. 심지어 영화 이외의 장르, 연기를 벗어난 영역에서도 자신 있었거든요. 내가 영화를 하면서 뮤지컬도 한 배우 1호예요.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한 ‘포기와 베스’에서 베스 역할을 했었죠. 비록 노래를 할 줄 몰라서 뒤에서 대신 불러주기는 했지만(웃음). 그때가 미국에서 연기공부하고 막 들어온 때였을 거예요. 아마 드라마센터에서 뮤지컬을 공연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걸요.

    일본에서는 증권사업까지 해봤고 서울이나 미국에서 한 사업도 성공적이었고…. 1995년에는 TV 연속극에도 출연했어요. KBS에서 찍은 ‘인간의 땅’이라는 드라마였어요. 한마디로 뭐든 하면 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왔어요. 지금이라도 누가 나오라고만 하면 잘할 자신 있지만…. 글쎄요, 요새는 우리 세대 영화가 없잖아요. 모두 젊은이들 취향뿐이지.”

    인터뷰를 준비하는 동안 읽은 자료 가운데 1962년에 여성지 ‘여원’에 김영수가 쓴 최지희 인물평이 특히 필자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녀는 영화 ‘가방을 든 여자’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를 몹시도 닮았다…대담하고 정열적이고 야심만만하고 야성적인 체취를 발산하는 여배우, 도회적인 감각과 원시림에서 반나체로 뛰어나온 듯한 황홀함을 갖춘 여배우다….” 이 인물평을 본인에게 들려주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역시 여배우는 여배우다.

    “맞아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비슷하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보다는 브리지트 바르도 닮았다는 이야기를 더 자주 들었지만.”

    구름을 베고 누운 여인

    -제가 최지희라는 배우에게서 발견하는 사회적인 의의는, 사회가 그 여자가 갖고 있는 어떤 육체성, 섹슈얼리티를 감당 못하던 그 시절에 최지희씨가 용감하게 개성있는 여배우 역할을 맡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말씀하신 대로 생활고 때문이었든 연기에 대한 불타는 정열 때문이었든 간에, 우리 사회 전체가 착한 여자, 조신한 여자, 혹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여배우들을 만들어내던 시절에 최지희씨는 반항적이고 본성에 충실한 여배우가 되었다는 점이죠.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좋지만은 않았어요. 마이너스가 된 점도 많죠. 옆에서 보기에는 출세도 했지만, 나는 언제나 시대적인 흐름, 시대가 요구하는 것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내 길을 갔어요. 나이 육십이 넘었지만 지금도 피가 끓는 걸 느껴요. 나는 내 그림자하고 싸우는 사람이거든. 그림자가 나를 보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추해져서 되겠느냐, 늘 그런 관념에 시달리는 거죠.

    혼자 있을 때 내 자신이 처참하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건 아마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일 거예요. 단지 나는 신데렐라가 되지 않았을 뿐이죠. 가끔 궁금해져요. 나에게도 분명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왜 그 기회를 잡지 않았을까. 결론은 늘 하나예요. 자신이 없었던 거죠.”

    -자신이 없었다? 굉장히 의외이면서도 솔직한 이야긴데요.

    “진짜예요. 내가 P씨하고 결혼했으면 신데렐라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자신이 없었어요. 예의나 격식에 얽매여 사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예요. 지금 내가 이 나이에 혼자 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죠.

    그렇게 보면 나는 꼭 구름을 잡으려 애쓰며 살아온 것 같아요. 손아귀에 꽉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펴보면 없는 거야. 밖에서 보는 성공, 명성보다 훨씬 붙잡기 어려운 것을 좇아다닌 셈이죠.



    우리집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어요. 일본에 있을 때 대학교수 한 분이 선물로 준 건데 한국에 올 때 큰돈을 들여 굳이 갖고 왔어요. 짙은 회색 구름으로 된 계단 위에 한 여자가 나체로 낮잠을 자죠. 제목도 ‘오후의 낮잠’이에요.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딱 나 같아, 구름 속에서 잠자는 여자. 그게 인생인지도 모르죠.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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