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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⑤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구름 속에서 잠자는 여자, 그게 내 인생인지도 몰라요”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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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였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는 여자였다. 그는 플레어 스커트 자락을 휘날리며 애인에게 성깔 있는 발길질을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여배우를 육체와 사이즈로 재단하기 시작한 1950년대, 감히 섹시하다는 말조차 수줍어 야성녀라느니 대담하다느니 하는 수식어로 장식되던 그 여자 최지희는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도회적 이미지와 관능미를 동시에 갖춘 배우였다.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같은 시대의 글래머 스타 김혜정이 풍만한 에로티시즘으로 스크린을 휘어잡았다면, 최지희는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감수성으로 1960년대 청춘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스타였다. 간혹 엄앵란이나 최은희 같은 여배우들이 발랄한 여대생 혹은 관능미 넘치는 악녀의 역할을 하다가도 금세 청순 가련형의 여인으로 돌아와 시대의 부름을 따랐지만 최지희만은 달랐다. 그는 끝끝내 능동성과 불량함이 혼합되어 내재된 에너지를 억눌린 여성성과 맞바꾸지 않았고, 그 역동성 때문에 결국 액션과 코미디 같은 장르의 영화로 배우의 삶을 마감하고야 만다.

그의 전격적인 은퇴과정은 한 시대가 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감당하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그려낸 완벽한 각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지희가 사라진 197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영화의 전성기 또한 막을 내렸다. 어찌 되었든 호스티스 영화에 나오는 최지희를 상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영화사적으로 볼 때 최지희의 등장은 엄앵란, 최은희, 조미령 등 동양적 외모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배우들의 대를 이어, 197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할 유지인이나 윤정희 같은 서구형의 지적인 냄새가 풀풀 풍기는 미인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최지희는 무엇보다도 ‘모던 걸’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각인시킨 여배우다. 1964년 작 이형표 감독의 ‘연애 졸업반’에서 그는 당시의 여성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직업인 여자 비행사로 나왔는가 하면, 이후 수많은 코미디물에서 여자 택시 운전사, 말띠 여대생 같은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을 연기해왔다.

자신의 연기생활 중 가장 호연한 것으로 평가받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전근대적 결혼제도에 희생당한 셋째딸 용란으로 분한 그는 그해 영화상을 모조리 휩쓴다. 머슴 애인이 죽자 광기에 휩싸여 죽음으로 빠져드는 비극의 주인공 용란은, 그의 글래머러스한 육체와 도발적인 정신에 깃든 시대와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배역이기도 했다.

이후 ‘서양적 가치관을 습득한 자유분방하면서도 정열적인 여인’이라는 최지희의 이미지는, 1970년대 영화계 컴백 이후 액션 장르에 흡수되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드세고 불량스러운 음지의 여성’으로 안착한다. 결국 1973년 피폐해진 영화판의 현실과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의 물결에 밀려 은퇴하게 되지만, 최지희의 여정은 이후로도 통큰 여장부 사업가로 계속되었다.



한국의 브리지트 바르도, 한국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로 불렸던 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그의 등장은 1960년대 한국 영화의 전성기에 무척이나 다양한 여성상이 스크린에서 소화되었으며, 당시 한국 사회가 여성의 사악함을 공개적으로 아름답다고 예찬하는 대담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짧고도 빛나는 증거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후 철저한 군사문화의 압력으로 호스티스, 버스 차장, 공원 같은 도시 주변부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정서적으로 착취하는 영화만이 충무로를 이끌던 시절, 평생 여배우로 남겠다던 이빈화, 남미리, 김혜정, 전계현, 태현실, 최난경 등의 ‘탐스러운 미인’들은 스크린에서 죄다 사라졌다. 그러한 면에서 브리지트 바르도나 그레타 가르보가 그러했듯, 최지희 역시 시대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시대를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오로지 가난 때문에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제가 열다섯 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왔는데 3년 전쯤에 모든 것을 중단하고 현장을 떠났어요. 요즘 하는 일은 앉아서 기획하고 조율하는 일이에요. 녹음실도 하나 갖고 있고요. 예전에 비하면 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보니 역시 현장에서 뛰는 게 좋구나, 일을 좇는 게 훨씬 행복하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현역 시절 최지희씨는 야성적이고 반항적인 여성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첫 영화 제목 또한 이와 딱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악녀’여서 이후 이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는데요.

“그렇죠. ‘아름다운 악녀’라는 영화로 데뷔할 때 열다섯 살이었는데, 솔직히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 생활고 때문이었어요. 영화를 하면 밥은 먹여주니까요. 사실 그때는 영화가 뭔지도 잘 몰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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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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