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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①

‘불꽃의 작가’ 서효원

깊은 절망, 뜨거운 소망이 낳은 자아 부활의 武曲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 junaura@snu.ac.kr

‘불꽃의 작가’ 서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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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더욱 주목할 것은 1990년대 한국 무협소설의 부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죽은 서효원이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며 한국 무협소설은 작품의 질에 있어서나 독자의 호응에 있어서나 급속히 몰락했고, 독자들은 ‘영웅문(원제·사조영웅전)’의 번역 출판을 계기로 홍콩 작가 진융(金庸)에게 몰려갔다. 그 결과 생계에 쫓긴 많은 작가들이 무협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만화 스토리 작가로 변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온 것은 서효원의 대표작으로 1981년에 처음 출판된 ‘대자객교(大刺客橋)’가 1993년 재출판되고 이것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부터였다. 독자들이 ‘대자객교’에 보낸 관심의 상당 정도는 작가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필자가 서효원을 중시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무협소설=현실도피+대리만족’이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등식은 대부분의 경우 무협소설을 비난하는 데 사용되고, 아주 드물게 무협소설을 옹호하는 데 사용된다. 비난도 좋고 옹호도 좋지만 그에 앞서 필자가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한 도식 자체다. 이 단순한 도식을 전제하는 한 비난이건 옹호건 정당성을 가질 수 없으며, 진실은 그 도식 너머 먼 곳에, 혹은 그 도식 밑 깊숙한 곳에 있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 보여주는 작가가 서효원이다.

그의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천하 제일의 미남이고 거의 초능력에 가까울 정도로 유능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좋아하고 그의 부하가 되기를 자청하며, 죽음의 위기에 부딪히면 반드시 기연(奇緣)을 만나 화가 오히려 복이 된다. 이렇게 묘사해놓고 보면 서효원의 작품은 1980년대 한국 무협소설이 차츰 빠져들어간 저열한 기풍의 표본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다.

아닌게아니라 이것이야말로 ‘현실도피+대리만족’의 가장 저열한 모습이다.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로부터 소설 속의 세계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이 터무니없이 운좋은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통해 대리만족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때로 휴식과 위안이 필요한 법이고, 이 대리만족은 비록 저열하다 하더라도 적절한 휴식과 위안을 제공해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 소수 옹호자들의 논리다. 반면 다수의 비난자들은 그것이 일종의 마취제에 불과하며, 이 마취제는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영원히 방기하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양쪽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무협소설=현실도피+대리만족’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전제했을 때에 한해서다. 서효원의 무협소설은 그 단순한 도식에 부합하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의 이면에, 혹은 심층에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

1993년에 출판된 유고집 ‘나는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한다’에 실린 시와 산문, 일기들을 보면 서효원은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 시한부 생명을 치열하게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독재 아래서 김지하 시인의 비극적 서정은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새’에서)라는 명구를 낳았거니와, 서효원의 몸부림이 피를 토하듯 토해낸,

나는 죽어도 새가 되지 못한다새가 되지 못하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이미 죽었거늘 또 죽을 수 있으랴(‘나는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한다’에서)

라는 시련(詩聯)은 김지하 시인의 명구보다도 절망의 정도가 한층 더 깊다. 물론 이 절망의 진술이 단지 절망의 진술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노오란 나비 한 마리 날아 오른다/ 육체를 이탈하는 영혼처럼”(‘비누방울’에서)이라는 구절에 표현된 뜨거운 소망의 역설적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깊은 절망과 뜨거운 소망이 그의 무협소설 쓰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그의 무협소설 쓰기는 그 절망으로부터의 도피이고 그 소망의 대리만족인 것일까.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 이상이다. 그 ‘이상’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본론이다.

자아를 상실한 주인공들

서효원의 대표작 ‘대자객교’의 주인공 이혈릉은 자객이다.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지만, 군계일학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지닌 천하제일의 자객이다. 그가 속한 청부살인 조직의 이름이 ‘대자객교’이고, 이 조직에서 그는 네 번째 서열이어서 ‘사살(四殺)’이라 불린다. 기억을 잃은 채 다 죽어가던 그를 살려주고 그를 제자로 삼아 무공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대자객교의 교주(橋主)다.

이혈릉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임무를 하나하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능력을 키워가는데, 그의 임무 수행은 공교롭게도 그를 기억상실 직전의 사고 현장으로 이끌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월영지존과 대결을 벌이다가 부상을 입고 절벽 아래 유룡탄이라는 급류 속으로 추락한다. 원래 그의 신분은 명나라 황제 대륭제의 아들인 태자 주천업이다. 그는 월영지존의 부하에 의해 중상을 입고 유룡탄 급류 속으로 추락했었는데 이때 기억을 상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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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 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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