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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구

‘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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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성급하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는 ‘정치세계의 우연성’과 ‘역사의 다면성’을 알지 못한 죄로 사약을 받기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지난 4년은 칼날 위를 걷는 듯한 나날이었다. 압록강변 어천역의 찰방(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마침 인근의 희천에 유배와 있던 김굉필 선생에게서 배운 성리학이 아니었다면, 진작 ‘좌절’하거나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 즉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性命)과 사회의 규범법칙(義理)을 공부하고 깨달아(窮理), 실천하는 자세(居敬)를 강조하는 성리학이야말로 혼란한 이 나라를 바로잡는 ‘진리’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주와 인간과 사회와 국가의 원리로서 혼자 있을 때나(修己) 나라를 다스릴 때나(治人) 한결같이 적용할 수 있는 푯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때, 나는 동료들에게 이것을 말했고, 또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나를 보고 속유(俗儒)들이 웃고 손가락질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이미 ‘진리’를 발견했고, ‘푯대’를 보았는데, 망설일 것이 무엇인가. 그대로 실천할 따름이었다. 임금께서 하루는 사정전에 납셔서 우리에게 발표(講)를 시키셨을 때, 나는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는 그 한마디로 순임금의 치법(治法)을 요약해서 말씀드렸다. 나는 그때 보았다. 창호지에 먹물이 스며들 듯 내 생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당신의 눈빛을!

내가 과거로 출신한 1515년 알성시(謁聖試)에서도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전하는 다음과 같이 출제하셨다.

“공자께서 ‘만약 나를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1년이면 다스림을 기대할 수 있고, 3년이면 공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했겠는가?” “내가 다스림을 원한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기강이 세워지지 않았고, 법도도 정해지지 않았다.” “여러 유생들은 지금과 같은 때를 맞아 옛날의 융성했던 정치에 이르려고 하면 어떤 것에 먼저 힘써야 하는지 모두 말하여 보라.”(‘靜庵集’ 謁聖試策)

나는 거침없이 답안을 써 내려갔다. 먼저 공자께서 ‘1년이면 다스림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군주의 마음을 깨우치려 한 말이었다. 즉 나라 다스리는 일이 복잡한 것 같지만, 치국의 원리가 모두 성리학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임금이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 ‘하나’의 원리를 실천하면 “되겠구나(可)” 하는 기대를 임금과 사람들이 갖는 데 1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3년이면 공적을 이룬다’는 말씀은 군주가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 실천하는 요체는 원리를 아는 “대신을 공경하고 그에게 정치를 위임하는” 것이다.

임금은 국가의 중심에 서서 좋은 인재와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직접 나서서 일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나라의 일은 공자의 가르침을 아는 신료에게 맡기면 된다. 신료로 하여금 “조선은 임금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나라요 내 후손의 나라”라는 신념을 갖게 하고, 각자 재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서고, 법도가 자리잡혀” 국운이 융성해지리라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역사의 승리’만을 의식했지, 전하의 불안감을 헤아리지 못했다

우리의 적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연산군시대의 기득권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반정공신’들 역시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무엇보다 위험한 적은 우리 내부에 있었다. 이번 기회에 기득권 세력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새판’을 만들려는 급진파들은 나를 “혼자만 점잖은 체한다”고 몰아붙였다. 그들은 집을 고치는 것이 새집을 짓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시일에 ‘가시적인 결과’를 거두는 것에 급급했다.

관료들과 무신들의 불만은 더욱 컸다. 그들은 과거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천거제, 즉 현량과(賢良科)로 인해 천직(賤職)으로 밀려나거나 실업자가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천거된 인재를 이조에서 외면하여 미관말직에 배치하거나 아예 임용조차 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했다(‘중종실록’ 13/3/11).

가장 강력한 적은 전하의 마음이었다. 사정전 세미나와 알성시 문제를 출제할 때 전하의 마음과 눈빛이 점차 흔들리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전하께서는 단단하고 굳은 것은 버리고 유약하고 부질없는 것을 생각하며, 이리저리 정처 없이 헤매면서 용단을 못 내리십니다”(‘중종실록’ 13/8/1)라고 하여 임금의 마음을 다잡아놓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져 갔다.

사실 전하의 마음은 늘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의 원천은 열등감에 있었다. 쿠데타를 통해 형(연산군)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생각과 형과 달리 군주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애초에 전하는 박원종 등의 ‘반정세력’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서 전하를 왕으로 옹립했고, 따라서 아무런 권한도 주지 않았다.

‘반정’ 후 공신을 책봉할 때 모든 것은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의 ‘반정 3공신’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00명이 넘는 ‘정국공신’을 책봉하는 데 정작 국왕인 당신은 윤탕노 한 사람을 3등 공신으로, 그것도 나중에 추가하여 건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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