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짙푸른 원시림 속 안식처 강원도 인제·양구

내린천에서 浮心하고, 백담사에서 修心하고

  • 글: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사진: 김성남 차장 photo7@donga.com

    입력2004-08-27 19: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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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만에 찾아왔다는 무더위에서 도망치듯 인제와 양구로 내달렸다. 기대한 대로였다. 젊은이들의 힘찬 기운이 생동하는 내린천에서 폭염은 맥 못 추고, 길들여지지 않은 원시림이 호위하고 있는 백담사에선 입장이 불허됐다. 뜨거운 햇살은 그렇게 저 멀리 있었다.
    짙푸른 원시림 속 안식처  강원도 인제·양구

    물살 위를 미끄러지듯 떠내려가는 이 맛을 누가 알랴. 인제 내린천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젊은이들.

    “하낫, 두울, 하낫, 두울…”힘찬 함성이 콰르르 쏟아지는 진줏빛 물보라를 뚫고 울려퍼진다.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가 눈 깜짝할 새 흠뻑 젖고 말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구령에 맞춰 힘차게 패들(paddle)을 내젓는다. 급류를 타고 보트가 출렁거리면 몸도 함께 출렁거리고, 정연하던 구호가 흩어진 자리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웃음소리가 만발한다. 한 번쯤 보트가 뒤집히지 않으면 오히려 섭섭한 일. 보트에서 내려 엉금엉금 바윗돌로 기어오른 젊은이들은 그제야 계곡을 품은 짙푸른 산자락으로 눈길을 돌린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강원도 인제의 내린천. 10년 만에 찾아온 숨막히는 폭염도 이곳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청춘 앞에선 위세 부리기를 단념한 듯하다.

    서울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양평과 홍천을 지나 3시간여 만에 인제에 닿는다. 인제는 몇 년 전부터 모험 레포츠의 본고장으로 거듭났다. 내린천 70km 구간에서 쉼없이 이어지는 래프팅 보트 행렬은 이제 한여름의 상징이라 할 만큼 낯익은 광경이다. 특히 S자형 계곡이 발달해 급류타기의 최적지라 불리는 원대교∼고사리 사이는 온종일 래프팅 업체 사람들과 손님들로 북적인다.

    인제에서는 래프팅 말고도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55m 높이에서 내린천으로 뛰어내리는 번지점프, 원대리와 남전리 사이에 개설된 산악자전거(MTB) 코스, 기룡산에 마련된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등이 여행자의 발길을 잡아끈다. 덕분에 인제를 찾는 관광객은 1996년 31만명에서 지난해 170만명으로 크게 늘었다고 한다.

    래프팅으로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면 산바람을 맞으며 숲길을 산책하는 게 제격이다. 제주도보다 넓은 인제군은 전체 면적의 90% 이상이 임야라 산길 아닌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꼭 추천할 만한 산책 코스는 백담사. 용대리 쪽 내설악에 자리한 백담사는 매표소에서 7km 떨어진 원시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 3km 정도는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간다 해도 그 다음부터는 걸어야 한다. 구불구불한 산길 양옆으로 울창한 숲이 있어 호젓함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다. 느린 걸음으로 1시간 정도 오르면 백담계곡 너머로 백담사가 나타난다.



    짙푸른 원시림 속 안식처  강원도 인제·양구

    인제의 진동계곡. 맑은 계곡물이 20㎞에 달하는 거리를 굽이굽이 흘러간다.

    수심교(修心橋). 백담사 입구에 놓인 다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다리’다. 만해 한용운(1877∼1944)이 머물던 무렵에는 장맛비에 종종 떠내려가곤 하던 허름한 나무다리였으나,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곳에 기거한 이후 세속에 널리 알려지면서 대리석 다리로 바뀌었다. 하지만 ‘마음 다스리기’엔 단단한 대리석 다리보다야 조심스레 한 발짝씩 내디뎌야 하는, 삐걱거리는 나무다리가 한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인제를 대표하는 먹을거리는 황태구이와 산채정식. 겨울에 잡아들인 생태를 내설악 산자락의 매서운 겨울추위로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하면 이듬해 4월경 속살이 포실포실한 황태가 된다. 이 황태에 매콤새콤한 찹쌀고추장 양념을 듬뿍 먹여 구워낸다. 용대리 황태마을에 자리한 진부령 식당(033-462-1877)은 이 일대 30여개 황태 전문식당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김승호씨가 식당 앞 덕장에서 생태를 널어 말려 황태를 만들고 부인 이민희씨가 요리를 맡아 한 지 벌써 15년째다.

    내설악에서 쑥쑥 자란 산나물을 양념에 버무려내는 산채정식. 그 중에서도 좀더 특별하다는 산채정식을 맛보려 귀둔리 필례약수터 앞에 자리잡은 필례식당(033-463-4665)에 들렀다. 필례약수터에서 솟는 물에는 구리 성분이 있어 톡 쏘는 맛이 느껴지는데, 이 약수로 밥을 지으면 노란 빛깔이 난다. 20년 가까이 이곳에서 식당을 해온 김월영씨는 “필례약수로 3개월만 밥을 지어먹으면 위장병이 싹 낫는다”고 장담한다.

    모험 레포츠로 성황을 이루는 인제가 생기발랄한 ‘젊은 강원도’라면, 이웃한 양구군은 아직도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있는 ‘역사 속의 강원도’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소재로 활용된 전투가 바로 1951년 8월 양구군 두밀령에서 벌어진 이른바 ‘피의 능선’ 전투다.

    짙푸른 원시림 속 안식처  강원도 인제·양구

    1. 깊은 산중에 오롯이 들어선 백담사. 2. 서민 화가 박수근을 기리는 박수근미술관.



    짙푸른 원시림 속 안식처  강원도 인제·양구

    뜨거운 햇살을 등지고 앉아 감자를 다듬는 할머니의 손등은 투박하면서도 부드럽다.

    한국전쟁을 기리기 위해 양구군 해안면에 세운 전쟁기념관을 찾아나섰다. 전쟁기념관에 닿으려면 굽이굽이 가파르게 이어지는 산길을 타고 30분 이상 달려야 한다. 이 길은 가는 길 자체가 일종의 유람이다. 위엄 있게 솟아오른 짙푸른 산세를 담아내는 것도 눈의 사치였지만, 정상에서 하산하는 산세에 슬며시 제 모습을 드러낸 펀치볼(해안분지)의 전경에 절로 감탄사가 새나왔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로도 유명한 이곳 분지에는 해안면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타원형 운석이 떨어져 생겼다는 설과 분지 바닥이 주변보다 약해 침식됐다는 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양구에서는 박수근미술관과 생태식물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박수근미술관은 1914년 청림리에서 출생한 대표적 서민화가 박수근의 생가 터에 지어졌다. 돌멩이를 엮어 쌓은, 낮으면서도 단단한 이미지의 미술관 외관은 단순한 붓놀림과 색채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박수근의 그림 못지않은 볼거리이다. 다만 박수근의 진품이 몇 점밖에 없어 아쉽다.

    지난 6월 개장한 원당리 생태식물원은 양구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 같다. 짙푸른 산세 한가운데 들어앉은 식물원은 인공미보다는 자연미가 강조되고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대암산 용늪에 서식하는 금강초롱, 백두산 인근에서 자라는 백두산구절초 등 우리 땅에 뿌리내린 진귀한 식물들이 눈길을 끈다. 휴전선을 코앞에 둔 분단의 현장이지만 남북의 식물만큼은 한 공간에 어우러져 함께 숨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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