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8월18일 러시아와 중국의 사상 첫 합동군사훈련인 ‘평화의 사명 2005’ 개시에 앞서 황광리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왼쪽)과 유리 발루예프스키 러시아 육군참모총장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현충탑에 경례하고 있다.
러시아군과 중국군이 8월18~25일 극동 러시아 지역과 중국 산둥(山東)반도에서 사상 최초의 합동군사훈련인 ‘평화의 사명(Peace Mission) 2005’를 수행했다. 훈련은 끝났지만 그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군과 중국군 수뇌부는 내년에는 러시아 영내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러-중 군사훈련이 정례화할 조짐인 것이다. 이와 함께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9월), 러시아와 인도(10월)의 합동군사훈련도 이어진다.
특히 관심을 모은 것은 내년 중 러시아·중국·인도의 합동군사훈련 실시 여부다. 러시아 관영 이타르타스 통신은 ‘평화의 사명 2005’가 끝나자마자 국방부 고위소식통을 인용해 “러-중-인 합동군사훈련이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러-인, 중-인 합동군사훈련은 한두 차례씩 실시된 바 있다. 이젠 3국이 일시에 참여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세 나라는 냉전체제 해체 후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맞서기 위한 방안으로 ‘러-중-인 삼각동맹’을 꾸준히 추구해왔다. 그러나 지금껏은 아이디어에 그쳤고 별다른 실체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이 삼각동맹의 현실화 가능성이 두드러지고 있다. 내년 러-중-인의 합동군사훈련이 이뤄진다면 이는 큰 의미를 가진다. 세 나라의 영토, 인구, 군사력은 실로 대단하다. 세 나라가 군사동맹으로 가는 신호탄을 쏘는 것은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일이다.
우선 러-중-인 삼각동맹 구상이 나온 배경을 알아보자. 이 구상의 설계자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러시아 총리로 알려져 있다. 한때 그는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꼽혔으나 고령과 건강 때문에 대권(大權) 후보 대열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 국내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거물 정치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정권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동방주의자’ 프리마코프의 아이디어
푸틴 대통령이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이기 때문에 현 집권 세력에는 KGB 인맥이 대거 포진해 있다. 프리마코프 전 총리는 푸틴 대통령의 KGB 대선배로 ‘KGB 인맥의 대부’로 꼽힌다. 프리마코프 전 총리는 옛 소련 시절 KGB 제1국 국장과 제1부의장을 지냈고 옐친 정권에선 KGB의 후신인 대외정보부(SVR) 부장을 맡았다. 이런 인연으로 프리마코프 전 총리는 정계를 떠난 지금도 푸틴 대통령의 배려로 러시아연방상공회의소 의장을 맡고 있다.
프리마코프 전 총리는 한국에도 익숙한 인사다. 한소(韓蘇) 수교 이전인 1989년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를 맞은 사람이 바로 프리마코프인데 그때 그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었다. 그는 1년 후 소련 연방회의 의장(국회의장) 자격으로 김영삼-고르바초프 회담에 배석했다. 한소 수교협상 과정에서도 그가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1998년 한러 외교분쟁 당시 프리마코프는 외무장관이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 보안당국이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의 조성우 참사관을 간첩 혐의로 추방하자 한국 정부도 서울 주재 러시아 외교관을 맞추방하면서 일어났다. 당시 프리마코프 장관은 한국에 대한 강경대응을 주도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러시아 외교당국은 한국의 화해 제스처를 뿌리치고 추가로 모스크바 주재 한국 외교관 3명을 추방했다. 한국 정보당국은 대북(對北) 정보 수집 창구인 러시아의 거점이 붕괴되는 타격을 입었고 박정수 외교부 장관이 경질됐다. 사태 수습을 위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한러 외무장관 회담에서 박 장관이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을 외면한 프리마코프 장관의 ‘터프한’ 모습은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