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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④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친일파 귀족의 백만금 유산이 5년 만에 먼지로 변한 까닭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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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윤택영 후작의 파산사건을 다음하여 세인의 화제에 오르내리는 또 하나의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인용 남작 가의 부부전(夫婦戰)이다. 그 내용에 이르러서는 이미 신문잡지에 떠들 대로 떠들어놓았으니 다시 늘어놓을 필요도 없거니와 백만의 재산을 가지고도 사람이 못생겨서 남의 바람에 녹아 나는 이인용 남작 가의 일은 오늘날 귀족 생활을 여실하게 반영하는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선귀족 어디로 가나’, ‘제일선’ 1932년 12월호)

조선귀족의 경제적 파탄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이인용 남작 집안의 부부싸움 이야기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부싸움을 얼마나 크게 했기에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표현했을까. 이인용 남작가(家)의 부부싸움은 소위 ‘귀족계급’의 무능과 부패, 도덕적 타락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지금부터 ‘신문잡지에 떠들 대로 떠들어놓아서 세상사람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는 세기의 부부싸움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이인용 남작 집안의 ‘夫婦戰’

이인용 남작의 부인 조중인은 1932년 5월9일 동대문경찰서를 찾아가 고소장을 제출한다. 이로써 이재극 남작의 100만원 유산을 둘러싼 5년간의 암투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고 이재극 남작의 상속인인 장남 이인용 가(家)에 가정쟁송사건이 일어났다. 이인용의 아내 조씨는 그 남편 외 수인(數人)을 걸어 작 9일 동대문경찰에 폭력 취체령 위반과 협박·공갈의 죄명으로 고소를 제기하였는데, 고소장의 내용은 조씨가 간통하였다고 그 남편 이인용과 시가 사람들이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라고 구타·협박하고 또 피고소인들은 이재극 가 재산관리위원장인 박영효씨가 관청의 교섭을 맡아보니 이혼장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경찰에 잡아넣겠다고 공갈하였다는 것이다. 이인용과 그 아내에 대한 분쟁은 이전부터 일어난 것으로 상당한 내용이 숨어 있는 듯하다. (‘동아일보’ 1932년 5월10일자)

이재극 남작은 왕실의 종친으로 구한말 한성판윤, 법부대신, 학부대신, 내부대신, 궁내부대신 등 요직을 두루 지낸 대표적인 친일 정객이다. 일본 공사관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잔치에 가서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불렀다가 “신하는 제 나라 국왕에게만 만세를 부르는 법도도 모르느냐?”는 고종의 꾸지람을 듣자 “반자이라고 했지 만세라 하지 않았나이다”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일화는 지금껏 인구에 회자된다. 그는 가렴주구로 긁어모은 재산을 죽을 때까지 지켜낸,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귀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렇게 살뜰히 지켜낸 재산도 어리석은 아들에게 상속된 지 5년 만에 바닷가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진다.

부부싸움의 주인공 이인용과 조중인은 이재극의 장남과 며느리다. 귀족가 부인이 남편과 시가 사람들을 걸어 고소를 제기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고소장의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남편 있는 여인이 간통을 하고도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경찰에 고발해 콩밥을 먹이든지 조용히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하든지 하면 그만이다. 그처럼 손쉬운 일을 제쳐두고 알 만한 집안에서 뭐가 아쉬워 애꿎은 여인을 구타·협박하고 공갈까지 하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을까. 중추원 부의장으로 공사다망했을 박영효 후작은 왜 상속자가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집안의 재산관리위원장으로 들어앉아 남의 가정 이혼문제에 개입한 것일까. 기사의 마지막 줄에 적시된 대로 ‘상당한 내용’이 숨어 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조중인은 남편과 시가 사람들을 경찰에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열흘 후 전대미문의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한다. 말하자면 남편과 한이불 덮고 살게 해달라고 법에다 호소한 것이다.

고 이재극 남작의 상속자 이인용 남작의 부인 조중인은 원고가 되어 그의 남편을 상대로 19일 경성지방법원 민사부에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의 내용을 보면, 원고는 구한국시대의 명문대가인 황주목사 조윤희의 둘째딸로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앞서 말한 이남작과 결혼을 하여 장남 이해윤 장녀 이진숙 등의 1남1녀를 낳았으나 남편은 지난 1927년 남작을 습작한 후 주위에서 남작을 이용하려는 모든 악배들의 꼬임을 받아 화류계에 투족하여 원고를 학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2월16일 밤에는 그들 악배 5, 6명이 원고의 침실에 달려들어 남작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원고로 하여금 남작의 집에서 나가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원고는 이에 불응하고 끝끝내 저항을 하였으나 악배들은 그 다음날 밤에 또다시 몰려와서 원고의 퇴거를 강박하였으나 원고는 죽기를 각오하고 이에 저항하였다. 그 악배들은 필경 원고의 몸에 손을 대어 강제로 몰아내므로 약한 몸이 어찌할 수 없어 친가로 갔다가 그 익일 다시 들어온즉 피고의 집 문간에는 다수한 굳센 남자들이 지키고 서서 원고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원고는 할 수 없이 피고의 개심하기만 기다렸으나 도무지 회개치 않으므로 부득이 법률의 보호를 받고자 이 소송을 제기한다고 하였다. (‘동아일보’ 1932년 5월20일자)

경찰 고소장에는 남편과 시가 사람들, 박영효 후작, 재산관리위원회가 등장하더니, 법원 소장에는 ‘악배들’까지 나타난다. 이 가련한 여인은 5년 동안 도대체 몇 사람을 상대로 싸웠단 말인가.

그러나 조중인의 주장에도 미심쩍은 부분은 있다. 우선 남편이 화류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5년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그해 2월 들어서야 갑자기 아내더러 집에서 나가라고 한 이유가 석연치 않다. 5년 동안 살던 대로 살면 되는데, 이인용은 왜 안 나가겠다는 아내를 억지로 내치려 했을까. 아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폭력까지 행사하며 내쫓으려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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