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헤어지는 법’
‘마쿠라노소시’는 침초자(枕草子), 즉 ‘베갯머리 서책’이란 뜻이다. 11세기 초기에 일본 궁중에서 상궁을 지낸 세이쇼나곤이 지은 책이다. 일본 고전수필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마쿠라노소시’는 ‘겐지 이야기’와 더불어 헤이안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세이쇼나곤은 지방 수령의 딸로 태어나 17세 때 혼인해서 아이를 한 명 낳은 뒤 10년쯤 뒤에 이혼을 한다. 그 무렵 천황의 비(妃)인 데이시의 상궁으로 궁에 들어가 993년부터 1000년까지 7년간 천황비를 가까이에서 보필한다. 그 기간에 데이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궁중에서 보고 겪은 것을 글로 옮겼다.
글의 소재는 주로 궁궐에서 치러진 궁중 행사나 귀족사회의 이모저모, 풍류적인 것들, 그리고 자연이다. 문장에는 시적 정취가 물씬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탐미적인 데가 있지만, 한편으로 매우 날카롭게 타인의 버릇과 취향의 품격을 논하고, 풍속에 대한 비판에도 거침이 없다. ‘새벽에 헤어지는 법’은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남의 눈을 피해 밤에만 만나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불륜인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돌아가는 남자가 “너무 복장을 단정히 하고 에보시 끈을 꽉 묶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적는다. 남자는 정말 헤어지기 싫다는 듯 느릿느릿 일어나고 여자의 재촉을 받은 뒤에야 깊은 한숨을 내쉬고 못내 아쉬운 듯 마지못한 듯 나와야 한다. 여운을 남기는 게 예(禮)고 정(情)이다. 그런데 대개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 남자들은 서둘러 일어나 부산스럽게 옷매무새를 챙기고 도망치듯 나온다. 밤을 보낸 여자네 집에서 새벽에 나올 때 여자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지 못하고 허둥대는 남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사리분별의 투명함
‘썰렁 그 자체’라는 글에서 흥 깨는 여러 경우를 두루 언급하는 가운데 “약속한 남자를 기다릴 때, 밤이 이슥해지고 가만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시종에게 이름을 묻게 했는데 전혀 뜻하지 않은 남자가 찾아온 것이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실망”스럽다고 말한다. ‘설렘’에서는 “약속한 남자를 기다리는 밤은 빗소리나 바람 소리에도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쓰고, ‘밉살스러움’에서는 “다른 사람 몰래 오는 사람을 알아보고 눈치 없이 짖는 개도 얄밉다.… 남의 눈을 피한답시고 허둥지둥 들어오다가 물건에 부딪혀서 소리를 내는 사람도 얄밉다”고 쓴다.
사랑에 대해 솔직하며 거침없고, 게다가 주변을 두루 감싸는 너그러움과 순간마다 발휘되는 재치와 익살스러움도 돋보인다. 이를테면 ‘남을 험담하는 즐거움’에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험담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정말 몰상식한 사람이다. 어떻게 남의 험담을 안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제 일은 제쳐두고 남의 결점을 늘어놓으며 마구 비난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라고 쓴다. 글을 읽으며 먼저 글쓴이의 솔직한 인품에 매혹되어 자꾸 책 속으로 빨려든다.
가을에는 해질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세 마리나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 지어 날아가는 광경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광경은 한층 더 정취 있다. 해가 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이렇듯 글은 더할 수 없이 투명한데, 그 투명함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적 투명함이며 사리분별의 투명함이다. 아울러 그 투명함은 섬세한 관찰과 감각적인 표현들, 격조 높은 품격에 두루 통용된다.
“피부가 검고 못생겼으며 가발 쓴 여자와 수염투성이에 말라빠진 남자가 낮에 동침하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다. 도대체 무슨 볼 것이 있다고 대낮에 동침을 할까.”
‘꼴불견’이란 글의 한 구절이다. 본래의 글이 깊은 맛이 있는데다 번역도 뛰어나고 책의 편집이나 장정도 훌륭한 책이라 펼칠 때마다 기분이 좋다. 옆에 두고 여러 번 읽고 난 뒤 그 향기가 오래 가서 몇 권을 더 사서 아는 이들에게 선사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