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2007 서울대 정시논술 정밀 분석

문제 형식의 대전환, 영역간 화학반응으로 탄생한 통합논술

  • 신승현 C&U 콘텐츠 대표, 전 KBS PD

    입력2007-04-11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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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교육 시장에 ‘논술 광풍’이 불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월16일 서울대 정시논술이 치러진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해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 출제자인 서울대가 해설을 내놓지 않으니 누구도 섣불리 나서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생각을 않는다. 한 논술강사는 “출제자가 친절하게 정리한 해설이 없으면 논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논술강사가 많다”고 귀띔한다. 물론 내로라하는 논술학원과 관련업체들은 해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대개 인상만 나열했을 뿐 핵심을 짚지 못했다. 아예 핵심을 비켜간 경우도 더러 있다. 이번에 서울대 입시에 낙방한 것이 논술 탓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대체 무엇을 근거로 문제점을 찾고 개선책을 모색해야 할까.
    # 2007년 서울대 정시논술 문제

    논제] 지식정보화 시대에 우리 사회 각 영역은 어떤 속도로 변화해야 하는가?
    【제시문 가】는 우리 사회 각 영역, 특히 기업, 가족, 정부의 변화를 진단하고 있다. 【제시문 나】는 어느 학자가 미국 사회 내 해당 영역의 변화 속도를 수치화하고 이를 분석한 것으로서, 가장 빨리 변화하는 영역의 속도를 시속 100마일로 설정하고 있다.

    ※ 주어진 논제에 대한 글을 쓸 때 다음의 조건을 만족시킬 것.

    1. 【제시문 가】의 내용을 【제시문 나】의 내용에 비추어 논하라. 그 과정에 미국 사회와 우리 사회의 변화 속도를 비교하라.

    2. 예화 1, 2, 3을 사회의 변화 속도와 연관지어 그 의미를 파악하라.



    3. 세 개의 예화 가운데 하나를 택하고 그 입장에 서서 기업, 가족, 정부의 변화 속도를 예측하고 그 이유를 밝히라.


    【제시문 가】

    오늘날 세계는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르고 변화 폭도 넓기 때문에, 변화의 흐름에 한번 뒤떨어지면 이를 만회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다각적인 검토를 통하여 변화의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 1997년을 전후로 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겪었던 외환위기도 무한 경쟁의 흐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또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하여 환경 파괴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듯이, 미래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등장할 수 있다. 따라서 치밀한 준비를 통하여 이와 같은 문제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1. 기업

    우리나라가 1960~70년대에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원의 배분은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정치 권력과 기업이 유착되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이 곧 기업 경영의 불투명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개방화 시대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업의 경영과 회계 전반에 걸쳐 국제적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각 나라의 지역적 특수성이 곧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문화 예술 분야에서와는 달리 기업 경영에서는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제도나 관행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가족

    오늘날 급속한 사회 변화로 인해 가족생활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가족 규모가 축소되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가족 구성원 간에도 민주적이고 평등한 인간 관계가 보편화되었다. 따라서 가족 구성원들의 개성과 창의성이 중시되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 긍정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혼과 재혼이 늘어나고 많은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하면서 자녀 양육과 교육에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핵가족화, 이혼 및 취업 여성의 증가 등으로 노인 부양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아울러 실업과 빈곤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 자녀 교육으로 인한 ‘기러기 아빠’의 등장과 같은 문제가 생겨나기도 한다.

    3. 정부

    우리 정부는 과거 경제 성장 과정에서 각종 규제를 만들어 국민 생활과 기업 활동에 크게 개입하여 왔으나, 이제는 민간의 창의와 자발적 참여를 통한 경제 성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최근 대폭적인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비대한 행정 조직 및 관료 조직을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공직 사회의 부조리 등을 청산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IT 기술을 활용하여 행정 활동의 모든 과정을 혁신함으로써, 정부의 업무 처리를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개선하고, 국민에게 질 높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자 정부(e-government)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제시문 나】

    지식정보화 시대에서는 지식과 정보가 사회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지식과 정보를 생산, 소유, 활용하는 역량에 따라 개인과 집단의 부와 명예가 크게 달라진다. 지식정보화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세계 각국은 선진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각기 다른 속도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선진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선진 사회가 필요하다. 모든 경제는 그것이 속한 사회의 산물이고 사회의 주요 제도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세계 어디서나 봉건 시대의 제도들은 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다. 마찬가지로 산업 시대의 관료주의는 지식 기반 시스템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 미국의 현실 역시 다르지 않다. 오늘날 미국의 주요 제도의 변화 속도를 자동차 속도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1. 기업: 시속 100마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기술 혁신, 즉각적이고 더 큰 만족을 원하는 고객의 요구, 게다가 시장에서의 경쟁으로 인해, 기업들의 변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리고 공급업체와 유통업체에도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변화할 것을 강요한다. 금융 부문 역시 기술의 발전, 새로운 규율, 다각화하는 시장, 재무 상태의 변화에 반응하여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한다. 그러나 기업의 구조 조정 또는 인수 합병으로 인해 배고픈 실업자, 우울한 투자자가 생겨나기도 한다.

    2. 가족: 시속 60마일

    오늘날 미국에서 직장인 아버지, 전업 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18세 미만의 두 자녀로 정의되는 핵가족은 25% 미만이다. 편모나 편부 가정, 동거하는 커플, 이전의 혼인 관계에서 생긴 아이들을 양육하는 가정, 최근에 합법화된 동성 결혼 등 여러 유형의 가족들이 생겨나고 있다. 사회 제도 중에서 가장 늦게 변하는 가족 제도가 수십년 사이에 급격하게 달라졌다. 한편 기업의 일부 기능이 기업 외부로 이전됨에 따라 가정도 기업의 기능을 받아들였고, 파트타임이나 풀타임으로 재택 근무하는 사람이 이미 수천만명을 넘어섰다. 디지털 혁명이 쇼핑, 투자, 주식 거래 등을 집안에서 해결하게 만들었다.

    3. 정부: 시속 25마일

    지난 수십년 간 각종 비판을 받으면서도 변화를 지연시킨 관료제 정부 조직이 시민의 일상 업무를 간섭하고 있다. 정부 조직은 천천히 변화할 뿐만 아니라 빠르게 바뀌는 시장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기업의 변화를 늦춘다. 정부의 의사 결정이 지지부진하여 도로 건설 계획 하나를 승인받는 데 7년 이상이 걸린다. 그리고 정부는 부패를 방지하고 공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의회의 승인을 받아 예산을 집행한다. 그러다보니, 예컨대 20년 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5년 단위로 집행되는 15개년 방위 계획 프로그램을 운용하려고 할 때, 예산은 1년 단위로 확보되고 이를 관리하는 인력은 3년 계약직에 불과한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예화 모음】

    [예화 1]

    식물들을 관찰해보면 제 나름의 시간과 속도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채송화는 낮에 잠깐 피었다 시들지만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라일락만큼 향기는 없지만 서로 다른 계절에 꽃을 피워 우리를 즐겁게 한다. 또한 복숭아나무와 사과나무는 동시에 열매를 맺지 않는다. 이처럼 식물들은 서로 다른 시간에 다른 속도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꽃을 피우는 시기도 열매를 맺는 계절도 다르지만 이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자연을 이룬다.

    [예화 2]

    돌고래들은 떼를 지어 움직일 때 마치 한 마리가 행동하듯이 같은 속도로, 같은 몸짓으로 헤엄친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이 추측해볼 수 있다. 우선 여러 마리의 돌고래가 한 몸인 것처럼 움직임으로써 아주 거대한 동물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포식자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는 데 유리하다. 또한 돌고래가 무리지어 헤엄치게 되면 각각의 돌고래가 받는 물의 저항이 줄어들게 되어 힘들이지 않고 멀리 이동할 수 있고, 돌고래들 사이의 의사 소통도 용이해진다.

    [예화 3]

    아프리카에 사는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복’은 처음에는 풀을 뜯으며 평화롭게 무리를 지어 움직이지만 앞서가는 양들이 풀을 뜯어먹어버리면 뒤따르는 양들이 먹을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풀을 차지하기 위하여 앞 다툼을 벌인다. 그래서 양들이 모두 조금씩 빨리 달리기 시작한다. 뒤따르는 양들이 속력을 내어 달려오므로 앞서가는 양들은 더 빨리 달리게 되고 결국은 양떼 전체가 앞을 다투어 전속력으로 달리게 된다.


    2007 서울대 정시논술 정밀 분석
    흔히 “논술엔 정답이 없다”고 한다. 맞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번 서울대 논술에 대한 해설과 풀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산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많아도 방향은 한 가지다. 이번 서울대 문제는 오르기 쉬운 관악산의 등산로를 닮았지만 그 속에 히말라야 고봉이 숨어 있는 형국이다. 학생에겐 꽤 어려운 문제였다. 이는 논술 사교육 집단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논술 사교육 집단이 이번 서울대 논술 문제에 침묵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울대가 지금까지의 논술 문제와 전혀 다른 스타일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창의적이어서 구글과 네이버 지식인을 뒤져봐도 모범답안을 찾을 수 없다.

    # 문제의 성격 파악

    이번 서울대 논술 문제는 기상대의 슈퍼컴퓨터를 닮았다. 안개 속 같은 미래의 변화 속도를 예측하고, 그 이유를 밝히고, 불확실성을 극복할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기상캐스터의 날씨 예보처럼 구체적인 수치를 넣어가며 글을 전개하라고 한다. 숫자는 수학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객관성의 기호이며, 이러한 조건은 채점의 투명성과 공정성에도 기여한다.

    2005학년도 논술 시험 부활을 앞두고 서울대는 논술 채점 항목 및 기준을 공개한 바 있다. 창의력(40점), 논증력(30점), 이해분석력(20점), 표현력(10점) 등으로 창의력 배점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기출문제들은 창의력을 어떻게 비중 있게 평가할 것인지 보여주지 못했다. 질문이 좋아야 대답이 좋은 법. 문제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창의적이지 못해 독창적인 답변을 끌어내기 힘들었다.

    창의적인 배를 만들어 띄우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정시논술은 서울대 논술 역사상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 기존 문제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문제 양식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핵심은 문제에 대한 역발상이다. 뉴튼의 운동 제3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비유하자면 기존 문제는 작용을 통해 출제된 것이고, 이번에 출제된 방식은 반작용이다. 조건 3)은 먼저 개념을 제시하고 그에 맞춰 자기만의 사고를 전개하라고 주문했다. 본격적인 사고력 게임의 신호탄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비유하면 매트릭스 주민이 아니라 매트릭스 설계자가 되라는 것이다. 창조를 하느냐 아니면 창조를 당하느냐의 갈림길을 만든 문제의 독창성이 이번 서울대 논술의 강점이다. “제시문·예화의 개수와 분량이 작년보다 줄어든 데다 내용도 평이해져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막상 답안 작성에 요구되는 조건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체감 난이도는 낮았지만 독창적 생각을 드러내는 데 부담이 컸다” “암기식 논술 공부 대신 나만의 글쓰기가 중요해졌다”고 언론은 평가했는데, 이번 서울대 논술은 평이한 내용과 까다로운 답안 작성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에 창의적인 배를 만들어 띄운 셈이다.

    2006학년도 정시논술 [논제] 사례 ‘A’, ‘B’, ‘C’는 현실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경쟁의 양상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이 세 가지 경쟁의 성격을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쟁의 공정성과 경쟁 결과의 정당성에 대해서 논술하시오.

    지난해 서울대 정시논술은 2007학년도 서울대 논술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두 문제는 형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2006학년도 ‘경쟁의 공정성과 결과의 정당성’, 2007학년도 ‘지식정보화 시대에서 사회의 속도변화’는 논제의 성격상 자웅동체(雌雄同體)다. 속도경쟁 혹은 경쟁속도는 인류의 영원한 패러다임이다. 2006학년도 시험에 제시된 사례가 (신)자유주의, 수정자본주의, 사회주의였다면 2007학년도 예화는 자생적 질서, 조직적 질서, 경쟁적 질서다. 자유주의는 경쟁적 질서, 사회주의는 조직적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두 문제는 결국 생존전략을 화두로 삼고 있다. 하지만 묻는 형식이 전혀 다르다. 두 문제를 거칠게 비교하면 ‘표1’과 같다.

    서울대 논술은 게임이다. 제시문과 조건에 따라 새로운 개념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임이다.

    [표1] 2006학년도 2007학년도
    2006학년도 2007학년도
    제시문 7개, 사례 3개

    이분법적-선택과 배제로 논점 구성

    창의력〈 논증력

    창의력을 변별할 수 있는 요소의 부족

    춘추전국시대 쟁패, 진시황 필요

    합종연횡으로 공격, 수비, 반격의 일관성

    과감한 모험 요구, 특히 사례 A
    제시문 2개, 예화 3개, 그리고 조건 3개

    삼각관계-새로운 관계망의 유기적 구성

    창의력〈 논증력

    창의적인 내용구성 후 논증력 필요

    정립 상태의 삼국시대, 그 역동적 긴장

    한 나라 봉기, 다른 두 나라의 긴장

    사례마다 자기만의 개념적 틀과 비전 요구


    의미심장한 문제형식의 전환

    2007 서울대 정시논술 정밀 분석

    2007학년도 서울대 정시 논술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들.

    논술 문제의 양식이 전환됐다. 변화에서 변형으로(from change to transformation), 즉 내용에서 형식으로의 창조적 이동이다. 논술 풀이는 주인공이 장애물을 헤쳐 나가는 것과 같다. 모든 이야기의 기본 틀은 결국 갈등의 설정과 해소다. 갈등의 핵심으로 접근하는 길에서 주인공은 위기와 절정을 겪는다. 주인공의 공격, 역습, 반격은 논술에서 주장과 근거, 반론, 재반론의 논증과정과 닮았다. 이번 문제는 다양한 조건이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 어떻게 독창적인 비전을 창출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마치 학생들이 주어진 속도를 가지고 가족, 기업, 정부를 지휘하는 속도제국을 만드는 게임과 같다.

    본격적인 게임에 앞서 지식정보화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개념은 제시문 (나)에 나와 있다. 시속 100마일이라는 기준은 기업이 주도하는 지식정보화 지수이고, 가족의 영역이 서서히 기업화하는 미국 가족을 통해 지식정보화 지수의 일상성을 파악할 수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정보와 지식이 어우러져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시대를 말하며 지식기반시대로도 불린다.

    지식정보화 시대에 대한 다각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이 말은 세상의 흐름이 지식정보화로 가고 있음을 뜻한다. 이전 시대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다만 농업시대, 산업시대를 거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인 지식정보화 시대가 왔지만, 그가 지적하는 것처럼 단절이 아니라 물결로 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농업사회는 지식산업시대에 새로운 농업으로 변화했고 산업사회도 마찬가지로 질적으로 축적된 변화를 거듭했다. 중요한 것은 시대 흐름의 방향이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은 여전히 원시부터 첨단까지 얽히고설킨 복잡한 시스템 그 자체다.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변하는 지식정보화 시대에 사회 각 영역인 가족, 기업, 정부는 어떤 속도여야 하는가? 논제는 농업과 산업사회의 아날로그 시대를 거친 정보화 시대에 사회 각 부문의 유기적 변화에 대해 묻고 있다. 디지털 틀 안에서 사회 각 영역은 모두 디지털 혁명을 수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향이라도 있는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온 상황에서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은 생사를 건 속도전쟁을 하는데, 정부와 가족도 디지털 속도에 순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저항하며 역행할 수도 있는가? 가족, 기업, 정부의 삼각관계를 일정한 속도의 조건에서 새롭게 관계 짓는 게 논제의 핵심이다. 특히 구체적 실상을 객관적 수치로 나타낼 것을 요구했다. 숫자로 질문한 것은 의미심장한 문제 형식의 전환이다.

    제시문은 ‘기준’을 제시한다. 더불어 그 속엔 숫자와 관련된 함의가 있다. 미국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면 숫자에 대한 가늠자로서 객관적 정도를 포착할 수 있다. 미국의 기업사례에서 글로벌 표준이라는 바로미터에 부합해야 100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제시문을 통해 객관적 수치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족은 융합과 해체, 기업은 글로벌 스탠더드와 투명성 여부, 정부는 정체와 혁신의 정도를 놓고 0에서 100까지 속도로 나타낼 수 있다.(표 2)

    [표2]
    0 - 25 - 40 - 50 60 - 70 90 -100


    기업) 채집, 수공업

    가족) 공동체, 대가족

    정부) 원시공산제
    정부

    관료제 병폐

    도자기

    핵가족 관료제


    포드 일관공정

    가족 위기

    큰 정부
    가족

    가족 해체 진행

    표준화 + 혁신

    가족 해체 진행

    작은 정부
    기업

    혁신, 속도전쟁

    디지털화

    새로운 가족형태

    디지털 정부


    숫자, 통합논술로 가는 징검다리

    서울대는 왜 숫자를 요구했을까? 사회 현상을 구체적인 수치로 적시하라는 것은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라는 주문이다. 미래예측의 불확실성을 물리적 수치로 확실하게 하라는 말이다. 이는 다른 대학의 논술방식과 차별된다. 통계를 제시하고 이를 해석해 활용하는 것이 기존 방식이라면 서울대는 응시자가 직접 통계를 입안(立案)하고 그에 맞춰 자기 주장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에 대한 발상의 획기적 전환이다. 이러한 방식은 또한 통합논술로 가는 징검다리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속도에 대해서도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빠름에 대한 저항만으론 안 되고 속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속도 자체의 겸손을 요구한다. 속도에 대한 역설은 인간에 대한 예의다. 경쟁적 속도만이 아니라 윤리적 속도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 속도를 삶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족영역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한국과 미국은 동일한 속도를 지향할 수 없다. 우리의 이상(理想)이 미국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한 우리는 우리만의 사회와 문화코드가 있다. 따라서 사회 각 영역의 유기적 함수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 문제해결-제시문과 조건 분석

    조건 1) 한국을 미국의 내용에 비추어 논하고 그 과정에 미국 사회와 우리 사회의 변화 속도를 비교하라.

    비교는 둘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해 구분하는 것이다. 미국이 기업 〉가족 〉정부의 순으로 변화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떨까?

    몸이 아파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의 진단이 정확해야 처방도 올바르게 할 수 있다. 진단과 처방, 분석과 해결이라는 면에서 의사나 논술의 기능은 동일하다. 여기서도 각 영역에 대한 진단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한 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내용 파악’이다.

    조건 1)은 제시문을 정확히 분석하는 게 중요하다. 배경지식이나 확장된 외연은 상관하지 말고 그 자체만 분석해야 한다. 선입관은 금물이다. 비교의 근거가 제시문에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답은 어느 정도 범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변별력의 큰 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제시문 가)는 우리 사회 각 영역의 변화를 진단하고 있다. 진단의 핵심은 지식정보화 시대의 틀 내에서 속도라는 창을 통해 변화의 양상을 보는 것이다. 진단의 중심요소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변화속도다. 제시문 나)는 미국 사회의 영역별 변화 속도를 수치화한 내용으로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에서 발췌, 요약한 글이다. 제시문 가)는 우리 사회의 변화속도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미국의 사례에 비춰 한국의 각 영역이 시속 0마일부터 100마일 중 어느 정도에 도달해 있는지 가늠하는 것이 문제풀이의 핵심이다.

    제시문에 출제 의도가 들어 있다

    미국 기업의 혁신과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은 겨우 10년 전부터 투명경영을 실천하고, 국제 기준에 맞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세습경영과 정경유착의 고리, 회계의 불투명성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의 변화 속도는 어느 정도일까? 미국 기업의 속도뿐 아니라 정부(25), 가족(60)의 속도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가족이 해체되기 시작한 정도를 60이라고 보았으므로 이제 막 시장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시점에 있는 우리 기업은 시속 75마일이면 적당하다.

    한편 우리 가족은 미국과 같은 분열과 해체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기업의 논리가 침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가족의 변화 속도는 핵가족이 조금 더 분화한 30정도로 보면 된다.

    미국 정부가 관료제의 병폐를 보이는 데 반해 우리 정부는 과거와 달리 합리성을 높이면서 기업과 가족영역에 생산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게다가 전자정부를 구현하는 등 디지털 시대의 속도에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하지만 복지나 분배 등 사회적 안전망은 미비한 편이다. 이 부분에서 상당히 앞선 국가는 스웨덴, 핀란드, 아일랜드 등이다. 미국이 가족영역에서 큰 속도변화를 보인다면 한국은 기업과 정부의 변화 속도가 괄목할 만하다. 정부의 속도는 65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표 3’

    [표3]
    25 - 60- 100
    미국

    미국의 사례

    한국

    한국의 사례
    정부

    관료주의 병폐

    가족

    핵가족의 위기 징후
    가족

    가족 해체 진행

    정부, 기업

    혁신 투명성
    기업

    혁신, 속도전쟁



    2007 서울대 정시논술 정밀 분석

    시중에 나와 있는 각종 논술 교재.

    미국이 기업(100) 〉가족(60) 〉정부(25) 순으로 변화하고 있다면 우리는 기업(75) 〉정부(65) 〉가족(30) 순이라 하겠다. 미국이 지식정보화 지수 185라면 우리는 170이다. 이 지수는 한국과 미국의 사회구조를 파악하는 틀이다. 현격한 차이는 가족문화에서 나타난다. 미국이 개인주의적 코드라면 한국은 가족공동체 코드로서 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가족의 아날로그적 감성은 살아 있고 앞으로도 지속할 것이다.

    그런데 이 속도를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쉽고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제시문의 접속관계를 유심히 살펴보자. 문맥이 맺어지는 강도에서 변화속도를 짐작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출제자의 의도가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구체적으론 접속사 ‘그러나’로 대표되는 역접관계가 그렇다. 한국의 경우 ‘기업(그러나) 〉정부(개입하여 왔으나) 〉가족(그러나 한편으로)’ 순이다.

    조건2) 예화들을 사회의 변화 속도와 연관지어 그 의미를 파악하라.

    예화들은 기본적으로 식물과 동물의 세계를 다뤘다. 우리는 자연의 세계를 주로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접했다. TV 다큐멘터리는 영상과 문자로 구성된 총체적 논술이라고 할 만하다. 이 예화들은 이미지로 연상되기 때문에 영상세대인 학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문제는 자연 세계의 이미지를 사회영역과 결부시키고 그 의미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통합논술의 핵심은 ‘영역전이’로서 서로 다른 영역의 화학반응이다. 창의성 또한 이질적인 영역 간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전형적인 통합논술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예화들은 움직임과 속도로 보아 질서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각각의 예화가 내포하는 의미를 비교하면 ‘표4’와 같다.

    조건3) 세 개의 예화 가운데 하나를 택하고 그 입장에 서서 기업, 가족, 정부의 변화 속도를 예측하고 그 이유를 밝히라.

    위 예화들을 정리하면 예화1)과 3)은 개념 자체가 다르다. 가족의 원리와 기업의 논리는 속도와 방향에서 상극이다. 문제는 이 모든 영역을 관통하는 시대의 흐름이 디지털이라는 것이다. 가족은 기업과 이론상으로 상극이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 기기의 컨버전스 흐름처럼 가족과 기업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기업화 방향으로 융합한다. 디지털은 모든 사회영역을 통합하기 때문이다. 가족에 기업논리가 침투하고 정부에 기업형태가 가미된다. 역으로 기업과 정부에 가족과 같은 요소가 도입되기도 한다. 서울대 논제는, 이 과정에서 기업과 가족, 그리고 정부는 어떤 속도로 변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표4]
    예화 1 2 3
    사례

    속도(시간)

    방향

    같음과 다름

    사회 성격

    철학 양상

    표준

    인터넷

    영상

    체육

    인간세상

    식물·자연의 세계

    서로 다름

    서로 다름

    차이 인정(和而不同)

    자율성

    無爲 - 道家

    스스로 표준

    자체 정화(淨化)

    자연 다큐멘터리

    각자 몸을 푸는 체조

    자급자족마을

    정체성
    동물·돌고래떼

    모두 같음

    모두 같음

    동일성 추구

    합리성(효율성)

    法家

    인위적 표준(KS)

    논쟁 일방적 냄비근성

    사회주의 영화

    싱크로나이즈 스위밍

    정당조직, 공동체 모임

    다름에 대한 인정
    동물·아프리카 산양

    다른 속도로 경쟁

    모두 같음

    차별화

    타율성

    홉스·만인의 경쟁

    표준 주도, 표준 창조

    공유지의 비극

    SF

    마라톤 등 게임

    전쟁터

    느림과 성찰


    비즈니스 감각으로 프리젠테이션

    이번 논술은 자기 스스로 새로운 길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주어진 속도에 맞춰 사회의 세 영역에 대해 변화속도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예측하고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 다양한 정보를 해석하고 자기 나름의 통찰력으로 사회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것이다. 여기엔 보고서를 작성해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비즈니스 감각이 요구된다. 우리가 지식정보화 시대의 바탕인 자본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관통하는 학문의 근간은 미래학이다. ‘부의 미래’가 제시문으로 나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문제를 관통하는 흐름은 지식정보화 시대의 패러다임으로서 기업 속도에 맞게 사회 틀이 재편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방향은 예화 3)이다. 그러나 논제는 예화 1)처럼 독립적인 속도로 사회 각 영역이 자생적인 질서를 이룬다면 어떨까?, 예화 2)처럼 각 영역이 동일한 속도로 변한다면 어떤 속도를 설정해 새로운 사회모델을 만들 것인가? 즉 가족 속도와 정부 속도 위주로 재배치된다면 역으로 기업은 어떻게 될까? 하는 낯선 물음을 제기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전형적으로 상상력과 창의성에 기대는 문제다. ‘만일~이라면(What if)’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전망할 때 먼저 다양한 분야의 트렌드를 읽고 진단한다. 그런 다음 사회의 변화에 대해 제시문이나 조건 1)처럼 그 속도를 수치로 나타낸다. 그런데 서울대 논술 문제는 역으로 묻는다. 먼저 기준속도를 제시하고 그 제한 속에서 사회의 변화속도를 물었다. 일정한 틀 안에서 상상력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서울대가 창의적으로 문제를 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뚜렷하다. 서울대 출제자는 예리한 디자이너이자 프로그래머다. 시대흐름에 비켜선 방식으로 창의성을 묻는 모험을 하고 있다. 조건을 주고 실험과 관찰을 거쳐 과학의 새로운 이론이 나오는 것과 같다. 인문학의 화학적 실험이다.

    제시문 가)에 예측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있다. 외환위기 등을 거울 삼아 이에 대한 철저한 대응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했다. 물리적 속도를 산정하되 사회 각 영역의 화학반응을 근거로 그 이유를 밝히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문제가 함축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지금 여기 한국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지식정보화 흐름에 대해 한국만의 흐름과 시각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 문제 해결-예화의 의미 파익 및 택일

    이 문제 대해 수험생 대부분은 기업의 변화 속도를 중심에 놓고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시대의 패러다임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 가족과 정부가 변화를 주도하는 선택은? 남이 잘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골라 글을 전개하기는 쉽지 않다. 사회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고 속도의 시대정신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창의적 모험이 필요하다. 대세의 빈틈을 뚫고 나만의 주장을 견지하려면 대세를 극복할 만한 역량과 내적 논리가 확보되어야 한다. 대선(大選) 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후발주자가 역전하려면 선발주자의 속도로는 안 되며 차별화된 속도로 도전해야 하는 것처럼. 상상력의 틈새를 발견하면 기존 자료가 새롭게 배치되고 이후 창조적인 전략이 나올 수 있다.

    사회 각 영역 중 어느 것이 삼각관계를 움직이는 중심축일까? 이를 간파해야 빠르게 변하는 삼각관계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사랑의 삼각관계가 어느 한 사람의 변수에 의해 요동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디지털 시대의 순방향이 아니라 이를 거스르는 가치인 가족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 기업과 정부는 지식정보화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게 세계적인 대세이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 사회의 현 단계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위상은 막강하다. 만일 가족의 변화를 미국의 방향대로 더 가속화해야 한다면 예화 3)을 선택해 견해를 밝히면 된다. 다른 예화는 필요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대체로 미국 가족의 형태를 이상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사회 각 영역의 변화 속도는 가족의 속도를 정한 다음 다른 두 영역의 속도를 그에 맞춰 예측하는 것이 합당하다.

    당면한 현실을 고민하라

    디지털이 상쟁(相爭)과 경쟁이라면 아날로그는 상생과 연대다. 디지털이 차별화 자체라면 아날로그는 차이의 인정이다. 요체는 아날로그의 상징인 가족을 디지털과 어떻게 충돌시키고 화해시킬 것인가다. 디지털 속도의 빛과 그림자를 한 몸에 품은, 가족이라는 양면성을 어떻게 자기 식으로 풀어 나가느냐가 이번 서울대 논술 문제의 빗장을 푸는 열쇠다.

    문명의 다양성 측면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과 현재 중 언제가 더 좋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욕망은 다양한 문명을 파괴했고, 지금도 소수 언어는 멸종하고 있다. 예화 1)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예화 1)은 자연의 질서를 말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3대가 공존하는 한국의 가족 변화 속도에 들어맞는다. 3대 각각의 변화 속도가 달라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게 불편하다고 해서 각 세대의 가치와 전통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저출산 및 고령화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가족은 사회의 기초이자 인재 배출의 핵심 근원이다.

    유럽연합에 사는 학생이라면 가족보다 기업이나 연합정부의 속도를 중시할 것이다. 국경의 의미가 퇴색된 그들에게 민족과 가족의 의미보다 공존하는 삶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방글라데시 학생이라면 어떨까? 디지털 인프라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3자의 균형을 맞출까?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장래 세계가 각 나라에 맞는 속도를 조화롭게 조절해 지구의 평화를 이룬다면 원시와 디지털 첨단이 공존하는 세계 지도가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이번 논술 문제는 각 나라가 그들만의 속도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던졌다.

    사회 다른 영역의 특성을 예화에 대입하면 더 확실하게 이해된다. 기업은 단 하나, 이윤추구가 그 목표다. 따라서 생존논리상 예화 1)의 다양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예화 2)는 어느 정도의 속도 유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미국처럼 가족의 60%가 해체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화 2)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가족을 염두에 둔다면 예화1)이 최선의 선택이다.

    표준화된 포드시스템

    예화 2)는 조직적 질서에 부합한다. 전 조직이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이는 영화 ‘스피드’에서처럼 일정 속도 이상으로 계속 달려야 하는 디지털 시대의 숙명이기도 하다. 사회 모든 영역이 시속 30마일로 달린다면 기업이나 정부의 발전이 지체된 후진국에 해당한다. 시속 50마일이라면 정부는 개혁 중이고, 가족도 위기를 겪는 한편 기업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남미의 농업부국쯤 될 것이다. 시속 75마일이라면 정부의 혁신, 가족의 해체, 기업의 구조개혁이 진행 중인 나라다. 그리고 시속 100마일이라면 영화 ‘매트릭스’를 상상하는 편이 낫다. 디지털 제국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예화 2)를 선택한다면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중요하다. 만일 기업이 예화 2)처럼 된다면 몸집 큰 공룡기업을 닮을 것이다. 거대해 보여 안전성을 담보했고 한 방향으로 가는 데 유리하다. 일관공정 등 표준화된 포드시스템과 어울린다. 하지만 21세기 디지털시대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접어든 지 오래다. 가족은 같은 몸짓, 같은 속도로 가기 어렵다. 3대는 각기 다른 속도로 변화한다. 반면 정부는 조직의 힘으로 굴러간다. 정부는 관료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거대해 보인다. 이는 돌고래의 이동과 유사하다. 예화 2)는 정부의 운영 원리와 닮았다.

    논술에 양극단은 없다

    사회 각 영역이 하나의 통합시스템으로 굴러가게 만들 속도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동일한 속도와 방향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려면 최소 시속 70마일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의 생존확률을 계산해야 하는데 기업과 정부의 역할이 커져 가족의 해체보다 중요해지면 가족은 기업의 논리에 복속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기 다른 속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가족 내에서 경쟁은 무의미하다. 가족은 경쟁이 아니라 연대의 공간이다. 정부는 관료제라는 조직이 혁신과 효율성 제고를 위해 경쟁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전자정부 등의 노력이 그 일환이다. 그러나 경쟁이 지나쳐 부처 간 알력이 심해지면 오히려 소모적일 수 있다. 환경부와 건설교통부의 긴장관계, 그 충돌과 협력을 떠올려보면 된다.

    경쟁은 기업의 본질적 속성이다. 100의 고지 점령을 위한 경쟁이 계속된다. 아내만 빼고 모두 바꿔 정상을 탈환하는 것이 기업의 숙원이다. 정상이 아니면 역사가 기억해주지 않는다. 예화 3)의 경쟁적 속도는 구체적 현실이다. 헤게모니를 쥐려는 기업 간의 경쟁을 보여준다.

    문제는 정부와 특히 가족이 그 엄청난 속도에 어떻게 적응하느냐다. 기업의 논리대로 모든 것이 물화(物化)하는 세상을 용인하면서 어떻게 가족의 가치를 구현할 것인가. 계속 ‘Go’를 외치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는 인류의 미래상을 내포하고 있다. 예화 3)을 선택해 논술한다면 SF소설을 써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 바탕은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이어야 한다.

    혹자는 이 예화를 개인과 사회가 모두 손해를 보는 ‘공유지의 비극’에 비유하면서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예화의 한쪽 면만 보았을 때 가능한 해석이다. 산양의 질주는 오늘도 계속되며 산양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산양이 지나간 자리엔 다시 풀이 솟아난다. 세상에 양극단은 없다. 다시 말해 0과 1은 없다. 0은 없음이고 1은 절대적 세계다. 논술은 0과 1 사이의 이성적 영역에 속한다. 이것이 음양(陰陽)이다. 음양은 0과 1 사이의 끊임없는 역동적 긴장이다.

    # 구성-상투적이지 않고 유기적으로

    3개 예화 각각을 해석하고,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이제 단락을 어떻게 배치해 효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것인가. 단락 구성에 영화 ‘펄프 픽션’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1994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의 힘은 개성 있는 캐릭터와 독특한 구성에 있다. 12345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25134의 순서로 에피소드 순서를 바꿔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서울대 논술도 최소한 123의 구성은 피해야 한다. 312 혹은 213의 순서로 구성하면 좋다. 틀이 잡히고 나면 거기에 맞게 내용을 재배치한다. 3개 조건을 단락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단락 속에 긴밀하게 맞물리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건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조건 1)은 한국과 미국의 변화속도 비교다. 구체적인 사례로 적용할 수 있다. 조건 2)는 예화들의 사회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조건 2)와 조건 3)은 동시에 만족시키는 게 좋다. 조건 3)에서 지시한 대로 한 예화를 선택해 논리를 전개하면서 다른 예화들은 왜 배제했는지 각각의 사회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유를 대면 유기적인 구성이 된다. 조건들을 따로 떼어놓는 것보다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깔끔하다. 이때 단락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표현력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1등의 고민

    서울대 김영정 입학관리본부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기업과 가족, 정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양상을 변화 속도의 관점에서 그려보라는 것이 이 문제의 취지”라고 밝혔다. 제시문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논제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분석하고 개념화한 뒤 내용을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능력이 있는지를 주로 평가하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풀이는 이 말의 각론에 해당한다.

    이 문제의 본질은 결국 ‘나’의 속도를 묻는 것이다. 지식정보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나는 어떤 속도로 변화해야 하는지, 또한 지식정보화 시대에 공교육의 논술 준비, 대학교의 논술 인프라 구축, 사교육의 통합논술 대비 등이 각각 어떤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지 준엄하게 묻고 있다.

    이 문제는 결국 한국 1등의 고민이다. 1등 기업 삼성의 고민, 1등 대학 서울대의 고민은 결국 대한민국의 고민이다. 모든 살아남으려는 자, 적응하려는 자의 고민이다. 지난해와 올해 서울대가 ‘경쟁과 속도’를 논제로 삼은 이유가 여기 있다. ‘생존전략’이 대한민국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 예화-1을 선택해 전개한 풀이의 한 예

    무릉도원과 유토피아는 인류가 열망한 이상적인 사회다. 공통점은 인위적인 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영역들이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상사회는 단지 인류의 꿈일까? 문명의 거침없는 진보를 향해 가는 지식정보화 시대에 이상향의 조건과 이를 만들기 위한 사회 각 영역의 변화속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까?

    이상사회에서 변화는 시간과 관계없는 자생적 속도다. 다른 속도가 어우러져 반복이 아닌 순환이 지속되는 조화사회, 인류 초기 원시공산제 사회, 그리고 지식정보화 시대에도 요청되는 패러다임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화 1)이다. 자연은 생명의 법칙을 닮았다. 생명의 각 기관이 항상성을 유지해 지속하는 것처럼 사회도 유기체로서 제 속도로 움직이면 각 영역이 자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다. 지식정보화 시대도 마찬가지다. 각 영역의 변화속도가 자연의 속도를 닮는다면 최적의 질서로 사회는 지속 가능한 변화를 한다. 하지만 아직 자연을 닮은 사회는 없다.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려면 각 영역이 적당한 질서로 살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각 나라는 지금 적합한 한계속도를 맞추기 위해 변화를 꾀하고 있다.

    현재까지 속도는 미국의 기업이 주도했다. 기업을 지식정보화 시대 기준점 100이라고 설정한다면 60의 가족이 25의 정부보다 훨씬 더 기업화했다. 이에 비춰 한국은 어느 정도일까? 변화추이를 분석한다면 한국은 기업 70, 정부 60, 가족 30 정도다. 기업은 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글로벌 표준을 통해 세계화 시대에 부응하고 있지만 아직 회계와 마케팅, 금융 등 대부분 기업영역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미국 기업에는 미치지 못한다. 두 나라의 가족과 정부도 서로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미국은 가족의 해체가 상당부분 진행됐지만 한국은 그 징후가 이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족의 분화(分化)는 사회변화 속도에 맞게 긍정적으로 작용했지만, 여성의 권익향상 이후 불거진 가족문제들이 있고, 경제적 이유로 가족의 위기가 심화됐다. 하지만 아직 한국의 핵가족은 강고하고 가족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가 사회의 저류에 있어 미국 속도와는 차별된다. 정부는 디지털시대로 이동하는 흐름에 맞춰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국민 서비스 향상을 위해 조직을 혁신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미국이 관료제로 인한 병폐가 심각한 반면 우리는 각종 비효율을 쇄신하고 처리 속도를 생산적으로 축소했다.

    지식정보화 지수는 각 사회영역의 기업화 정도를 나타낸다. 미국은 185, 한국은 160으로 미국이 앞선 상황이지만 이는 현재의 변화속도일 뿐이다. 또 지수가 높다고 바람직한 사회는 아니다. 올바른 사회는 속도를 스스로 조직화하는 자연적 질서에 기초한다. 자연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국가마다 속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세 예화는 속도의 방향과 차이를 기준으로 자생적 속도, 조직적 속도, 경쟁적 속도로 분류한다. 이를 국가에 영역 전이하면 이상적 사회, 개발독재 사회나 사회주의 국가, 시장자본주의 사회로 볼 수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의 속도전쟁은 지식정보의 선점을 노리는 기업 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초고속전쟁은 한층 치열해졌고 기업들은 무한경쟁의 최전선에 섰다. 예화 3)은 최고가 되려는 기업의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경쟁만이 유일한 가치인 시장논리를 의미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메모리에 관한 ‘황의 법칙’이 대표적인 사례다. 2년마다 속도를 한 단계 높임으로써 세계 표준화를 주도하고 있는데, 산양처럼 무한경쟁의 첨병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2등 이하를 역사는 기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희생자가 양산된다. 위기는 한 순간에 터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기술로 대표되는 문명에 대해 반성하고 통찰해야 한다. 실상 빠른 변화속도로 희생자들이 속출하면 가족은 더 붕괴되고, 정부의 사회적 안전망이 불철저할 경우 기업이 아무리 빠른 속도로 사회를 견인하더라도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힘들다. 다른 변화속도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지구상에서 평등한 인간세상을 구현하려고 했던 속도실험도 실패로 끝났다. 20세기 초 영토경쟁을 위한 제국주의에 맞서 사회주의가 등장했다. 예화 2)가 이에 부합하는데, 사회적 안정과 효율성을 제고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사람이 아니라 조직 시스템이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축이다. 낙후된 지역에서 성장 드라이브나 계획경제를 실시할 때 유용했다. 하지만 그 시스템 자체가 실패를 낳았다. 관료제라는 병폐가 공동체 가치의 진행을 가로막았고 부정부패가 심해졌다. 우리의 개발독재 시대에도 정경유착 등이 문제가 됐다. 결국 사회를 운영하는 데 속도 일체화는 암적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얼굴이 없는 조직적 속도는 폐기됐다.

    과연 우리 사회는 속도를 어떻게 맞춰야 조화사회가 연출될까? 그 시나리오의 편집에 최적의 속도를 예측하는 관건은 가족이다. 기업, 가족, 정부 3자(者) 간의 균형추 구실을 하는 것은 가족이다. 왜?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가족이 중심이 된 사회를 유지해왔고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에도 가족이 핵심역량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 60년 동안 압축 경제성장을 이뤘는데 그 힘은 구성원을 교육하고 사회일꾼을 만든 5000년 역사의 에너지, 바로 가족문화였다. 이 지점이 조화사회를 향한 기로다. 변화 과정에서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변모했고 핵가족은 분화하고 해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새로운 가족의 탄생도 예고하고 있다. 만일 미국과 같은 속도로 가족이 변한다면 우리 사회는 근본부터 흔들릴 것이다. 이제 한국만의 가족 변화속도를 가져야 한다. 이 속도를 어떻게 다른 사회영역의 속도와 보조를 맞추느냐가 중요하다. 디지털 시대에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는 아날로그 가치의 핵심인 가족. 이 역설이 통하는 우리만의 전통을 재발견할 때 지식정보화 시대에 우리 사회는 자연을 닮을 수 있다.

    문제는 가족도 디지털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하는데 그 적절한 속도가 어느 정도냐다. 이것이 사회 변화의 핵심적 생존논리다. 가족의 속도를 먼저 정한 다음에 기업의 속도를 맞추고, 정부가 양자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적당하다. 가족은 핵가족을 바탕으로 디지털화가 건강하게 진행된 상태인 40이면 적합하다. 기업은 세계화의 파고를 넘어야 하고 무한경쟁이 아니라 2차적 경쟁을 할 수 있는 90 정도. 정부는 95의 속도로 기업을 보조하고 가족의 해체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각종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총계 225의 변화속도로 세 영역이 유기체처럼 돌아간다면 자연의 질서가 순환하는 이상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최고나 일체가 아니라 최적(最適)이라는 사실이다. 즉 그 관계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용(中庸)’이어야 한다.

    2007 서울대 정시논술 정밀 분석
    신승현

    1966년 경북 상주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KBS PD(‘6시 내 고향’ ‘세계는 지금’ ‘TV 문화기행’ ‘한국의 미’ ‘TV, 책을 말하다’ 등 제작)

    現 C&U 콘텐츠 대표



    인류의 역사는 생존의 역사였다. 생존의 최대가치는 행복이고 그 사회적 행복을 자연으로 치환하면 조화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결국 기업의 무한경쟁도, 정부 주도의 조직적 경쟁도 아닌 자율과 자연에 바탕을 둔 조화로운 사회다.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 맺어지는 연대가 기본 가치인 사회, 가족 3대가 각자의 속도로 공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회, 예화 3)의 기업논리, 예화 2)의 조직논리의 평등 가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 조화된 제3의 길, 인간 상생의 조화사회여야 한다. 한국문명의 새로운 지도를 향한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교육&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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