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 구축에 희생된 북한 경제

  •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학 yhkoh@dongguk.edu

    입력2007-04-11 1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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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쪽에서 박정희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준 유신체제가 들어선 직후 북쪽에서는 김일성을 절대군주로 떠받드는 주석제가 자리잡았다. 중국과 소련의 후계체제 진통을 목격한 김일성은 1970년대 초부터 후계체제 정립을 서둘러 1980년대 초 김정일을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경제보다 정치와 사상을 중시한 결과 김정일 후계체제가 굳건해질수록 북한의 경제는 퇴보했다.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 구축에 희생된 북한 경제

    1984년 4월25일 인민군 창건 52주년 행사에 참석한 김일성·김정일 부자.

    1970년대 국제정세는 미국과 소련의 핵 군사력 균형에 따른 평화공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 일본과 중국의 국교 수립,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 등 세계적인 화해 분위기 속에 남북한도 그 흐름에 적절히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다. 겉으로는 남북관계도 대화를 시도하는 등 ‘대화 있는 대결시대’였다.

    대화를 시도하는 이면에서 남과 북은 내부 권력을 강화하면서 대결을 준비했다. 남은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출범시켰고, 북은 그해 12월 주석제 헌법을 채택해 유일체제를 법적으로 제도화했다. 남북 모두 지도자를 초월적 능력을 가진 영도자로 격상하는 ‘권력의 인격화’ 현상이 나타났다. 국제정세의 데탕트가 동맹국가 사이의 안보공약 약화로 인식되면서 남과 북의 지도자는 ‘위기정부(crisis government)’ 개념을 도입해 권력을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신체제와 유일체제가 구축됨으로써 남북관계는 ‘적대적 의존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서로 상대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상대의 위협으로부터 체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강화하는 적대적 의존관계가 형성되면서 남과 북의 체제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혁명적 수령론의 법적 제도화

    1956년 ‘8월 종파사건’에서 연안파, 소련파가 몰락하고 1967년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된 것을 계기로 북한의 모든 권력은 김일성 중심의 빨치산 수중에 들어갔다. 1970년대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반대파가 모두 숙청됐고, 경제적으로는 전후(戰後) 복구사업과 사회주의 개조를 마무리하고 ‘자력갱생 원칙에 입각한 자립적 민족경제’의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한은 주석제 헌법을 채택했다. 1972년 12월에 채택한 북한 사회주의 헌법의 중요한 특징은 ‘혁명적 수령론’을 헌법적으로 제도화한 주석제의 규정이다. 1972년 헌법에 따르면, 공화국 주석직은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직책으로 국가 활동에 대한 주석의 유일적 영도를 보장하기 위해 주석이 중앙인민위원회를 직접 지도하며 필요에 따라 정무원회의를 소집하고 지도하며 북한의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 통솔하는 직위다.

    1972년 헌법의 국가권력 구조는 주석-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으로 이어지는 3단계 중앙행정체계를 이루고 행정부에 권한이 집중돼 있었다. 따라서 최고 주권기관으로서 최고인민회의가 형식상이나마 보유하던 권한이 대폭 축소됐다. 더욱이 사법기관인 중앙재판소와 중앙검찰소도 중앙인민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됐다.

    1972년 헌법 채택으로 북한의 당정관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미국 하와이대 서대숙 교수다. 서 교수는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가 신설돼 “권력의 중심이 당에서 정부로 이전되고, 당의 운영과 정부의 기능이 분명하게 나누어졌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당의 정책결정 기능이 대부분 중앙인민위원회로 넘어갔고 김일성이 직접 행정부서를 관장하게 됐다. 따라서 당의 역할과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화됐지만 김일성은 당의 운영을 아들 김정일에게 맡겼다. 이것은 정권승계를 위한 장기적인 조치로 김일성 자신이 과거 당기구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김정일이 당을 효과적으로 장악케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서대숙, ‘북한의 당·정 관계변화’, 제1회 한국정치세계학술대회 논문집 ‘민족공동체와 국가발전’).

    서 교수는 당에서 국가로 중심이 이전된 요인으로 제3세계와의 관계 확대에 따라 김일성을 국가원수 지위로 격상해야 한다는 의전적인 이유와 남한의 유신헌법에 대응해 남한의 대통령과 대등한 지위를 가질 필요성을 들 수도 있겠으나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정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과거엔 권력을 공고히 하고 다른 집단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당기구를 필요로 했으나 당내 유일사상체계와 김일성-김정일 지도체제를 확립한 1970년대에는 당 내부에 대해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는 것.

    의식상 국가원수로 전락한 수령

    1970년대 김일성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정부를 관리할 줄 아는 젊은 전문기술관료였다. 김일성의 권력이 안정됨에 따라 그에게는 당내의 혁명투사보다 정부를 이끌어 나갈 유능한 관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신헌법을 제정해 자신의 권력을 정부로 옮기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을 아들 김정일에게 넘겨주고 당을 장악케 함으로써 권력승계를 준비코자 한 데 있다(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 교수의 주장처럼 1972년 헌법 채택 당시 국가행정기관(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부가 당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당정치국과 당중앙위원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됐다고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종래의 내각을 정책지도기관과 집행기관으로 분리해 주석의 최고정책지도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한 것은 당의 결정과 정책노선을 더욱 효율적으로 전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행정집행기관인 정무원 위에 중앙인민위원회를 신설한 것은 행정부의 강화라기보다는 당의 국가기관에 대한 영도적 지위를 보장하고, 당의 행정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석제 채택 당시 김일성은 당의 영도적 역할을 유지하면서 국가기능을 활성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정일이 당권을 장악한 후 권력이 국가로부터 당으로 다시 이동하면서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은 점차 축소된 듯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일성은 ‘위대한 수령은 곧 국가주석’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태상왕’의 위치에서 ‘군림(reigning)’할 뿐이었고, 실질적인 ‘통치(ruling)’는 당권을 장악한 김정일이 중앙인민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그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해왔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4월9일 제7차 개정헌법 제113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일체의 무력을 지휘통솔한다”고 규정해, 주석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 일체를 국방위원회 위원장에게 이관했다. 그리고 1993년 4월9일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주석의 지위는 헌법적으로도 실권이 없는, 주로 외교권을 행사하는 ‘의식상의 국가원수’로 전락했다.

    이와 같이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는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 함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한 국가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할 만큼 군사권은 매우 중요한 실권이다. 군사권이 없는 주석과 김정일의 공식 정치기구를 통하지 않는 측근 중심의 정책결정 등으로 주석제는 더 이상 존재의의를 찾지 못하게 됐다. 북한은 1998년 9월 개정 헌법에서 주석제를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국가수반의 지위로 격상했다.

    이와 같이 주석제는 후계체제 구축에 이용돼 후계체제의 완성과 함께 그 생명을 다했다. 김정일이 죽은 수령을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고 주석제를 폐지했다는 것은 형식상 수령제(수령-당-국가체제)를 다소 완화하고 ‘당-국가체제’를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당대회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현재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중심으로 통치하는 군사 우위의 준전시적 위기관리체제인 선군(先軍)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체제에서는 권력승계에 관한 명확한 절차가 당규약이나 헌법에 명문화돼 있지 않아 권력투쟁과 정치불안의 원인이 된다. 북한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중국에서 벌어진 린뱌오(林彪)사건 등을 목격하고 후계 문제를 서둘렀다. 1969년 4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9전대회에서는 당 부주석인 린뱌오를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정하고 당규약에 명문화했다. 이것은 공산당 역사에 없는 이례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린뱌오 사건이라는 반혁명 쿠데타 사건이 일어나 이것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1973년 8월 중국공산당 10전대회의 정치보고에서 밝혀진 바로는 린뱌오는 1970년 8월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총회에서 반혁명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미수로 끝났다고 한다. 그후 린뱌오는 1971년 3월 ‘571공정’이라는 반혁명 쿠데타 계획을 세우고 9월8일 그것을 실행해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별도의 중앙위원회를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자 9월13일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도망가던 중 몽골의 운돌한이란 곳에 추락해 죽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의 진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의 ‘4인 무리(4인방)’ 사건으로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또 한 번 날카로운 투쟁이 벌어졌다(김유민, ‘후계자론’).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서 불거진 ‘수령의 후계자 문제’와 관련한 진통을 교훈 삼아 1970년대 초부터 김일성 후계 문제를 서둘렀는데, 김정일 이후의 후계 문제를 추론하기 위해서도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권력승계가 이뤄진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후계자론은 다음과 같다.

    혁명계승론과 혈통계승론

    첫째, 혁명계승론이다. 수령의 혁명위업은 혁명의 간고성(艱苦性)이나 복잡성 때문에 장기간 투쟁해야 하는 사업이므로 수령의 대(代)에 완수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수령의 후계자가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해 대를 이어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다.

    둘째, 혈통계승론이다. 수령의 후계자는 수령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가 돼야 한다는 동양의 가부장적 정서를 은연중에 내세움으로써 권력세습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셋째, 세대교체론이다. 후계자는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해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수령과 함께 혁명활동을 해온 같은 세대에서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수령의 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할 후계자는 수령의 다음 세대, 즉 새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다.

    넷째, 준비단계론이다. 후계자는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해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수령 생존시 결정돼 수령이 일정 기간 육성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 이유는 ①준비기간을 통해 후계자가 수령을 직접 보좌함으로써 수령의 혁명위업을 체득해 이를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며 ②수령의 갑작스러운 유고시 수령의 영도가 일시적으로나마 중단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③후계체제가 굳어지지 않음에 따라 권력쟁탈을 노리는 야심가가 준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다섯째, 김일성 화신론이다. 수령의 후계자는 수령의 모든 것을 체현하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김일성에게 충실한 자라야 한다는 논리다. 북한은 후계자가 지녀야 할 제일의 덕목으로 지도자로서의 일반적인 자질보다 수령, 즉 김일성의 혁명사상과 이론을 체득하는 것과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을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후계자론에 따라 1970년대 북한은 김정일 후계체제를 본격적으로 구축했다. 김정일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64년 6월1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면서부터 당활동을 시작해 1973년 9월17일 당중앙위원회 비서, 1974년 2월13일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당내에서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추대됐다.

    이어 1980년 10월14일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됨으로써 후계자의 위치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24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19차 전원회의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추대, 1992년 4월20일 원수 칭호 부여, 1993년 4월9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추대 등을 통해 김일성 생전에 이미 군사부문에서 제도적인 권력승계를 완료했다.

    김정일의 후계 준비 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그가 처음 당에서 일할 때는 문화예술 부문에서 유일사상체계를 잘 이해하고 능력이 있으며 후계자로서 자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나, 후계자 준비작업으로 떠맡은 공식 당 사업, 즉 3대혁명소조운동에는 실패했다. 그의 이런 실책을 바로잡은 사람은 김일성이었고, 김일성이 일단 결심하고 후계자 확립을 추진한 다음에는 아무도 김정일을 그 위치에서 물러나게 할 수 없었다.

    김일성·김정일에 이어 권력서열 제3위에 있던 김동규는 김정일의 당 사업에 불만을 품고 그를 비판하려 했다. 그러나 김동규는 제거됐고, 김정일은 후계자 지위를 더욱 확고히 했다(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정이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후계자로 결정되고 당·정·군을 장악한 후에도 김정일 체제를 공고히 다지기 위한 진통을 치러야 했다. 1976년 6월 초에 열린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국가 부주석 김동규는 김정일의 간부정책과 계급정책·후계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김동규는 “혁명열사 가족만 지나치게 내세우지 말라. 노동계급 가족의 불만이 크다”며 빨치산 2세들에 대한 특별대우를 비판하고 ‘노동계급 우선’을 주장했다. 그것은 항일열사 가족들을 우대하면서 이들과 한 덩어리가 돼 당 규율과 질서를 무시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저항과 반발

    또한 김동규는 노(老)간부들에게 ‘노쇠’ 딱지를 붙여서 일선에서 후퇴시키고 후계체제를 떠받칠 청년간부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는 김정일의 ‘간부청년화’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김동규가 숙청된 실제 이유는 “후계자 부각을 너무 서두른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는 “김정일 치켜세우기를 너무 서둘러선 곤란하다”면서 인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시간 여유를 두고 교양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김동규는 당 비서 겸 국가부주석으로 김일성, 김정일 다음의 서열이었지만 김일성이 건강이 좋지 않아 실무에서 손을 뗀 상태였기에 2인자나 다름없었다.

    김정일의 밀어붙이기식 경제사업에 대한 저항과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974년 10월 중순부터 벌어진 이른바 ‘70일 전투’ 때는 경제관료의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이때 경제관료는 “물론 70일 동안 모든 자원과 노동력을 집중하면 특정한 경제계획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제를 70일만 하자는 얘기인가”라는 불만을 터뜨렸다. 자원과 노동력을 집중 투자하면 계획이야 달성할 수 있지만, 가동자원을 다 써버리면 70일 전투 이후에는 경제를 어떻게 운영하려는가 하는 비판이었던 것이다.

    김정일 후계체제를 굳히는 과정에 무엇보다도 신경을 쓴 것은 군대였다. 김일성은 군이 김정일 후계체제에 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당 중앙의 결정과 지시를 어김없이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의 노력을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은 군에 대한 지도를 강화할 수 있었다. 1979년 2월 전군(全軍)의 주체사상화 관철 방침을, 5월에는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심화과제를 각각 내놓았다. 또 12월에는 모든 장병이 항일혁명투쟁 시기에 김일성에게 충실했던 ‘오중흡·김혁을 따라 배우는 운동’을 전개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임영태, ‘북한 50년사 2’). 결국 김정일 후계체제는 이런 저항을 거치면서 견고하게 구축됐다. 후계체제는 일련의 내부 저항을 통해 오히려 굳건해졌고, 1980년 10월 6차 당 대회에서 공식화됐다.

    1967년 5월 북한은 당 창건 이후 이른바 ‘반당반혁명종파분자’에 대한 숙청작업을 계속 펼쳐왔음에도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고 시인하고 유일사상체계를 더욱 철저히 세우기 위한 사업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이 시기에 ‘당중앙’으로 칭해진 김정일은 당 안에 나타난 부르주아 및 수정주의 분자들의 반당·반혁명적 책동을 폭로·분쇄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 중대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당반혁명분자를 숙청하기 위해 1967년 5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가 소집됐다.

    북한 당국은, 당시 전원회의에서 반당반혁명분자를 폭로·분쇄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의 영도 아래 ‘당중앙(김정일)’이 제때에 이들의 죄행을 간파하고 적극적인 대책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당내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운다는 명분하에 김일성의 지도력에 반발하던 종파분자를 완전히 제거하고 수령(김일성)과 당중앙(김정일)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지배체제를 확립했다.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로!’

    당중앙은 북한에서 혁명과 건설이 한층 높은 단계에 들어서던 시기인 1974년 2월 당선전일군강습회에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자!’라는 전투적 구호를 통해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주체사상)로 일색화했다. 1945년 10월10일 조선노동당이 창건된 지 30년이 다 된 1974년 2월에서야 김일성주의화를 당의 강령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종파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 등의 문제로 당내에 많은 곡절이 있었다는 것과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확립에 난관이 많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김정일은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주체사상화) 요구를 전당(全黨)에 철저히 관철하기 위해 ‘당의 유일사상 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을 만들어 공포했다. 1974년 4월14일 김일성의 62회 생일 전날 김정일이 당 간부들에게 발표했다는 10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해 몸 바쳐 투쟁해야 한다. ②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충심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③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해야 한다. ④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해야 한다. ⑤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⑥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사상의지적 통일과 혁명적 단결을 강화해야 한다. ⑦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따라 배워 공산주의적 풍모와 혁명적 사업방법, 인민적 사업작풍을 소유해야 한다. ⑧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안겨주신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며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 자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답해야 한다. ⑨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유일적 영도 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한결같이 움직이는 강한 조직 규율을 세워야 한다. ⑩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해 나가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차별성 부각

    김정일은 열 번째 대를 잇는 원칙과 관련해 “당의 유일적 지도체계를 확고히 세우는 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위업을 고수하고 빛나게 계승·발전시키며 우리 혁명위업의 종국적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결정적 담보”라고 하면서 “①수령의 영도 밑에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체계를 확고히 세워야 한다. ②김일성이 항일혁명투쟁 시기에 이룩한 혁명전통을 고수하고 영원히 계승·발전시키며 혁명전통을 헐뜯거나 말살하려는 반당적 행동에 대해서 투쟁한다. ③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체계와 어긋나는 현상과 요소에 대해서 투쟁한다. ④자신뿐 아니라 온 가족과 후대들도 수령에게 충성을 다하며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에 끝없이 충실하도록 한다. ⑤당중앙의 권위를 백방으로 보장하며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해야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김일성의 영도 밑에 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1970년대 중반에 본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김일성이 1974년 7월31일 당조직일꾼 강습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 ‘당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강화할 것’의 북한식 표현) 대하여’에서 온 사회를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해야 할 혁명발전의 현실적 요구에 맞게 당사업을 개선·강화하는 데 대한 강령적 지침을 제시하고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유일지도체계 확립을 지시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이 서한교시에서 첫째, 당대열을 강화하기 위해 전당을 간부화·정예화하며, 간부와 당원을 당의 유일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며 전당이 당중앙(김정일)의 유일적 지도 밑에 움직이는 강한 조직규율을 세울 것. 둘째, 당의 군중노선을 철저히 관철할 것. 셋째, 사회주의건설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할 것. 넷째, 당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을 개선하는 과업을 제시하고 당의 혁명적 사업방법인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당사업에 철저히 구현하며 당세도와 관료주의, 형식주의와 요령주의, 암행어사식 사업방법을 개선하며 일꾼들 속에서 낡은 사상을 없애기 위한 사상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중에서 김일성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는 데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를 가장 중요한 요구로 본다면서 “당중앙(김정일)의 유일적 지도를 떠나서는 당 안에서 사상의 지적 통일을 보장할 수 없으며 전당이 한 사람같이 움직이는 전일적인 조직체로 될 수 없습니다”고 주장해 김정일의 유일적 지도를 강조했다(김일성, ‘당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 ‘김일성저작선집’).

    1970년대 중반 북한에서는 김정일 후계체제의 정당화를 위해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과 김정일의 유일적 지도를 강조했다.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김정일은 1974년에 새로운 당생활총화제도를 전당적으로 확립했다.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제시된 새로운 당생활총화제도는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이룩한 ‘항일유격대식 당생활체계’를 김정일이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현실에 맞게 발전시켜 창조한 혁명적인 당생활총화제도라는 것이다.

    김정일은 문화예술 부문을 지도하면서 창조한 이 새로운 당생활총화제도를 전당적으로 세우기 위해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결정서를 채택해 내려 보내고 그것을 철저히 집행하도록 했다. 이로써 김정일의 지도권은 확고해졌다. 김정일은 당에서 유일지도체계 확립을 발판으로 1970년대 중반 군, 정권기관, 대남사업 쪽으로 점차 손을 뻗어갔다.

    이 시기에 발표됐던 김정일의 주체사상과 관련한 논문들은 주로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라는 구호 아래 김일성주의(주체사상)의 구성체계를 정식화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주의의 관계 및 김일성주의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당내 후계지명 이후 김일성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차별성을 부각하면서 이데올로기 해석권을 독점하고 김일성주의의 정식화를 기도했다. 그러나 주체사상이 후계체제 구축에 이용됨으로써 북한정치의 파행이 빚어지고 사회발전의 동인(動因)을 잃게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후계체제 구축에 반비례한 경제성장

    북한은 1974년 2월부터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 사상과 정치 우선주의를 표방함으로써 경제침체가 계속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 확립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정치·사상사업 우선, 자력갱생식 발전전략,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병진, 속도전을 비롯한 대중동원 등을 추진함으로써 경제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특히 후계체제의 구축과 경제성장은 반비례해 김정일 후계체제가 굳건해질수록 북한 경제의 성장이 둔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북한은 1967년 5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항일빨치산파 중심의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됨으로써 항일유격대의 혁명전통이 체제 정당화의 근거로 자리잡게 됐다. 따라서 북한은 수령과 전사, 지도자와 대중이 혈연적 연계를 바탕으로 수령(최고뇌수, 어버이)-당(심장, 어머니)-국가(포괄적 인전대(引傳帶·노동당의 외곽단체를 이루는 각급 조직), 호주)-근로단체(인전대)-인민대중(세포, 자식)이 ‘혁명적 대가정’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유격대국가’(와다 하루키) 또는 ‘조합주의국가’(브루스 커밍스)의 성격을 띠게 됐다.

    북한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 및 수령의 유일지도체제 확립, 즉 유일체제의 형성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요소를 말살하는 계기가 됐으며, 체제 경직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민주주의 요소는 축소되고 중앙집권제가 강화되고 중요 정책 결정과정에서 활발한 공개토론이 자취를 감춤으로써 당내 민주주의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 구축에 희생된 북한 경제
    고유환

    1957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정치학)

    現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한국 정치학회·한국국제정치학회·북한연구학회 이사, 대통령 자문정책기획위원회 자문위원

    저서 : ‘북한의 사상과 정치’(공저) ‘김정일 연구’(공저) ‘북한정치의 이해’(공저) ‘로동 신문을 통해 본 북한변화’(엮음)


    후계체제의 조기 구축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원천 봉쇄했다. 따라서 북한은 정치체제 안정과 후계체제 확립 및 공고화에 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두는 수령과 지도자 중심의 ‘유일체제(수령제)’를 확립함으로써 고도 과학기술혁명, 특히 제3차 산업혁명인 정보·지식혁명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급속한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데도 실패했다.

    유일체제와 수령제의 확립은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인 법치(法治)가 아니라 무오류성이 부여된 신격화된 수령(김일성)과 영도자(김정일)에 의한 자의적 지배, 즉 인치(人治) 또는 신치(神治)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피의 숙청과 공포정치를 자행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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