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과정 같지만 목적지 다른 6·15남북공동선언

  •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학 yhkoh@dongguk.com

    입력2007-07-05 1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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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5남북공동선언의 핵심은 남과 북이 각자의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남측의 남북연합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목적지향이 다르기에 본질적으로는 공통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남북화해협력정책은 대안 없는 대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과정 같지만 목적지 다른 6·15남북공동선언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조기붕괴 가능성은 높지 않으며, 북한은 자체의 힘으로 변하기 어려운 정권이라는 전제하에서 햇볕론에 입각한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의 변화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은 접촉(교류·협력), 제공(先供後得), 대화(당국간·비당국간 대화)를 통한 북한의 변화와 남북간 화해협력, 공존공영을 모색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1단계에서는 분단체제의 평화적 관리정책을 추진하고, 2단계에서는 포괄적 접근을 통한 냉전구조 해체와 ‘사실상의 통일’을 이룩한다. 즉 김대중 정부는 단기적으로 북한의 장기생존 가능성을 가정하고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협력 추진 등 대북정책 3원칙을 표방하면서 북한의 체제위기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중·장기적으로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통해 통일의 첫 단계(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는 중간단계)인 남북연합단계를 실현하기 위해 포괄적인 접근정책(포용정책)을 추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통해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출범 이후 새로운 통일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대북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그 이유는, 첫째, ‘법적 통일’은 후대로 미루고 남북한간 화해·협력을 통한 공존·공영을 모색하면서 경제공동체 건설과 상호왕래 등 ‘사실상의 통일’을 지향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정부는 통일정책보다는 대북정책(햇볕정책·포용정책)에 주력했다. 따라서 새로운 통일방안을 제시해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째, 보수주의를 표방하던 자민련과의 공동정권이라는 한계와 새로운 통일방안에 대한 국민적 합의 도출 과정에서 발생할 국론분열과 혼란 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새 통일방안을 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념적 지향이 서로 다른 국민회의(새천년 민주당)와 자민련의 공동여당이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통일방안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노태우 정부가 만들고 김영삼 정부가 보완·발전시킨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비교적 잘 만든 통일방안이란 점에서 이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대중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계승하면서 김 대통령이 야당시절 주장했던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에 따라 추진됐다. 이는 “통일은 시작은 서두르되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김 대통령의 지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제로섬에서 윈윈으로

    3단계 통일방안의 첫 단계는 남북연합(1연합 2국가 2체제 2정부)이고, 2단계는 연방(1연방국가 1체제 2지역자치정부), 3단계는 완전통일(1국가 1체제 1정부)이다. 통일국가는 21세기의 세계적 조류에 따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사회복지를 구현할 체제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연방제에 대한 ‘오해’ 때문에 대선(大選)에서는 ‘3단계 통일방안’을 공약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3단계 통일방안’에 따라 임기 중 첫 단계인 ‘남북국가연합’의 실현을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정부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의 남북관계를 윈윈 게임(win-win game)으로 전환하기 위한 구상을 햇볕론에 입각한 대북포용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이를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 그 결과 남북 당국 간에 신뢰가 조성됐고, 드디어 분단 55년 만인 2000년 6월13~15일 평양에서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한 최고지도자간의 담판에 따라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남북관계 개선의 극적인 돌파구가 마련됐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의혹으로 형성된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를 막고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 즉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구도가 정착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이 주변 4강의 대(對)한반도 영향력 경쟁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한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15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남북한은 화해협력, 공존공영의 새 시대를 열었다. 남북의 두 정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문을 만들어냄으로써 상호이해 증진과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6·15공동선언은 통일의 원칙과 방법, 그리고 인도적 문제와 교류협력 및 당국간 대화에 관한 내용으로 이뤄졌다. 남과 북의 두 정상은 자주 통일원칙(1항), 통일방안 공통성 인정(2항), 이산가족문제와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3항), 남북 협력·교류의 활성화를 통한 신뢰구축(4항), 합의사항 실천을 위한 당국간 대화 개최(5항),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에 합의했다.

    6·15남북공동선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2항에서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남과 북이 공존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남북한이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했던 상대편의 통일방안을 상호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남한의 공식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2단계인 남북연합 및 ‘김대중의 3단계 통일방안’의 1단계인 남북연합과 북한 김일성 주석이 1991년 신년사에서 밝힌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의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에 공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당국이 남북한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놀라운 진전이다.

    연합제와 연방제의 공통성

    북한은 2000년 10월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안경호 서기국장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돌을 기념해 열린 평양시 보고회 연설에서 6·15공동선언에 명기된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김일성 주석이 1991년 신년사에서 제시한 방안이라고 확인했다. 안경호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의 원칙에 기초하되 북과 남에 존재하는 두 정부가 정치·군사·외교권 등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갖고 그 위에 민족통일 기구를 내는 방법으로 북남관계를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통일적으로 조정해 나가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대한 해설서(통일연수원, ‘민족공동체 통일로 가는 길’, 1996, 14쪽)에 따르면, 남북연합단계는 남북이 화해·협력으로 구축한 신뢰를 토대로 통합과정을 관리하는 단계로 남북간 평화를 제도화하고 민족 동질화를 본격 추진하는 것이다. 남과 북은 이 단계에서 민족공동생활권을 형성하면서 사회·문화·경제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게 될 것이다.

    또 남북연합단계에서는 남북연합에 공동기구를 두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남북간의 합의로 정하고, 국가통합, 즉 정치와 제도의 통합을 위한 여러 방법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남북정상회의나 각료회의를 열어 동질화 작업을 위한 구체적인 과제를 논의하거나, 남북의 의회대표들이 통일헌법안을 마련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향하는 남측의 연합제와 주체사상에 입각해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과 건설을 추진하는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공통성이 있다고 남북 정상이 합의함으로써 통일 논의는 일대 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른 남북한의 이런 합의는 통일방안의 공통성보다는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지 않는 원칙(1991년 1월1일 김일성 주석 신년사)’과 ‘적화통일이나 흡수통일 없이 함께 공존공영하는 원칙’(2000년 6월15일 김대중 대통령 귀국인사말)’에 남북 정상이 합의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이미 시작

    ‘체제연합적 성격을 갖는 느슨한 연방제안(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밝힌 1991년 1월1일 김일성 주석의 신년사를 보면 북한의 목적지향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남조선 당국자들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자주적 입장은 확고부동하며 주체사상을 구현해 건설한 우리의 사회주의는 필승불패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밝혀 북한이 지향하는 통일국가의 이념과 체제는 주체사상이 구현된 사회주의·공산주의체제임을 분명히 했다.

    남한이 과도체제(중간단계)로 내놓은 남북연합과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목적지향이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공통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길을 가는데 중간 기착지에서 만난다고 해 같은 길을 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남북이 같은 길을 함께 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자기의 목적지를 바꾸거나 양측이 제3의 길을 가기로 합의해야 한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남북한이 각각 지향하는 이념과 체제를 포기할 의향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남북한 각각의 국가, 또는 정권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6·15남북공동선언 2항에서 남과 북이 통일방안에 관한 공통성을 인정함으로써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이미 시작됐다. 1991년 9월17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실현은 한반도에 있는 2개의 주권국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1992년 2월19일 발효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함으로써 이미 국가연합 형태의 단서를 열어놓았다. 남북기본합의서와 6·15공동선언에 따라 남북관계가 진전됨으로써 한반도 통일의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백낙청 교수는 “일회성 사건으로서 통일이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단지 한반도 분단의 특성상 전쟁이나 그에 버금가는 파국이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발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며 “한반도의 대다수 주민이 지금의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 아래 살게 되는 과정이 통일작업의 핵심이고, 그 과정이 어느 정도 지속된다면 단일형 국민국가의 선포 여부는 하나의 부수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백 교수는 또 “이런 기준으로 볼 때 한반도 통일의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면서도 “현재 진행 중인 변화가 분단체제극복의 과정이 될지 분단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안전도를 다소 높여가는 분단체제 개량의 과정일지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73~80쪽)

    6·15남북공동선언 이전의 남북한은 ‘적대적 의존관계’라는 틀 속에서 서로 상대방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내부 권력을 강화하기도 했고, 상대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찾는 ‘자폐적인 정의관(self-righteous posture)’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록 선언적이기는 하지만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대립갈등의 남북관계를 화해협력, 공존공영관계로 발전시킬 것을 약속한 것은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선언을 현실로 뒷받침해야 한다. 그러나 남과 북이 반세기 이상 지속해온 ‘적대적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호혜적 공존관계’로 발전시키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 변화 여부 논쟁, 대북지원과 관련한 ‘퍼주기’ 논란, 6·15남북공동선언 통일방안의 공통성 인정과 관련한 통일논쟁, 대북송금 관련 특검수사 등으로 ‘남북화해시대의 남남갈등’이라는 역설이 형성되기도 했다.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정에 신·구 패러다임 간에 첨예한 갈등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북쪽 사회도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 추진과 9·11테러 사태 이후의 정세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남북관계 진전에 심한 기복을 보이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구조 해체로 가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정전(停戰)질서에 기초를 둔 냉전구조를 화해협력의 평화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질서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현상변경세력’의 노력에 우려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현상유지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전통적으로 남북관계보다 한미관계를 우선시하는 분위기에서 남북 화해협력(민족공조)의 비중을 높이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다.

    화해협력정책은 대안 없는 대세

    한미공조와 남북공조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한 줄타기’와 같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정치세력의 ‘주관적 의도’가 무엇이든 정상회담 이후 나타난 ‘객관적 사실’은 남북관계 틀을 근본적으로 바꿔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남북화해협력정책은 정권을 초월한 대안 없는 대세다. 그럼에도 햇볕정책·대북포용정책·평화번영정책 등을 둘러싸고 남남갈등이 지속되는 것은 냉전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남갈등의 중심에는 국가정체성과 관련한 문제가 있다.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북한과 화해협력, 공존공영하는 데 따른 정체성 갈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과정 같지만 목적지 다른 6·15남북공동선언
    고유환

    1957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정치학)

    現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한국정치학회·한국국제정치학회·북한연구학회 이사,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자문위원

    저서 : ‘북한의 사상과 정치’(공저) ‘김정일 연구’(공저) ‘북한정치의 이해’(공저) ‘로동신문을 통해 본 북한변화’(엮음)


    주권국가의 경계를 넘어 생산과 소비 활동이 지구적 범위에서 이뤄지는 글로벌시대, 그리고 유럽연합(EU)처럼 국가간 통합이 이뤄지는 지역통합의 시대에 맞게, 또한 남북 공존공영 시대에 맞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고 이를 국가 이미지 제고에 활용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반공국가’라는 냉전시대 국가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남북관계 담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맞게 국가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 ‘선진평화국가’로서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를 확립해야 대외신인도를 높여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변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된 요인이다. 이제 남북간 체제 경쟁은 끝났다. 우리 정부는 위기관리 차원에서 북한을 관리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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