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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 구축에 희생된 북한 경제

  •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학 yhkoh@dongguk.edu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 구축에 희생된 북한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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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교수는 당에서 국가로 중심이 이전된 요인으로 제3세계와의 관계 확대에 따라 김일성을 국가원수 지위로 격상해야 한다는 의전적인 이유와 남한의 유신헌법에 대응해 남한의 대통령과 대등한 지위를 가질 필요성을 들 수도 있겠으나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정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과거엔 권력을 공고히 하고 다른 집단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당기구를 필요로 했으나 당내 유일사상체계와 김일성-김정일 지도체제를 확립한 1970년대에는 당 내부에 대해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는 것.

의식상 국가원수로 전락한 수령

1970년대 김일성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정부를 관리할 줄 아는 젊은 전문기술관료였다. 김일성의 권력이 안정됨에 따라 그에게는 당내의 혁명투사보다 정부를 이끌어 나갈 유능한 관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신헌법을 제정해 자신의 권력을 정부로 옮기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을 아들 김정일에게 넘겨주고 당을 장악케 함으로써 권력승계를 준비코자 한 데 있다(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 교수의 주장처럼 1972년 헌법 채택 당시 국가행정기관(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부가 당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당정치국과 당중앙위원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됐다고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종래의 내각을 정책지도기관과 집행기관으로 분리해 주석의 최고정책지도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한 것은 당의 결정과 정책노선을 더욱 효율적으로 전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행정집행기관인 정무원 위에 중앙인민위원회를 신설한 것은 행정부의 강화라기보다는 당의 국가기관에 대한 영도적 지위를 보장하고, 당의 행정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석제 채택 당시 김일성은 당의 영도적 역할을 유지하면서 국가기능을 활성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정일이 당권을 장악한 후 권력이 국가로부터 당으로 다시 이동하면서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은 점차 축소된 듯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일성은 ‘위대한 수령은 곧 국가주석’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태상왕’의 위치에서 ‘군림(reigning)’할 뿐이었고, 실질적인 ‘통치(ruling)’는 당권을 장악한 김정일이 중앙인민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그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해왔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4월9일 제7차 개정헌법 제113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일체의 무력을 지휘통솔한다”고 규정해, 주석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 일체를 국방위원회 위원장에게 이관했다. 그리고 1993년 4월9일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주석의 지위는 헌법적으로도 실권이 없는, 주로 외교권을 행사하는 ‘의식상의 국가원수’로 전락했다.

이와 같이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는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 함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한 국가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할 만큼 군사권은 매우 중요한 실권이다. 군사권이 없는 주석과 김정일의 공식 정치기구를 통하지 않는 측근 중심의 정책결정 등으로 주석제는 더 이상 존재의의를 찾지 못하게 됐다. 북한은 1998년 9월 개정 헌법에서 주석제를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국가수반의 지위로 격상했다.

이와 같이 주석제는 후계체제 구축에 이용돼 후계체제의 완성과 함께 그 생명을 다했다. 김정일이 죽은 수령을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고 주석제를 폐지했다는 것은 형식상 수령제(수령-당-국가체제)를 다소 완화하고 ‘당-국가체제’를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당대회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현재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중심으로 통치하는 군사 우위의 준전시적 위기관리체제인 선군(先軍)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체제에서는 권력승계에 관한 명확한 절차가 당규약이나 헌법에 명문화돼 있지 않아 권력투쟁과 정치불안의 원인이 된다. 북한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중국에서 벌어진 린뱌오(林彪)사건 등을 목격하고 후계 문제를 서둘렀다. 1969년 4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9전대회에서는 당 부주석인 린뱌오를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정하고 당규약에 명문화했다. 이것은 공산당 역사에 없는 이례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린뱌오 사건이라는 반혁명 쿠데타 사건이 일어나 이것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1973년 8월 중국공산당 10전대회의 정치보고에서 밝혀진 바로는 린뱌오는 1970년 8월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총회에서 반혁명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미수로 끝났다고 한다. 그후 린뱌오는 1971년 3월 ‘571공정’이라는 반혁명 쿠데타 계획을 세우고 9월8일 그것을 실행해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별도의 중앙위원회를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자 9월13일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도망가던 중 몽골의 운돌한이란 곳에 추락해 죽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의 진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의 ‘4인 무리(4인방)’ 사건으로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또 한 번 날카로운 투쟁이 벌어졌다(김유민, ‘후계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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