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수관 공방의 소주 주전자.
가고시마시에서 술집이 가장 많은 곳은 번화가 ‘덴몬칸(天文館)’이다. 가운데 대로를 두고 양옆으로 펼쳐진 덴몬칸은 마치 서울의 종로1가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남쪽에 있는 덴몬칸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6시경이었지만, 골목에 들어선 가게마다 네온사인과 번쩍거리는 간판을 달고 있다. 이국적인 풍경에 들떠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면서도 곳곳에 눈길을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집과 점포가 연달아 이어진 골목, 그 입구에는 이곳에서 유명한 술 회사의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다. 정말 술맛 나는 거리다.
이윽고 그가 한 술집 입구에서 나를 불렀다. 무심코 바라본 술집 간판이 재미있다. ‘쇼추텐고쿠(燒酎天國)’다. 술집 안은 일본의 여느 도시에 있는 선술집인 ‘이자카야(居酒屋)’와 비슷했다. 그러나 다른 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벽면을 온통 대개 ‘대병(大甁)’이라 부르는 술병으로 장식해놓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오자키 교수에게 저게 모두 ‘니혼슈(日本酒)’, 즉 청주(淸酒) 술병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쇼추(燒酎)’ 술병이란다. 나는 오사카 외곽인 이바라키(茨木)에서 역사가 100년이 다 된 술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집의 카운터 뒤에도 술병들이 즐비했는데, 모두 니혼슈 대병이었다. 일본 하면 니혼슈의 나라인데, 웬 ‘쇼추’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벽면에 진열된 대병들을 찬찬히 살폈다. 100여 개 되는 술병 중에는 새것도 있지만, 이른바 ‘키핑(keeping)’해 놓은 고객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했다. 술의 상표도 같은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언뜻 보아 술병의 모양이나 상표는 니혼슈 대병과 다를 바 없었다. 알코올 도수를 확인해야 그 정체가 확인될 듯싶었다. 마침내 찾아낸 알코올 도수는 모두 25%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소주의 종류만도 100여 개가 넘는다는 말인가. 도대체 여기가 일본인가 아니면 한국인가.
‘신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
보통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은 증류주(蒸溜酒)에 속한다. 중국의 바이주(白酒), 러시아의 보드카, 영국의 위스키, 프랑스의 브랜디가 모두 증류주다. 최근에야 알코올 도수가 20~30%까지 낮아졌지만, 원래 증류주는 40%가 넘었다. 증류를 하는 대상은 주로 양조주(釀造酒)다. 중국의 바이주는 쌀이나 수수로 만든 양조주인 청주나 황주(黃酒)를 먼저 만든 후, 그것을 증류하면 된다. 가오량주(高粱酒)는 그 재료가 수수라서 생긴 이름이다. 위스키는 주로 보리로 양조주인 맥주를 만든 후 그것을 증류해서 만든다. 브랜디는 포도를 원료로 만든 와인을 증류한 술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소주는 과연 증류주인가.
당연히 증류주라고 해야 옳다. 다만 시중에서 즐겨 마시는 ‘국민 대중의 술’ 소주는 온전한 증류주라고 말하기 어렵다. 상표를 자세히 살펴보면 ‘희석식 소주’라고 표시돼 있다. 도대체 무엇에 무엇을 희석했다는 것인가. 고구마나 타피오카 같은 곡물을 알코올 분해해 정제시킨 주정(酒精)에 물과 향료를 희석시킨 것이 바로 이 술이다. 주정은 그냥 마시면 너무 독해서 치명적이기에 물을 섞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정은 결코 전래의 증류 방식이 온전하게 도입된 것이 아니다. 밑술인 양조주를 굳이 만들지 않고 발효균을 원료에 넣어 기계에서 연속으로 증류시켜 만든다. 당연히 양조주가 지닌 원래의 독특한 향기도 주정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