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호

수치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몸의 기억

결국 몸은 마음이기에…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03-06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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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과 돈을 주고받았을 뿐이라며 섹스를 혐오하던 소녀는 떠나는 배에서 드뷔시의 곡을 들으며 뒤늦게 사랑을 깨닫는다(‘연인’). 엘리자베스는 금지된 욕망을 자극하는 남자에게 빠지지만, 일탈만으로는 사랑의 갈망을 채우지 못함을 깨닫고 떠난다(‘나인 하프 위크’). 남편이 팔아넘긴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되찾는 조건으로 낯선 남자에게 몸을 내주던 에이다는 ‘피아노를 줄 테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자발적으로 찾아가 격렬한 섹스를 나눈다. 끝내는 남편을 떠나 그 남자 품에 안긴다(‘피아노’). 여자, 몸 그리고 사랑. 여기에는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함수가 놓여 있다.
    수치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몸의 기억

    부자 중국인 남자와 가난한 프랑스 소녀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연인’.

    사랑하고 싶을 때 / 내 몸에 가시가 돋아난다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은빛 가시가 돋아나 / 나를 찌르고 내가 껴안는 사람을 찌른다

    남진우의 시 ‘어느 사랑의 기록’은 이런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한다 말하면 될 것을 가시 돋친 비난이 먼저 다가간다. 미안하다, 말 한마디면 될 것을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 지나고 나면 후회할 것을 그 순간에는 모른다. 모든 사랑이 그렇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마치 상처로 사랑의 인장을 남기려는 사람들처럼 열심이다.

    언젠가 김영하는 자신의 산문집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자에게 결코 잊히지 않는 남자가 되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변태를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을 선물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우스꽝스럽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여자는 몸에 남은 기억을 증오한다. 하지만 또 영원히 그 기억을 사랑한다. 여자는 몸으로 배우는 기억을 수치스러워한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만큼 강렬히 그 기억을 원한다. 몸은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다. 몸으로 배우는 사랑은 여성에게 그것이 모순으로 이뤄진 감각의 아이러니임을 깨닫게 해준다. 강렬히 원하지만 원하지 않고 너무도 부끄럽지만 또한 소중하다. 그래서 때로 몸에 각인된 사랑은 뒤늦게 심장에 침전한다.

    문제는 사랑의 체감이 너무도 늦게 다가올 때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한 채 육체의 황홀경만을 탐닉할 때, 사랑은 황폐해진다. 그리고 상처와 황폐함을 남긴 그 육체가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 황홀경은 회한이 되어 인생에 얼룩을 남긴다. 볼 때마다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참혹한 황홀경의 순간들, 여기 두 쌍의 연인이 그렇다.



    욕망보다 늦게 도착한 사랑 ‘연인’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반도.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형편없이 무너진 나라인 중국의 남자는 부유하다. 부유한 남자는 하얀색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화려한 세단 승용차에서 세상을 내다본다. 그런데 프랑스 소녀는 다르다. 프랑스인이라면 결코 가지 않는 학교에 다니며 대부분의 프랑스인과는 달리 제대로 된 옷 하나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도발적인 눈빛 하나. 이 기묘한 커플은 영화 ‘연인’의 주인공이다.

    장 자크 아노의 작품 ‘연인’(1991)은 영화보다 먼저 포스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소녀는 양 갈래 머리에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눈빛은 부끄러운 듯 도발적이다. 도발성은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아직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모험심을 포함하고 있다. 양 갈래 머리의 순결함과 루즈를 억지로 바른 듯한 입술의 덜 익은 요염함, 포스터 속 소녀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인’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에로틱하면서도 슬픈 사랑 영화 중 하나다. 툴롱을 오가는 선상에서 소녀는 한 남자와 만난다. 최신 유행 의상을 입기에 턱없이 가난한 소녀는 남자들이 쓰는 모자에 잠옷을 걸치고 삐딱하게 입술을 칠한 채 서 있다. 세련된 파리지엔처럼 보이고 싶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 중국 부호의 아들인 남자는 남루한 옷을 입은 초라한 소녀를 차에 태운다.

    ‘연인’에서 내가 가장 에로틱하게 느낀 장면은 이것이다. 소녀의 기숙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남자(양가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잡는다. 남자는 1㎝ 정도씩 손가락을 움직여 마침내 소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차 안의 공기는 1도씩 달아오르는 듯하다. 검지와 검지를 마주 잡을 때 숨결이 빨라지고 중지와 중지를 엮었을 때 뜨거운 숨이 토해져 나온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감각은 온통 손가락에 집중돼 있다. 그들의 정염은 손가락을 매개로 증폭되어간다. 옷 하나 벗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깊숙한 곳까지 탐하고 있음을 교감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원하고 있다, 라는 감정 자체로 차 안을 뜨겁게 달군다. 그들이 마주 잡은 손은 그 어떤 남녀의 얽힘보다 강렬한 열망으로 충만해 있다. 이 사소한 움직임은 영화 ‘연인’이 지닌 품격 있는 에로스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1㎝씩 다가가는 손가락

    남자와 소녀의 마주 잡은 손에는 간단히 발화하고 소진되는 욕망이 아닌, 쉽게 폭발할 수 없는 감정의 잉여물이 남아 있다. 섹스가 욕망의 발산이라면 그들의 행위는 체온을 통해 욕망을 가열하는 애태움으로 긴장되어 있다. 두 사람이 온몸을 드러내고 섹스를 하는 장면들이 오히려 노골적인 야유로 받아들여진 이유도 여기서 비롯됐을 터다.

    그들은 자신을 충만하게 한 에로스를 섹스라는 행위로 탕진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랑하지만 서로에게 원하는 것은 그저 몸과 돈뿐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소녀는 남자를 모욕하고, 남자는 소녀를 훼손한다. 그들은 그들이 나누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의 슬픔은 이 무지 때문에 깊어진다. 소녀는 냄새 나는 중국인 부호에게 자신이 유린당했다고 여기고 매몰차게 그를 떠난다. 프랑스로 떠나는 그녀를 남자는 멀리서 바라본다. 카메라는 고급 승용차 안에 모습을 감춘 남자를 원거리에서 비춘다. 남자는 울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카메라의 시선은 멀리서 그들의 에로스가 시작됐던 차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관객도 모르지만 소녀도 마찬가지다. 소녀는 그가 타고 있을 것이 분명한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어설펐던 젊음의 한때, 가난한 소녀의 수치스러운 반항과 결별하듯 자동차의 잔영을 지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프랑스로 돌아가던 배 안에서 소녀는 드뷔시의 ‘달빛’ 연주를 듣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 소녀는 그때서야 깨닫는다. 정염이고 욕심이고 호기심이자 욕망이라고 생각하던 그 사람과의 관계가 사랑이었음을. 그 사람과의 섹스를 혐오하는 만큼 그 사람의 몸을 사랑했음을. 소녀는 그때서야 그 모든 것이 사랑임을 깨닫고 흐느껴 운다.

    사랑은 그렇게 욕망보다 늦게 온다. 뜨거운 감정의 부유물이 가라앉고 나서야 사랑은 말갛게 떠오른다. 조용하면서도 격정적인 드뷔시의 선율은 그녀의 울음과 함께 감정의 진폭을 넓힌다. 욕망보다 늦게 도착한 사랑은 곧잘 후회와 겹쳐지곤 한다. ‘연인’은 그래서 사랑에 관한 아프고도 성숙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위험하고 지독한 도발의 끝 ‘나인 하프 위크’

    남자는 여자가 생애 경험하지 못한 일탈을 선물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도둑질을 하라고 말하고, 남장(男裝)을 하라고 요구한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섹스를 하자고 유혹하며 자신을 생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게다가 남자는 부유하고 섹시하다.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게 남자는 요구한다. 남자는 여자가 한번쯤 저질러보고 싶었던 나쁜 짓의 목록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는 듯 나타나 여자를 자극한다. ‘나인 하프 위크’의 미키 루크가 바로 그 남자다.

    ‘나인 하프 위크’에 등장하는 남자는 모든 여자가 꿈꾸는 나쁜 남자다. 나쁜 남자는 일상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않다. 그는 밥 먹고 자고 일어나 일하고 다시 잠드는 일상적 삶의 궤도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문제는 이 남자에게는 일상적인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자에게 남자는 짜릿한 일탈이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의 박탈이기도 하다. 너무도 강렬한 매혹이지만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남자. ‘나인 하프 위크’가 가르쳐준 욕망은 그렇게 끝난다.

    ‘나인 하프 위크’는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라는 1980년대의 대표적 섹스 심벌을 탄생시킨 작품이다. 여러 광고에 패러디되고 막 성에 눈뜨기 시작할 무렵 판타지의 근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냉장고 앞에서 연인의 눈을 가리고 음식을 먹여준다거나 연인 앞에서 둘만의 스트립쇼를 연출하는 것, ‘나인 하프 위크’는 연인들이 둘만이 가지고 싶은 섹시한 비밀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작품이다.

    수치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몸의 기억

    1980년대 대표적 에로영화인 ‘나인 하프 위크’는 위험과 일탈에 중독된 사랑을 그렸다.

    ‘나인 하프 위크’는 1980년대의 대표적 에로 영화로 기억되지만, 그 의미는 사뭇 복잡하다. 이 작품이 말하는 것은 관능성과 육체, 그리고 사랑의 알 수 없는 함수 관계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순간 가장 강렬히 끓어오르는 열망은 그 사람과 접촉하고 싶다는 것이다. 접촉은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과 다르지 않다. 내 미각, 촉각, 청각과 당신이 지닌 감각의 주파수를 맞추고 싶어 하는 행위, 그것이 곧 접촉이다.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주식 중개인 존과 만나게 된다. 나빠지고 싶었던 여자 엘리자베스는 나쁜 세계로 성큼성큼 안내하는 존에게 빠져든다.

    둘은 마치 모험을 하듯 서로의 육체에 빠져들어 관능의 한계를 넘어선다. 무료하던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안전한 일탈을 감행한다. 하지만 무릇 일탈이란 사랑으로 인해 가능한 외계일 뿐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탈과 모험이 짜릿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때 사랑이란 단어는 무색해진다.

    섹스와 일탈만으로 충만한 9주 반

    존의 제안은 대부분 위험하지만 매력적이다.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일상은 없고 일탈만 있는 존으로부터 달아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결코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남자는 위험과 일탈에 중독되어 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그’와 일탈하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그저 어떤 여자와 ‘일탈’을 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마침내 여자는 남자의 제안을 거부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기간이 9주 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개념으로 바꾼다면 두 달 남짓, 정서상 백일 무렵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법하다. 9주 반이라는 시간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지탱 가능하다.

    그는 나에게 완전한 타자이므로 9주 반 동안 그는 매일 새로운 상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9주 반 동안의 시간은 섹스와 욕망, 일탈과 충동만으로도 충만할 수 있다. 하지만 10주쯤이면, 그러니까 호기심이 관계로 바뀔 즈음이면 일탈은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리자베스는 군중 속에 섞여 사라진다. 그리고 존은 계단에 걸터앉아 그녀가 50을 세기 전에 되돌아올 것이라며 읊조린다. 그것은 독백이라기보다는 간절한 바람이며 주문에 가깝다. 어떤 점에서, 옷장 속에 똑같은 옷만 수십 벌 걸어놓고 있는 존은 모험과 일탈을 사랑의 동의어로 착각하는 현대인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섹스를 사랑으로, 일탈을 일상으로 바꾸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애에 불과할 수도 있다. 호기심이 관심으로 바뀌는 시간, 그는 9주 반을 견디지 못한다. 9주 반, 몸에 대한 호기심으로 버틸 수 있는 관계의 유효기간이다.

    결국 몸은 마음이기에 ‘피아노’

    제인 캠피온 감독의 작품 ‘피아노’는 사랑에 빠진 여성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드라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말이다. 베인스(하비 키이틀)와 섹스를 하고 난 후 집에 돌아 온 에이다(홀리 헌터)는 침대 위에 누워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다. 왼쪽으로 누웠다, 돌아누웠다, 고개를 들거나 내리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그녀의 행동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가 거울을 통해 보는 자신은 누구의 시선일까? 그 시선이 바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것, 그 눈빛이다. 그러니까 에이다는 사랑하는 남자, 베인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쳤을지 상상한 셈이다.

    ‘피아노’는 여성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대조적인 접근법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는 남편, 스튜어트(샘 닐)의 방법이다. 스튜어트는 남편이라는 이유로 자기 마음대로 그녀를 움직이려 한다.

    물론 억압적인 방식으로 그녀에게 횡포를 부린다거나 가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그저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예 언어나 내면, 욕망 따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않는다. 너무도 당연히, 그는 에이다에게 피아노가 어떤 의미인지, 그녀가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관심이 없다.

    수치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몸의 기억

    ‘피아노’에서 에이다(오른쪽)는 피아노를 버리고 ‘몸’을 얻는다.

    한밤중 에이다는 피아노를 치며 잠꼬대를 한다. 그녀의 딸은 그녀가 혼몽 중에 연주하는 피아노곡을 몽유병이라고 설명해준다. 이 장면은 피아노가 곧 에이다의 언어이자 언어로 빚어진 영혼임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남편은 피아노를 내다 버린다. 같이 잠자고, 밥 먹고, 섹스하는 파트너를 필요로 하는 남자 스튜어트에게 에이다는 돌아보면 놓여 있는 가구처럼 그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지 못하는 가구로 여겼던 그녀가 집을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남편이 버린 피아노를 비싼값에 사준 남자, 베인스를 찾아간다. 그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그녀의 영혼을 읽어내고 감정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여자를 안는다. 베인스는 에이다의 언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후 에이다의 몸을 탐닉한다. 그녀의 피아노 소리를 궁금해하듯 그녀의 몸을 궁금해하고 그녀가 내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이상 연주하고 싶지 않은 피아노

    베인스는 에이다에게 피아노 건반 하나를 줄 테니 그때마다 자신에게 몸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한다. 에이다는 자신이 그저 피아노를 치기 위해 베인스를 찾아간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피아노뿐이라고 여긴다. 어느 날 베인스로부터 피아노를 줄 테니 이젠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피아노를 갖게 됐는데,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지 않다. 원하는 것은 피아노라고 여겼지만 실상 그녀는 피아노만큼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이다는 그를 찾아가 그와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그가 사랑을 살 수 없음을 자인하는 순간 그녀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그를 원해서 찾아가고 그의 몸을 갈망한다.

    이제 에이다는 언어와 욕망을 가진 여자로 거듭난다. 베인스를 찾아 나서 섹스를 나누게 되자 에이다는 남편의 몸을 거부한다. 남편은 자신의 소유물이던 여자가 욕망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사용하자 극렬하게 분노한다.

    영화 속에서 변주되는 샤를르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은 스튜어트의 감정이 소유욕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스튜어트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단지 독점하고자 했기에 그녀를 괴롭히고 상처 입힌다. 스튜어트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에이다의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낸다. 에이다는 결국 손가락 하나를 잃고 베인스를 얻는다. 그의 체온을 통해 자신을 되찾은 셈이다.

    영화 ‘피아노’는 남자에게 여자란 다른 언어를 지닌 수수께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는 소유하고자 하는 남자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자 모순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마치 말 못하는 여자의 심리를 이해하듯 그녀를 바라볼 때, 그녀 스스로 해답이 되어준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영화가 건네는 마지막 충고다. 아마도 그 충고는 여성 자신에게 던지는 것일 테다. 에이다는 마침내 스튜어트로부터 벗어나 베인스와 함께 떠난다.

    수치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몸의 기억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고려대·극동대 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종합예술대 강사


    에이다는 좁은 배에 피아노를 싣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급기야 피아노와 함께 바다 깊숙이 빠지고 만다. 에이다는 피아노에 발이 묶여 빠졌다기보다는 피아노에 발을 묶는다. 그녀는 피아노와 함께 바다 깊이 가라앉지만 마침내 스스로 피아노를 버리고 베인스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사랑은 자신의 언어를 이해해주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자신의 언어를 버리는 데서 완성된다. 만일 끝까지 피아노를 고집했더라면 에이다는 물속에 피아노와 함께 빠져 죽고 말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를 자신만의 세계로부터 끌어낸 것이 바로 ‘몸’이었다는 사실이다. 몸은 신비한 사랑의 매개이며 한편으로는 덫이기도 하다. 여자, 몸 그리고 사랑. 여기에는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함수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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