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호

과기부 해체! 기로에 선 과학기술계

“과학-기술 분리는 난센스, ‘성장동력 진공시대’ 올 수도”

  • 황의봉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eb8610@donga.com

    입력2008-03-10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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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박 정권의 정부조직 개편으로 교육과학부와 지식경제부, 기획재정부로 쪼개진 과기부. 이런 중대한 사안의 논의과정에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국의 과학기술행정 시스템이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것’이라는 OECD의 진단보고서와는 정반대로 과기부를 해체한 이유는 무엇인가.용광로처럼 들끓는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았다.
    과기부 해체!  기로에 선 과학기술계
    “지금은 과학과 기술이 융합돼 분리할 수 없는 시대다. 정치나 행정을 맡은 사람들은 1970년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채영복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과학기술계의 문제제기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국가발전의 밑그림이 잘못됐기 때문이다.”(김정구 한국물리학회 회장·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과학기술부 해체라니, 인수위가 첫 단추를 잘못 꿴 것 같다. 그동안 과학계가 제 목소리를 못 냈는데 오늘 이렇게 뭉쳤다는 게 의미 있는 일이다.”(전길자 여과총 차기회장·이화여대 화학과 교수).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월5일 서울 과총회관. 9개 과학기술단체 공동기자회견장에 나온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놓은 과학기술부 해체안(案)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설 연휴 직전에 과학계 대표들이 긴급 기자회견을 연 것은 그만큼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설 연휴기간 여야협상을 통해 과학기술부 해체가 기정사실화될 것을 우려해 마지막으로 정치권과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과기부 해체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한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표(票) 심판론’까지 나왔다. 이헌구 과학기술한림원장은 “만약 정치인들이 표만 의식해 과학기술을 희생시키는 협상을 타결한다면 500만 과학기술인이 그에 상응하는 의사표명을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직 낙선운동을 결정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과기부를 해체하는 데 합의한 국회의원들을 응징하겠다는 결의가 담긴 것으로 읽혔다.

    지난 1월16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과기부 해체가 포함된 정부조직법개정안을 발표한 후 과학기술계는 연일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쏟아냈다.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를 비롯한 각종 과학단체들과 정부출연 연구기관, 대한수학회 한국물리학회 등 각 학회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계의 거의 모든 단체가 반대성명 대열에 합세했다.

    또 1월31일에는 역대 과학기술부 장관 들이 인수위를 방문해 “40년 만에 이룩한 과학기술행정체제 기반을 허물면 우리나라의 첨단기술 개발역량도 무너진다”며 결의문을 전달했다. 그동안 다른 분야에 비해 점잖다는 평을 들어온 과학기술계가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과기부, 헤쳐모여!

    한국 과학기술계를 일시에 대혼란에 빠뜨린 과기부 해체안의 골자는 △과기부를 해체해 그 기능을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교육과학부로 분산시키고 △과학기술정책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사무국 역할을 해온 과기부 과학기술혁신본부의 국가 R&D(연구개발)사업 기획·평가업무와 예산 배분권을 기획재정부로 이관하고 △산업기술 개발업무와 원자력발전 등의 업무를 지식경제부로 이관하고 △기초과학 육성업무와 고급인력 양성업무를 교육과학부로 이관하는 것 등이다.

    이 같은 과기부 기능분산에 따라 20여개 정부출연연구기관도 기초과학과 산업기술 분야로 나눠 각각 교육과학부와 지식경제부에서 관할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과기부의 기존영역을 과학과 기술로 나눠 과학은 교육부와, 기술은 산자부와 합쳐 새로운 부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과기부 해체!  기로에 선 과학기술계

    설 연휴 전날 긴급히 마련된 공동 기자회견에서 과학계 원로들이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인수위의 과기부 해체안은 과학기술계의 반발과 여야협상을 거치면서 내용이 다소 바뀔 전망이다. 우선 명칭을 교육과학부 대신 교육과학기술부로 수정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분리가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반론에 인수위측이 한발 물러섰고, 이에 따라 명칭에 ‘기술’을 추가하기로 했다는 것. 그러나 정부조직법 개정을 둘러싼 여야협상이 마무리돼야 명칭도 확정될 전망이다.

    혁신본부의 폐지로 유명무실해질 위기에 처했던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이하 국과위)도 되살아났다. 기획재정부에 R&D 예산조정과 평가 기능을 넘겨주는 대신 교육과학부에 과학기술정책조정국을 만들어 국과위의 국가R&D사업을 종합적으로 기획조정하는 사무국 역할을 맡게 하는 것으로 낙착됐다.

    과기부 산하 정부출연연구소는 인수위 안대로 두 분야로 쪼개 지식경제부와 교육과학부에서 관할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원자력발전 업무를 다시 교육과학부로 가져오게 된다. 결국 과기부 업무가 세 군데로 완전 분산될 처지에서 일부 기능이나마 교육과학부로 더 가져오는 쪽으로 정리되는 모양새다.

    과학기술계 안팎에서는 정부조직 개편안이 이 같은 큰 틀에서 확정된다고 해도 과기부 산하 관련단체들의 관할문제와 구체적인 업무분장 등을 놓고 앞으로 상당기간 진통이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과기부와 교육부의 ‘동거생활’에 많은 문제점이 터져 나올 것이라며 우려를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실용주의에 밀린 과학기술

    인수위가 과학기술부 해체라는 예상외의 강수를 내놓은 배경에 대해 과학계는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이명박 당선자의 ‘경제 살리기’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더욱 중시해야 하는 터에 주무부처의 해체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수위 측은 언론에 발표된 과기부 해체방안에 대해 구체적인 배경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과학기술부가 비효율적이고 시대적 역할이 끝났다’ ‘선진국에 과학기술부가 없으며 부총리 체제도 불필요한 거품이다’라는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와 인수위의 과기부에 대한 기본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인수위 사회교육문화분과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김창경 교수(한양대 신소재공학)는 “과학과 기술을 분리하려 한다는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함구령이 내려 말하지 않겠다”며 “그동안 혁신본부의 역할이 맞았는지, 효과가 있었는지 현장 연구원들에게 물어봐라”고 말했다. 과기부를 관할하는 인수위 경제2분과 소속은 아니지만 과기부 개편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 교수의 이 같은 지적은 참여정부 과학정책의 핵심기구였던 혁신본부의 역할 등 기존시스템에 대한 인수위 측의 불신감이 만만치 않음을 시사한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참여정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깊은 데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새 정부의 경제논리에 힘없는 과기부가 당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경제학자들이 인수위를 주도하다 보니 인풋과 아웃풋이라는 경제논리로 과학기술행정을 들여다보게 되고, 그 결과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조직개편으로 몰아갔다.”(유장열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부장)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바꾸자는 것으로 본다. 그동안의 연구내용이 산업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기업의 불만이 당선자 측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박종구 KIST 나노과학본부장)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실용주의 혹은 비즈니스 중시 마인드가 과기부의 해체를 불러왔다는 분석도 있다. 기술개발이 곧바로 산업현장으로 연결돼 비즈니스화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과기부체제보다는 지식경제부(산자부)가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상당부분을 지식경제부로 넘기겠다는 인수위안은 이 같은 이 당선자의 마인드에 충실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성과를 경제논리로만 재단하는 것에 대해 과학기술계가 방어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점이라고 관련인사들은 주장한다. 실제로 인수위원회에 과학기술계 인사는 거의 배제돼 있다. 과기부 개편문제를 다룬 경제2분과의 경우 인수위원과 전문위원 가운데 과기부를 대변할 사람은 전무하다.

    인수위원으로 건교부 출신이, 전문위원으로 산자부 정통부 건교부 농림부 해수부 출신이 포진한 것에 비하면 과기부는 완벽하게 배제된 형국이다. 과학계 인사들은 과기부 해체라는 중대한 사안을 놓고 과기부나 과학기술 분야의 학회와 연구기관은 물론 과학자의 의견을 반영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며 허탈해하고 있다.

    세계 7위의 과학기술 수준

    과기부 해체!  기로에 선 과학기술계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실험실. 과기부 해체로 출연연구소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과기부 해체에 대해 과학기술계는 압도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다. 무엇보다도 인수위의 상황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평소 과학교육을 비롯한 전반적인 문제에 활발한 의견개진을 해온 서강대 이덕환 교수(화학)는 “과기부와 같은 미래형 첨단부처를 해체하는 것은 새 정부가 추구하는 창조적 실용주의를 통한 선진화와 국격(國格) 향상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지난 40년 동안의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덕분에 오늘날의 R&D 인프라를 갖추게 됐고, 이제 우리 과학기술이 초기의 모방단계에서 벗어나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창조적 산업화 기술단계로 진입하려는 순간 과기부를 없앤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황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성공이 불확실한 과학기술 R&D 투자보다는 CDMA 기술과 같은 선진국의 원천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일부의 인식은 상황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과거 우리 경제력이 세계 15~20위권에 머물렀을 때는 외국에서 원천기술을 도입하는 게 가능했지만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진입하려는 한국에 누가 원천기술을 팔겠느냐”고 반문했다. 지금의 우리 처지는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스스로 필요한 원천기술을 개발해야지 그러지 못하면 치열한 무한경쟁에서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투자를 단순한 경제적 효율성 차원이 아닌 장기적인 국가비전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논리다.

    과학기술계가 비효율적이라는 일부의 인식과는 달리 한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은 국제적으로 크게 강화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경제포럼(WEF)이 2007년 10월말 발표한 ‘2007~2008년 국가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31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11위를 차지했으며, 과학기술수준에서는 7위에 올랐다.

    또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원(IMD)도 지난해 한국이 과학경쟁력 7위, 기술경쟁력 6위를 차지, 각각 2002년의 14위와 17위에 비해 크게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2006년에는 미국 랜드연구소가 한국을 미국 독일 등과 함께 과학선진국 그룹 7개국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과학연구논문을 평가하는 SCI 논문발표 규모는 연간 2만4000건으로 세계 11위 수준.

    한국의 과학기술력이 국제적으로 크게 도약했다는 객관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데는 막대한 투입예산에 비해 산출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연구개발투자의 효과가 미미하다는 일부 비판적 시각에 대해 생명공학연구원의 유장열 선임연구부장은 “지난해 우리 연구원의 기술이전료가 76억원으로 그 전해의 25억원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올해는 1월에만 10억원이 넘었다. 그간 축적된 기술개발의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부장은 “연구원 설립 20년이 넘으면서 기술이전 수입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다른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라며 비효율 시비에 반론을 제기했다.

    우리나라의 총 연구개발비는 2003년 19조1000여억원(GDP 2.63%)에서 2006년 27조3000여억원(GDP 3.23%)으로 늘어나 세계 7위 수준이다. 이 가운데 정부 연구개발비는 2003년 6조5000여억원에서 2008년 10조8000여억원에 달해, 참여정부 5년간 10% 안팎으로 늘어났다.

    혁신본부 시스템은 무죄

    과기부 해체!  기로에 선 과학기술계

    2004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무려 10조원이 넘는 정부의 R&D 예산을 총괄 기획·조정하는 곳이 2004년 10월에 설치된 과학기술혁신본부다. 과기부에 속해 있으면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사무국 역할을 맡고 있다. 대통령이 위원장, 과기부총리가 부위원장을 맡고 13개 부처 장관 및 관련 전문가들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국과위의 손발 역할을 하는 곳이자 참여정부가 구축한 과학기술혁신시스템의 상징적인 기구인 셈이다.

    혁신본부는 정부 각 부처에서 추진하는 연구개발사업을 종합적으로 조율하고, 이에 따른 예산배분작업을 하고 있다. 각 부처의 연구개발예산은 기획예산처에서 최종 확정하지만 혁신본부에서 사전 조정 작업을 하기 때문에 국가연구개발사업의 효율적인 추진에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참여정부는 외국 사례에도 없는 독특한 존재인 혁신본부를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발족했다.

    과학기술계 내부에선 과기부 해체의 주요 배경을 혁신본부에 대한 인수위의 부정적 인식에서 찾는 시각이 적지 않다. ‘혁신본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R&D투자의 비효율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혁신본부가 부처 간 중복투자를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고 평가절차 등이 복잡해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박종구 KIST 나노과학연구본부장은 “각 부처가 흔쾌히 혁신본부에 협조하면 매끄럽게 해결될 수 있을 텐데, 이런 방향으로 유도하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산자부와 정통부에서 로봇을 개발한다고 각기 나섰지만 역할 분담과 조정이 잘 안돼 지금도 두 군데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혁신본부의 기능에 불만을 나타냈다.

    과기부 측은 혁신본부 비판론에 대해 오히려 혁신본부 출범 이후 부처 간 중복투자문제를 상당부분 해소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2003년 차세대 성장동력사업 추진을 둘러싸고 산자부, 과기부, 정통부가 8개월이나 진통을 겪었으나 2004년 이후에는 혁신본부의 부처 간 기능조정으로 중복문제를 상당부분 해소했다는 주장이다.

    과기부의 이상목 기초연구국장은 혁신본부 논란에 대해 “시스템 자체는 이상적이다. 초기에 일부 중복투자를 조정 못한 사례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정이 원활치 못했던 사례로 정통부와 산자부 간의 로봇개발, 과기부 산자부 정통부 간의 나노기술개발을 들었다. 이 국장은 “아무리 중복투자를 못하게 말려도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삭제한 예산을 살려내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며 “이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일부 부정적인 평가에도 과학계의 일반 정서는 혁신본부 체제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덕환 교수는 “혁신본부는 과기부에 설치됐지만 범부처적 성격을 지닌 곳이다. KIST 연구예산의 70%가 산자부에서 오고, 해양연구소의 남극 연구비도 상당부분 해수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처럼 모든 부처가 혁신본부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커다란 장점”이라며 “본격적으로 운영한 지 3년밖에 안된 혁신본부를 평가하기에는 이르다”고 강조했다.

    OECD “조직개편 신중해라”

    참여정부의 혁신본부 시스템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 최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내놓은 보고서가 주목을 받고 있다. 장 귀네 OECD 진단팀장은 지난 1월23일 발표한 한국 과학기술혁신체계(NIS)진단 중간보고에서 “한국의 과학기술부총리 체제가 OECD회원국 중에서 가장 선진화된 시스템으로 평가된다”고 언급하고 “과기부총리 및 혁신본부를 통해 과학기술혁신 주장이 단일화되고 강력해졌으며, 과학기술 관련 예산을 배분 조정함으로써 예산확대 및 전문성과 신뢰성이 제고됐다. 다만 독자적인 예산 배분권이 없어 조정역할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인수위의 인식과는 달리 ‘혁신본부 강화론’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과기부 해체!  기로에 선 과학기술계

    2006년 2월 과천정부청사에서 새로 만든 과학기술부 현판의 제막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에 과기부는 없다.

    OECD 보고서는 또 “최근 기술무역의 적자규모는 확대되고 있으나, 기술무역 수출증가량이 수입증가량에 비해 약 4배 가량 높아 이 추세대로라면 한국은 2~3년 내에 기술수출국으로 도약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5월부터 1년간에 걸쳐 진행될 OECD의 진단작업 중간보고는 논란이 되고 있는 과기부 해체와 관련 “한국의 현 체제는 꾸준한 개선을 통해 발전해온 만큼 조직개편은 현 체제의 성과와 신체제의 장점을 고려하면서 신중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현재 과학기술부총리 체제의 장점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해 과학기술계의 과기부 해체 반대론에 힘을 실었다.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과기부가 해체되고 그에 따라 혁신본부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11조원 규모의 국가R&D사업을 중앙정부가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국가R&D 규모가 우리의 20배 수준이어서 중앙집중형 관리가 불가능하지만 아직도 R&D 예산과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 형편에서는 효율적이고도 전문적인 관리기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혁신본부 설치 이전처럼 각 부처가 독자적으로 연구개발 예산을 확보,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과학 따로 기술 따로

    과학기술부를 해체해 기초과학분야만 교육부와 합치고, 응용기술분야는 산자부에 넘긴다는 인수위 안이 발표됐을 때 가장 강력하게 대두된 반대논리가 바로 ‘과학’과 ‘기술’의 분리 불가론이다.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 및 뇌공학)는 “21세기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기술자들은 분야의 경계, 과학과 기술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로봇공학의 핵심기술들은 신경과학을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이론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가장 기초적인 과학이 기술의 최전선과 맞닿아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기부 폐지안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학과 기술을 쪼개 관리하는 시스템이며 과학에서 공학까지 체계적인 지원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서남표 KAIST 총장도 “21세기 지식산업시대에는 과학과 기술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고 분리할 수도 없다”라는 지론을 폈다. 서 총장은 여러 차례 과학과 기술의 동시 연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집적회로(IC)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개발자의 창의력, 호기심, 상상력과 관련분야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IC가 기술제품이지만 새로운 IC 개발자가 노벨상을 받는 것도 이 같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서만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과학자가 인간 게놈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과학지식뿐만 아니라 고성능 첨단실험장비 같은 기술적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을 동시에 연구하는 MIT, IBM연구소, JPL(Jet Propulsion Labora- tory) 같은 연구기관들이 과학기술뿐 아니라 경제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18인의 과기부 역대장관도 결의문에서 과학과 기술의 분리에 대해 ‘무지의 소산’이라며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과학 따로 기술 따로는 시대적 추세에도 역행하고, 그간 쌓아온 과학기술 역량과 기반을 심하게 훼손시킬 것”이라며 “세계 어느 곳에도 과학정책과 기술정책을 분리하는 나라는 없으며, 이론적 근거가 전혀 없는 탁상공론의 전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문제와 관련, 정부의 유연한 운영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다. 박종구 KIST 나노과학연구본부장은 “과학과 기술의 분리라는 게 말이 그렇지 실제로 그렇게 되겠나. 이 부처는 과학만 하고, 저 부처는 기술만 할 수는 없다. 정부 부처 간 조율이 문제라고 본다. 얼마나 유연하게 운영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기초과학과 산업기술을 담당하는 부처가 다를 경우 양자가 얼마나 순발력 있게 조화를 이루고 협조체제를 가동하느냐가 중요한데, 이 부분에서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우리나라처럼 관료사회 내부의 장벽이 높은 분위기에서는 상당한 차질이 예상된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과학기술부총리마저 없어지면 부처간 시스템 플레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교육+과학, 일본은 실패

    해체된 과기부와 교육부, 산자부가 합쳐져 발족될 교육과학부 및 지식경제부가 과연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교육과학부 체제에선 무엇보다 교육현안에 밀려 과학이 소외될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서강대 이덕환 교수는 “교육부의 초·중등교육을 지자체에 넘기고, 대학입시를 대학자율에 맡기면 남는 것은 고급인재 양성뿐이므로 과기부의 기초과학 업무를 그냥 가져다 붙이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부터가 잘못됐다”면서 그 문제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교육부의 행정수요가 절대로 줄지 않을 것이므로 교육과학부 장관은 당장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교육현안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자연히 과학은 뒷전에 처지게 된다. 제도적으로는 초중등학교 예산권, 교사임면권, 교육과정 운영권, 학생선발권 등이 이미 10년 전에 시도교육청으로 넘어갔지만 현실적으로는 초등학생 체벌이나 폭행문제만 터져도 당장 교육부의 현안이 돼버리는 실정이다. 대학자율화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에만 맡겨놓을 경우 편입학 비리 등이 더욱 활개를 칠 것이기 때문에 교육부가 간여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과기부의 인재양성과 교육부의 인재양성은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했다. 과기부는 이공계 인재양성이지만 교육부로 가면 인문 사회 예술 등 모든 분야의 인재양성에 관심을 쏟아야 하므로 이공계 투자만 늘릴 수 없다. 그렇다고 대학에 이공계 인재양성을 맡겨놓으면 대학들이 돈 들어가는 이공계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 즉 이공계 인재양성은 과기부 같은 별도의 부처에서 해야 제대로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논리다. KAIST 같은 이공계 우수대학을 육성한 것도 과기부에서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울대 이병기 교수(전기공학)도 교육과학부가 교육수요로 인해 과학 분야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인수위에서 초등학교부터 영어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것만 보아도 초중등교육을 지자체에 넘기겠다는 것은 말뿐임을 알 수 있다. 또 로스쿨 허가문제로 대학들이 난리인데, 로스쿨이 본궤도에 오르기까지 상당기간 교육과학부가 이 문제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교육과학부의 ‘한 지붕 두 가족’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일본의 생생한 사례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지난 2001년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이 합쳐 문부과학성이 됐으나 결과는 실패로 기우는 분위기다. 당시 두 부처의 유일한 연결고리가 고급인재 양성뿐이었기 때문에 양자간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문부과학성으로 개편되면서 강력히 추진한 교육재생사업도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초중등교육을 완전히 개혁하겠다는 ‘유토리(餘裕)교육’이 그 대표적 실패사례다.

    일본 문부과학성 관계자의 증언도 과학기술계의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

    “2001년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이 통합된 문부과학성은 전혀 통합의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장관이 갖가지 현안이 많은 교육행정에 90% 정도의 업무를 할애하는 반면, 미래지향적인 과학기술행정에는 10% 정도밖에 할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주한 일본대사관 이와부치 과학관).

    “장관 업무의 90%가 교육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문부과학성 장관을 역임한 현 마치무라 노부다카 관방장관).

    지식경제부 체제의 문제점

    지식경제부가 과기부의 R&D 기능을 떠맡을 때 대두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WTO(세계무역기구) 규정에 저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 WTO체제하에서 정부가 기업의 산업기술 개발에 직접 R&D 자금을 지원할 경우, 보조금으로 간주돼 상계관세가 부과된다. 2001년 미국 마이크론사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제소한 이유도 이들 기업이 한국정부 보조금으로 저가의 D램을 미국시장에 공급했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이덕환 교수는 “지금까지 과기부가 제품화 기술개발에 관여하지 않고, 기초기술과 원천기술만 지원하는 것으로 정부방침을 천명해왔기 때문에 WTO 규제를 피해나갔다. 그런데 과기부가 해체돼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R&D투자의 상당부분이 지식경제부로 넘어가 기업을 지원하게 되면 WTO 규제의 경계선이 무너진다”면서 “인수위와 당선인도 뒤늦게 이런 문제점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산업계는 산자부가 지식경제부로 확대 개편될 경우 정부의 지원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지만 한편으로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의 기반이 바로 기초·원천기술인데 기능이 축소된 교육과학부에서 이 분야의 R&D투자가 이전처럼 활발하게 이루어지겠느냐는 의구심이다. 산업계에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인수위의 주장이 실제로는 오히려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연구현장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유장열 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부장은 “산업기술을 지원하는 지식경제부의 성격상 연구개발 투자가 기업 애로사항 해소 같은 단기적 성과에 치우치기 쉽고, 그럴 경우 차세대 성장동력 기술개발이 소홀해질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리는 출연연구기관의 한 연구원은 지식경제부 관료들에 대한 거부감도 털어놓았다. “지식경제부의 전신인 산자부 공무원의 경우 과학기술에 대한 마인드가 떨어져 여러 가지로 걱정된다. 과기부 공무원은 그래도 과학기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 대화가 됐는데, 앞으로 관할부처가 지식경제부로 바뀌면 어찌 될지 모르겠다”며 답답하다고 호소한다.

    과기부측은 “인수위 조직개편안에 따라 기능을 분산할 경우 R&D 비중이 교육과학부 26%, 지식경제부 31%가 된다며, 산업담당 부처의 R&D 기능은 산업화를 위한 한정된 범위의 기술과 중소기업 지원 등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과기부 자료에 의하면 과학기술 관련 부처와 실물경제 관련 부처의 R&D 비중이 일본의 경우, 문부과학성 66% 대 경제산업성 14%, 독일은 연방교육연구부 57% 대 연방경제기술부 19%로 나타나 있다.

    인수위의 과기부 해체 방침에 대해 과학기술계 안팎에서 다양한 반대논리와 문제 지적이 잇따르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기대감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이규호 한국화학연구원 연구위원은 “교육과학부로 관할이 바뀌면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대학의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연구원에게 겸임교수 발령을 내 대학원 교육을 지원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요즘 지방대의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이 거의 없는데, 이번 정부조직 개편이 잘만 운영하면 이런 면에서는 긍정적 효과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이런 점에서 과학기술계 사정을 잘 아는 이공계 쪽 인사가 교육과학부 장관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장인순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은 “연구소가 산업체와 함께 있어야 발전이 빠르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대기업이 앞서가는 이유는 연구결과가 바로 피드백되기 때문”이라며 “연구와 사업이 함께 가는 게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지식경제부가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관할하는 게 산업체와의 연계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얘기다.

    이명박 당선자가 대선 과정에서 “과학기술인에게 자율성과 창의성을 부여하는 과학기술행정을 펴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것에 기대를 거는 시각도 있다. 장인순 고문은 “원자력연구원장을 두 차례에 걸쳐 6년간 역임했으나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연구비는 팀장들이 과기부에 신청해 타내고, 인사권은 형식적이어서 6년 동안 연구실적 나쁜 사람 2명을 내보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연구소 정원도 정부가 묶어놔 필요한 연구 인력을 비정규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장 고문은 “이명박 당선자가 과학기술을 홀대한다는 일부의 시각은 오해다. 어느 국가원수가 과학기술을 홀대하겠는가. 공약대로 과학기술인에게 자율성을 보장해주면 좋겠다. 정부출연 연구기관 원장에게 재량권을 부여하면 아마 편하게 잠잘 사람 없을 정도로 열심히 해보려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PBS나 개혁하라!

    과기부 해체라는 비상사태를 계기로 그동안 쌓인 과학기술계 내부의 해묵은 문제들을 ‘전봇대 뽑듯’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크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거의 모든 과학기술계 인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가 이른바 ‘PBS (Project Base System)’다. PBS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원 인건비를 30%만 보장하고 나머지 70%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충당토록 한 제도. 1990년대 중반 정근모 장관시절 도입됐다. 이론적으로는 연구원들을 독려해 연구 성과를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나 시행과정에서 무수한 부작용을 불러일으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과학계 인사가 말하는 PBS의 부작용은 이런 것들이다.

    △연구 자체보다 연구비 따오는 데 정력을 쏟고 있다. 보따리 싸들고 공무원들 찾아다닐 때 자존심 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소규모 단기성 연구과제 확보에 주력하다 보니 장기적인 대형 연구를 하기 힘들다. △한 연구원이 여러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 연구의 부실화를 초래하기 쉽고, 책임자는 관리부담으로 연구에 집중하기 힘들다. △예전엔 중소기업 현장에 가서 기술적 조언도 많이 해주었는데, PBS제도 도입 이후엔 자기 과제 하기도 바쁘니까 기업체 지원은 생각할 수도 없다. △연륜이 쌓인 연구원이 연봉이 많다는 이유로 찬밥신세가 되었다. △이 제도를 시행한다고 해서 봉급을 제대로 타지 못한 연구원은 거의 없다. 어차피 인건비로 줄 돈인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피곤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가.

    PBS에 대한 연구현장의 목소리를 종합하면 한마디로 안정적인 연구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기부측은 “연구원의 인건비를 100% 보장하면 나태해지기 쉽고 관료화가 우려된다. 그래서 경쟁력을 갖추고 일한 만큼 준다는 취지에서 도입한 제도”라면서도 제도개선의 필요성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PBS의 취지를 살리면서 연구원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선 70~80%의 인건비를 보장하고 나머지를 연구과제 수주로 충당토록 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노후가 불안한 과학기술 엘리트들

    과학기술 인력의 임금 등 복지도 개선이 시급한 분야로 꼽힌다. 특히 대학교수나 민간기업 연구 인력에 비해 정부출연 연구기관 종사자의 처우는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 유장열 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부장은 “생명공학연구원의 경우, 40대 중반의 10년차 연구원 연봉이 6500만원 수준”이라고 밝혔다. 대부분의 연구원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다른 직종보다 늦은 35세 정도에 연구소 생활을 시작하는 점을 감안하면 좋은 대우라고 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퇴직연금과 같은 제도적인 노후대책이 마땅치 않은 것도 연구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요소다. 2001년부터 연봉제로 전환하면서 퇴직금제도가 없어졌다. 연말에 퇴직금조로 한 달치 보너스를 주는 것이 전부다. 이런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려 공제회를 만들었으나 참여도가 떨어져 실질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장인순 원자력연구원 고문은 “교장선생님 하다가 퇴직하면 월 300만원가량의 연금이 나온다던데, 우리 연구원들은 아무런 대책이 없어 막막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대학으로 떠나는 연구원들

    그나마 정규직 연구원으로 근무하지 못하고 비정규직 신분이 되면 각종 복지혜택에서 더욱 멀어진다. 원자력연구원의 총 직원 1100여 명 가운데 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연구인력(700여 명) 중에도 상당수가 비정규직. 장인순 박사는 “포스트닥(박사후과정) 비정규직 연구원들이 가장 안타깝다. 아무리 우수하고 능력이 있어도 2년이면 떠나야 한다. 정규직 채용이 크게 제약받고 있어 법 규정상 2년 이상 고용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IMF 관리체제를 거치면서 정년이 65세에서 61세로 단축된 것도 연구원들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대목이다. 똑같은 학위과정을 밟고 같은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더라도 65세 정년인 대학에 비해 불리하다는 것. 임금이나 복지 등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보니 인재유출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유장열 박사는 생명공학연구원의 경우 매년 30여 명의 연구원이 빠져나가는데, 사람과 함께 그동안 쌓인 연구 노하우도 빠져나가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연구소를 떠나는 연구원들의 행선지는 주로 대학이다. 교육부가 첨단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원생 등에 지원하는 BK21(두뇌한국21)사업을 실시하자, 교수인력 확보가 시급해진 대학들이 검증된 연구원들을 1차 포섭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 최근엔 연구시설 등 제반 여건이 연구소보다 훨씬 못한 영세한 지방대학으로 옮기는 연구원도 많다고 한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여건이 악화되면서 과학기술계에서 상대적으로 대학의 위상이 더 높아지고 있다. 출연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옛날엔 대학과 연구기관의 위상이 비슷했는데 요즘은 대학의 목소리가 훨씬 크다. 여기는 그야말로 ‘프로’들이 연구하는 곳인데도 인건비 확보에 급급한 실정이지만, 대학은 단지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인건비 보장하고, BK21로 지원하고 하니 정말 자존심 상한다”고 토로했다.

    이른바 이공계 위기의 해결책은 바로 이 같은 연구원들의 대우를 개선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연구원의 말이다.

    “KAIST 원생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연구소에 들어오면 얼마나 실망할까. 그렇다고 삼성 같은 대기업에 가도 40대 넘어 이사로 승진 못하면 퇴사해야 할텐데. 연구원들도 공무원처럼 안정된 직장에서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청와대에 과학참모가 없다

    과기부 해체로 위기감이 고조된 과학기술계는 이명박 정권이 어떤 형태로든 대안을 제시해 우려를 씻어주길 기대하고 있다. 교육과학부 장관감으로 거론됐으나 고사한 것으로 알려진 오세정 서울대 자연대학장(물리학)은 최근 한 언론기고문을 통해 “과학계의 근거 있는 우려를 해소하는 한 방안으로 청와대에 과학기술특별보좌관을 임명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오 교수는 “과학특보가 부처간 과학기술예산의 종합조정과 장기적이고 범부처적인 국가 연구개발계획을 관장하면 커다란 행정조직 없이도 과학기술계의 우려를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과학기술보좌관은 노무현 정권에서 도입된 바 있다. 황우석 사건과 관련해 도중하차하는 등 적임자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은 빚었지만 제도 자체는 기대를 모았던 게 사실이다. 이에 비해 이명박 정권의 청와대 수석비서관 중에는 이주호 교육과학문화수석비서관이 과학을 담당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과학전문가가 아니다. 청와대 참모 중 과학기술에 대해 대통령에게 조언할 수 있는 이는 전무한 실정이다. 내각에서 과기부 총리 정통부 장관이 사라지고, 청와대마저 과학기술분야를 보좌할 참모가 없다면 대통령의 균형 있는 국정수행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이명박 정권이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인을 존중하는 마인드를 가져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과거 정권교체 때마다 과학기술계를 흔들어댄 사례가 더 이상 반복돼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정부출연연구소의 한 간부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이 모두 과학기술계를 불신했고, 이 기간 동안 연구 인력이 정체되고 기구개편이 되풀이되는 등 그야말로 잃어버린 15년 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과학기술인 존중의 첫 시험대가 바로 정부조직 개편이라고 말한다. 지금처럼 과기부를 해체하는 과정에 과학기술인의 의사가 무시된다면 앞으로 어떤 정책이 나와도 호응을 얻기 힘들 것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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