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건에서 부시로 이어지는 미국의 보수주의혁명이 1970년대 소수 학자가 만든 작은 연구소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 공화당의 정책은 헤리티지 재단, 민주당의 정책은 브루킹스연구소를 통해 만들어져왔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 같은 정책연구소와 정책연구는 덜 발달한 상태다. 이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자칭 ‘중도진보적’ 지식인들이 ‘지속가능한 진보’를 추구한다는 정책포럼을 만들어 연구해온 국가 비전을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큰 선물을 한 것이다.
이들의 출발점은 ‘구좌파’의 사회민주주의와 ‘신우파’의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자는 ‘유럽의 제3의 길’이다. 나아가 한국의 진보는 민생파탄에 따른 노무현 정부의 실패,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라는 진보정당의 실패, 민주노총과 같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실패 등 정권, 정당, 운동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며 새로운 진보, 즉 근본주의적인 진보와 구별되는 ‘현실주의적인 중도진보’의 길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진보는 군사독재 시절의 발전국가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넘어선 ‘한국판 제3의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 중심의 그레이트 코리아
이 제3의 길은 ‘자율, 연대, 생태’를 기본가치로 하며 실사구시를 추구한다, 국민과 눈높이를 맞춘다, 반시장경제와 반기업 이미지를 탈각한다, 민족주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국가안보를 중시한다, 북한인권을 요구한다, 노동의 권리만이 아니라 윤리도 주장한다, 사회적 타협을 추구한다는 등의 중도적인 원칙을 제시한다. 이에 기초해 저자들은 21세기 글로벌화와 지식기반경제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세계로 열린 ‘지속가능 선진경제’를 추구해야 하는 바 이는 인간의 창의성을 동력으로 하는 ‘창조경제’, 경제주체 간의 협력에 기초한 ‘협력경제’, 녹색기술에 기초한 ‘청정경제’라는 ‘3C경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는 이를 위해 혁신주도성장과 동반성장을 결합한 신성장체제와 관계금융시스템이라는 새로운 금융시스템을 제시한다. 또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회의 재분배에 주력하는 사회투자국가, 이를 위한 학습복지제도의 도입, 노동의 유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유연안정성의 실현,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의 격차에 따른 노동자 내부의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연대지식정책 등 다양한 대안을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경제체제에 기초해 ‘사람 중심의 그레이트 코리아’를 만들겠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적인 구상이다. 이 그레이트 코리아는 당당한 나라를 바라는 국민 평균의 애국주의에 기초한 것이지만 자율, 연대, 생태가 관철된다는 점에서 보수적 의미의 그레이트 코리아와 다르며 통일한국, 분권 한국, 글로벌 한국이 그 기본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던지고 있는 질문들, 그리고 대안들은 모두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시의적절한 화두이다.
다만 이 책이 자신들의 노선에 대한 총론 격의 첫 책이라 그러하겠지만 대안과 정책포럼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느낌이다. 과거 ‘진보개혁(진보와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의 문제는 급진성이 아니라 관념성, 추상성이었다. 사실 급진성으로 말하자면 정주영의 반값 아파트 공약이 더 급진적이었던 것 아닌가? 결국 진보개혁세력은, 예를 들어 서구의 기본소득제 같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자신들의 노선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원론 수준과 똑같은 추상적 수준에서 사회주의에서 사민주의로, 사민주의에서 제3의 길로 오른쪽으로 한 클릭씩 변화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노선이라고 혼동해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와 관련, 하나만 더 지적한다면 이 연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한 곳(24쪽)에서는 ‘참여, 연대, 생태’라고, 또 다른 곳(39쪽)에서는 ‘자율, 연대, 생태’라고 이야기하는 등 가장 중요한 목표에서조차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이 같은 가치들이 이 책이 제시하는 프로그램 속에 잘 녹아있는 것 같지 않다. 한 예로, 3대 가치 중의 하나인 생태 문제의 경우 500쪽이 넘는 책에서 고작 4,5쪽 분량으로 극히 원론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가치 선언이 아니라 이 가치 실현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