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호

김수환 추기경

우리 시대 ‘어른’의 성(聖)과 속(俗) 순례길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입력2009-07-02 16:0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사회는 암울하다. 반세기 넘게 한국 가톨릭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회 약자에게 힘이 되어준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善終)하면서까지 한국인의 가슴을 뜨겁게 데웠다. 수십 년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저 하늘의 별이 된 그의 생애를 돌아보는 자체가 반성이고 정화일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의 정신풍토는 공황이나 다름없었다. ‘나라의 어른’이 될 만한 분들이 자의건 타의건 잇달아 제거, 탈락되거나 몰락하는 동안 이 땅의 정신세계는 척박한 ‘화전지대’가 됐다. 정신의 천체도(天體圖)에 그려 넣을 별들이 하나 둘 사라져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참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중병을 앓아왔다.

    대한민국에서 어른의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민족 분단의 역사적 조건이든, 지역 갈등과 좌우 갈등 상황 탓이든, 국민 심성의 삭막함 탓이든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땅의 어른은 국민과 너무 같아서도 안 되고, 너무 달라서도 안 된다. ‘혜화동 할아버지’란 수식어와 “나는 바보야”란 말은 우리 국민의 ‘같음’과 ‘다름’ 그리고 ‘성(聖)’과 ‘속(俗)’을 소통시킨 김수환 추기경만의 무르익은 경지를 상징하는 것인지 모른다.

    2월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불화와 갈등 속에서 찢어지고 갈라진 국민의 메마른 마음 밭, 이기의 극단으로 치닫는 거친 심성의 자갈밭에 영혼의 비타민을 공급한 전원이었으며, 우리 시대 영성에 융숭한 저수지 같은 어른이었다. 그의 선종에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해서 3부 요인과 개신교 불교 유교 등 종교와 종파를 달리하는 인사들이 줄지어 조문했다. 각계 중요 인사는 물론 이 땅의 서민들, 병들고 가난하고 억압받고 외로운 이들이 그 누구의 강권 없이 스스로 이 물결에 휩쓸렸다.

    찬바람 휘몰아치는 날씨에도 명동성당에는 40여만명의 발길이 길게 줄을 지었다. 일찍이 보지 못한 국민적 추모의 장관이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불러 모았을까? 가톨릭계에서조차 예상치 못한 추모 열기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추기경의 부고기사가 사진과 함께 굵직한 제목으로 언론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은 가톨릭 국가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김 추기경에 대한 추모의 마음은 모든 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 관심을 두었던 분이다. 고생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곁에 항상 머물고자 한 삶은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해 ‘낮은 곳으로 가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박형규 목사)



    “종교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소탈함이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나아가 배타적이지 않은 자세가 타 종교인들의 머리를 숙이게 했다. …김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남긴 ‘고맙다’는 말씀은 단순한 언사가 아니라, 그분의 전체 삶을 보여준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메시지이자 물질만 추구하는 시대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명진 스님)

    추기경과 보들레르의 시

    한국갤럽이 2월21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한다’는 응답이 87.7%에 달했다. ‘존경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8%에 불과했다. 가톨릭 신자는 97.4%가 김 추기경을 존경한다고 했고, 개신교도(86.4%)와 불교도(90.8%), 그밖에 다른 종교 신자 및 무신론자(83.9%)도 대부분 존경한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결과는 열에 아홉 가까운 사람들이 김 추기경을 존경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존경할 인물이 너무 없어서 황량한 우리 사회에 놀라운 현상이었다.

    김지하 시인은 2월17일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났다”고 했다. 김 추기경은 김 시인 결혼식에 주례를 서기도 했다. 시인은 ‘오적’으로 필화사건을 겪은 2년 뒤인 1972년 가톨릭계에서 펴낸 ‘창조’지(誌)에 ‘비어’를 게재, 다시 체포돼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에 연금됐다. 그때 추기경이 시인을 찾아와 함께 밤을 보냈다. 김지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추기경님은 보들레르의 시를 줄줄 외울 정도의 ‘시인’이시고 아주 큰 예술가셨다.” 그는 이어 “우리 생애에 이런 분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 하면 사람들은 세상과 멀리 떨어진 엄숙한 종교계 최고 지도자를 떠올리기보다 어릴 적 시골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김 추기경이 자신은 부끄럽게도 신비로운 하느님 체험 같은 걸 해본 적이 별로 없다고 고백한 글을 읽으면서, 추기경이 생애의 중대 고비마다 내린 결단 그 자체가 바로 신비로운 체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이는 추기경이 자신의 인간적 고뇌와 약점, 외로움을 드러내는 고백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후부터 불면증으로 약을 처방받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은 어쩌면 사제로서 숨기고 싶은 약점일 텐데, 그걸 드러내보이시는 게 나로서는 오히려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인간적인 내면은 고독하고 소심하고, 중책은 무거웠을 것이다.”

    나무묵주 하나만 들고 이승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 “나는 바보야”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화상을 드로잉한 그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김 추기경은 사제로 서품을 받은 이후 발표한 사목교서와 메시지, 성명, 미사강론, 대담, 서간, 묵상 등 각종 기록을 묶은 18권의 ‘김수환 추기경 전집’(색인 포함)을 남겼다. 2004년에는 회고록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방송 평화신문 발행)를 펴냈고, 그에 앞서 1994년에는 자신의 삶과 꿈, 그리고 신앙을 담은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1999년 희수(喜壽) 때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란 고백록 등을 통해 진솔한 내면을 드러내보였다. 그가 남긴 저술, 그리고 그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김 추기경의 삶을 들여다보자.

    ‘황국 신민 아님, 소감 없음’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8일(음력)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보현은 1868년 무진박해 때 가톨릭 신자로 순교했고, 아버지 김영석은 박해를 피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가 가톨릭 신자인 서중하를 만나 김수환을 낳았다. 5남3녀의 막내였다. 김수환은 5세 때 경북 군위로 옮겨 살았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어머니는 삶의 전부였다.

    어릴 적 그의 꿈은 장사꾼이 되어 25세에 장가를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김수환과 세 살 터울의 형 동환을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신부가 된 후에도 추기경은 황혼 무렵 초가집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마음속 고향처럼 그리워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진학,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원주와 전주교구장을 지낸 지학순 주교와 전재덕 주교가 그의 입학동기다. 동성상업학교 시절 김수환은 꾀병을 부려 학교를 그만두려고도 했으나, “신부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니다”는 꾸중만 들었다. ‘하느님’이 그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김수환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일본천황의 칙유(勅諭)를 들은 황국신민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에 대해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므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뺨을 맞기도 했다. 당시 교장이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였다. 김수환은 퇴학을 각오했는데 오히려 도쿄의 가톨릭계 대학인 조치(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조치대학 시절 김수환은 독일 출신의 게페르트 신부를 만났다. 게페르트 신부는 김수환의 가슴속에 있는 ‘뜨거운 불덩어리’, 곧 일제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인해 ‘화상’을 입겠다며 그를 신부의 길로 이끌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게페르트 신부님, 그분은 잊지 못할 나의 ‘영적 스승’”이라고 회상했다. 게페르트 신부는 6·25전쟁 직후이던 1960년 서강대학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이 됐다.

    김수환 추기경

    1968년 김수환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에서 사제들이 순명서약을 하고 있다.

    모든 이의 ‘밥’

    1944년 졸업을 앞둔 김수환은 학병으로 징집돼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이듬해 일본의 패전으로 조치대학에 복학했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에 올라 서울 혜화동 성신대학(가톨릭대학 신학부)으로 돌아왔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입장과 관련, 김수환은 한 선배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명답으로 오랫동안 기억했다. “좌익과 우익의 중간에 하느님당(黨)이 있는데 나는 그 당원이다. 하느님당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우는 게 아니라 하늘로 곧장 올라간다.”

    경북 안동성당(현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목활동이 시작됐다. 본당 사목에 한창 뜨거운 불이 붙던 1955년, 그는 김천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직을 겸했다. 이제 초로에 접어든 1회 졸업생들과는 얼마 전까지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 옛 추억을 나누곤 했다. 졸업생 중 두 명의 제자는 수녀회 총원장수녀를 지내기도 했다. 김 추기경에게는 그 시절이 꿈처럼 아름다웠다. 이 무렵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끈 어머니가 그의 무릎에 기대어 세상을 떠났다.

    1956년 김 추기경은 독일 뮌스터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에서 회프너 교수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유학시절 신부 김수환의 교회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거대한 바람을 몰고 왔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목적 목표를 내세운 것이다. 가톨릭으로서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1963년 독일 체류 7년 만에 귀국한 그는 이듬해 가톨릭시보사(현재 가톨릭신문) 사장을 맡았다. ‘세상을 위한 교회’를 향한 발길도 잦아졌다. 김 신부는 이 시절 교도소를 자주 찾았고, 행려병자와 장애인 수용시설 등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신앙인의 삶이란 예수처럼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 모든 이의 ‘밥’이 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966년 3월 김수환 신부는 부산교구에서 분리돼 새로 세워진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이 됐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해 5월 김수환 교구장은 ‘여러분과 또한 모든 이를 위하여’를 사목 표어로 내세워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着座式)을 치렀다. 이 사목 표어는 김 추기경과 평생을 함께했다.

    민주화운동의 진지

    마산교구장 시절 그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를 겸임했다. 청년노동자를 위한 선교 단체인 이 조직과 관련된 사건이 1967년 강화도 삼도직물 노동조합에서 발생했다. 회사 사장이 천주교 신자이던 노동자를 해고하고 강화본당 주임신부를 용공분자로 몰아 협박했다. 그는 임시 주교회의에서 주교단이 서명한 공동성명을 발표,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김수환 추기경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당시 모습.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본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이 성명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상에 대해 한 거의 최초의 발언으로, 이후 가톨릭교회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생존권보장 요구에 적극 앞장섰다.

    1968년 4월 그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됐을 뿐만 아니라 주교단에서도 막내인 그를 교황청에서 대주교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서울대교구장에 앉혔다. ‘시골뜨기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발표되자, 교회를 비롯한 사회는 ‘상상하지도 못할 파격인사’라며 놀라워했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교구장 착좌식에서 원로사제들이 46세의 젊은 교구장에게 순명을 서약하는 모습은 일반인의 눈에 낯선 광경이었다. 김 교구장은 이들 원로사제들에게 더욱 몸을 낮추었다. 취임식의 미사 강론에서 그는 세상 속의 교회에 대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대교구장 자리는 무겁고 힘든 짐으로 그를 압박했다.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하루라도 빨리 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뇌리를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바람과 달리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전세계에서 가장 어린 추기경이자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다음의 고위 성직자다. 한국 교회에서 추기경이 탄생한 것은 한국 교회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톨릭교회로서는 일대 경사였다. 그러나 김 추기경 개인에게는 ‘이제 정말 도망갈 길이 막힌 것’이었다.

    과연 그 후의 세월을 통해 김 추기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영광만이 아니었다. 아니 영광은 잠시였고, 고난의 길이 멀고 험난했다. 김 추기경은 1970~80년대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과 교회를 아울러 보살피고 지켜야 했다. 1970년대의 명동성당은 유신독재정권과 대결한 민주화운동의 완강하고 튼튼한 진지였다. 그러나 정권은 물론 교회 안팎에서도 교회가 정치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교회의 현실 참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부와 빚은 마찰의 원인이 마치 나에게 있는 것처럼 여기고 교황청에 투서성 고발편지를 보냈다. 정부당국에서도 여러 차례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 나를 문책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교황청은 이런 정보사항을 수시로 나에게 귀띔해주었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획책하던 1971년 성탄 자정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박 정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듬해인 1972년 8월 광복절을 기해서는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시국성명을 발표, 정권을 공격했다.

    “우리는 7·4남북공동성명이 전쟁수단을 영구히 포기하고 대화로써 조국통일을 달성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이것을 평화위장의 전쟁준비수단이나 권력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여공 감싸 안은 어미닭

    성명에서 우려한 것은 그해 10월17일 현실로 드러났다. 박 정권은 이날 이른바 10월 유신을 자행, 이후 민주주의를 압살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긴급조치가 발동되고 비상군법회의가 설치되는 등 초법적 헌정유린 속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조종(弔鐘)을 울렸다.

    급기야 교회와 국가권력이 맞부딪치는 막다른 사태가 벌어졌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가톨릭 전국 각 교구에서는 시국기도회를 열고 유신정권을 규탄했다. 사제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촛불행진을 하는 광경은 그 시절 국민에게 장엄하고 정의로운 저항권의 행사로 비쳤다. 이 사제들이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이들 사제단의 활동은 칼날 위를 걸어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집단적인 기도요 고행이며, 십자가의 아픔이요, 하늘을 향한 성스러운 행진처럼 보였다. 추기경은 이들 사제단의 배후인물이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가톨릭교회는 이 시절 비록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었지만, 교회 바깥으로부터는 동조와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의와 자유와 인권을 위해 박해받는 이들을 김 추기경은 가톨릭의 날개로 감싸 안았다. 그의 그늘, 그의 날개는 어미닭의 품과 같았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자화상.

    1975년 박 정권은 긴급조치란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둘렀다. 이듬해 3월1일 명동성당에서는 신·구교 주요 인사와 신자, 재야 원로와 각계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3·1민주구국헌장’이 발표됐다. 김 추기경은 이 사건 주동자의 구속과 관련한 시국기도회 강론에서 구속된 이들을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 죽음’이라고 비유하면서, ‘불의에 짓밟히고서도 호소할 데 없는, 보잘것없는 이웃들의 참된 형제’가 되어준 신부들을 옹호했다. 그 무렵 김 추기경의 전화는 24시간 도청됐다.

    1978년 인천 동일방직 여공들이 명동성당에 들어와 농성을 벌였다. 명동성당으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여공들은 흐느끼면서 추기경에게 억울하고 참혹한 현실을 호소했다. “추기경님, 우리를 살려주세요. 회사의 조종을 받는 남자 직공들이 우리를 구타하고 인분까지 끼얹었습니다. 경찰들은 그 광경을 낄낄거리면서 보고만 있었어요.”

    명동성당에서 기도회가 열렸고, 주교단과 개신교계가 노동자 인권탄압을 중지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 당국과 기업주는 제발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십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자중하고 인내했습니다. 그러나 힘없는 이들을 계속 짓밟으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노동자와 농민 빈민 등 힘없는 사람들 편만 든다는 뒷말도 나왔다. 심지어 가톨릭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얼토당토 않은 모함을 받기까지 했다. 1979년 여름에는 오원춘 사건으로 안동교구 신부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김 추기경은 자신의 첫 사목현장이었던 안동성당에서 열린 시국기도회에 참석해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느님이 두렵지 않으냐?”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인 1980년 정월 전두환 장군이 새해 인사차 김 추기경을 찾아왔을 때 추기경은 12·12사태에 대해 뼈 있는 말을 했다. “마치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그해 5월18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가 열렸다. 광주대교구장이던 윤공희 대주교는 그날 아침 광주에서 목격한 사실을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윤 대주교가 직접 본 생생한 현장은 6·25전쟁 이후 민족 최대 비극인 처참한 광주 민주항쟁의 서막이었다.

    김 추기경 선종 후 윤 대주교는 5월의 광주, 그 참상에 얽힌 숨은 이야기 한 토막을 털어놓았다. 1980년 5월23일 김 추기경은 비밀 루트를 통해 광주의 비극을 비통해 하는 짤막한 서한과 함께 당시로서는 꽤 큰돈인 1000만원을 보냈다. 김 추기경은 그 후에도 1970년대, 1980년대를 통해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으로 언제나 ‘광주의 5월’을 꼽았다.

    김 추기경이 깊은 고통을 겪는 속에서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 우뚝 솟아올랐다. 명동성당은 민주세력들의 아고라이며 민주시민들의 포럼이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사망하자, 김 추기경은 1월26일 추모미사 강론에서 전두환 정권의 야만적인 폭거에 대해 분노했다.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묻고 싶습니다.…지금 하느님께서는…‘네 국민인 박종철군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6월10일 민주대항쟁의 신호탄이 울린 뒤 경찰병력에 밀려 데모군중이 명동성당으로 들어오고, 경찰이 쏜 최루탄이 주교관 앞마당에까지 날아왔다. 경찰병력이 명동성당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하자, 김 추기경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그 무렵은 하루하루가 민주화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이 될 것인지 절체절명의 순간들이었다. 불면증이 박정희 정권 이래 30여 년간 김 추기경을 괴롭혔다. 참으로 숨 막히는 세월이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마침내 민주화를 향해 승리를 견인해내는 굳건한 주춧돌이 되었다.

    “오빠, 사랑해요”

    김 추기경은 30여 년 교구장 시절을 통해 한국 가톨릭교회 성장사에 획기적인 공로를 쌓았다. 1981년 그가 이끈 가톨릭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는 여의도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80여만명의 신자를 불러 모았고, 1984년 한국 가톨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 순교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당시 여의도광장에는 100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89년에는 ‘가톨릭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성체대회를 서울에서 닷새간 개최하는 저력을 보였다.

    ‘침묵의 교회’인 북한교회에 대해 김 추기경은 한시도 관심을 떨쳐버린 적이 없다. 1975년부터 1998년까지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은 그는 북한교회와의 대화채널을 개설하기 위해 북한에 국수공장을 세우고 배편으로 식량을 날라주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북한에 남아 있는 신앙의 불씨를 지피기 위한 노고였다. 추기경은 통일이 되면 휠체어를 타고라도 북한에 가고 싶다고 했다. 김 추기경은 남북문제가 경색되었을 때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도 했다. “제 책임이 커요. 제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평양에 사는 김일성 주석은 저의 ‘어린 양’입니다. 목자로서 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교황청에 몇 차례나 사임 신청서를 보낸 지 6년이 지나서야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에서 물러나 ‘혜화동 할아버지’로 돌아갔다. 스물아홉 살에 신부가 되어 47년을 목자로 양떼를 이끌면서 짊어진 ‘십자가’를 벗던 그날, 명동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 중 특히 중년부인들은 길가에 늘어서서 “오빠, 사랑해요”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 어떤 종교 지도자가 이런 친근한 호칭으로 불린 적이 있을까.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던 1968년 서울대교구의 규모는 본당 48개, 공소 63개, 신자 14만명이었다. 30여 년 뒤 그가 명동성당이라는 한국 가톨릭의 심장을 떠나던 때 서울대교구는 본당 203개, 공소 6개, 신자 125만명으로 괄목 성장했다.

    오랫동안 머물던 자리에서 떠날 때 사람들은 대개 “시원섭섭하다”는 소회를 밝힌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오로지 홀가분한 마음뿐이었다고 했다. 다만 명동성당 종탑 십자가에 걸려 있던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은퇴 후 어디를 다녀올 때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명동성당 쪽을 보게 되는 것은 30여 년 동안 몸에 밴 깊은 속정 때문이리라.

    사회통합의 주춧돌

    김 추기경은 한평생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싶은 방랑벽이 그에게 있었다. 교구장 시절 이따금 남방셔츠 차림으로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혹시 추기경님 아니세요?” 하고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때면 추기경은 “나도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만…” 하고는 시치미를 떼곤 했다.

    은퇴 후 추기경은 교회 안팎의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김 추기경님은 은퇴 후 상왕 노릇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교구와 교구장을 돕는 길임을 추기경은 말없이 보여준 것이다.

    가톨릭과 유교는 조상 제사문제로 오랫동안 마찰과 갈등을 빚어왔다. 그 때문에 100여 년 동안 가톨릭은 1만여 명이 넘는 순교자를 내기도 했다. 2000년 5월 김 추기경은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을 기리는 ‘심산상’ 수상자가 되어 가톨릭과 유교의 해묵은 갈등과 불화를 청산하고 화해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추기경만이 보일 수 있었던 넓은 가슴이었다.

    불교계와는 법정(法頂)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개원식에 참석, 축하 인사를 할 때 불교 신자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은 적이 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방풍림 없는 비탈의 인동초처럼 춥고 굶주리고 병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돈의 통치를 받아 극도로 쇠약해졌고, 물신(物神)은 얼마나 기승을 부렸습니까. …오늘 개원하는 길상사는 이름 그대로 길하고 상서로운 예감을 우리에게 줍니다.”

    김 추기경은 우리나라에서 유교 불교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동아시아가 세계를 향해 인간정신의 촛불을 널리 밝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김 추기경은 다른 종교를 비판하고, 심지어 같은 교단 내에서조차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사회통합에 앞서야 할 종교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반성해야 한다고 깨우쳤다.

    도올 김용옥은 대학시절 스승과 불교 조계종의 종정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때로 유아독존적이고 당돌하기 짝이 없다는 세평을 듣는 인물이다. 김 추기경이 2001년 4월 그 도올과 함께 KBS의 대담프로에 나간 적이 있다. 도올의 ‘논어’ 강의 단상에 김 추기경이 초청받은 것이다. 주변에서 만류했으나 추기경은 개의치 않고 참석약속을 지켰다.

    방송이 나가자 가톨릭계 일반의 우려가 말끔히 해소되었다. 그날 방송의 주연은 바로 김 추기경이었고, 도올은 추기경의 ‘논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장단을 맞추는 고수(鼓手) 노릇을 했다. 도올은 추기경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하는가 하면, 어른을 공경하는 자세로 겸손했다. 평상시 그답지 않게 순하기만 한 양이었다.

    ‘존재 자체가 교회였다’

    교구장 자리를 물러난 뒤 김 추기경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설 때 틀림없이 야단을 맞을 것이라며 부끄러워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추기경의 삶 어느 구석에서도 부유의 흔적은 없다. 선종 후 공개된 그의 개인통장 잔고는 마이너스를 겨우 면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유품으로는 빛바랜 낡은 안경테와 오래 신어 해진 실내화, 기도생활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무묵주 정도였다.

    1980년대에 김 추기경은 승용차를 외제차에서 국산 중고차로 바꿨다. 웬만큼 큰 교회 목사나 큰 절의 주지들이 고급 승용차를 탈 때다. 덕분에 추기경이 탄 차의 광고효과가 대단했다.

    ‘동아일보’는 2003년 신년특집에 김 추기경을 모셨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가슴은 영성 가득한 신앙의 정화와 오로지 사랑 그 자체였을 것이다.

    1985년에 영세를 받았다는 작가 박완서는 추기경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을 전하면서, 김 추기경은 존재 자체가 곧 하나의 교회였다고 회상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김 추기경에게 먼저 타시라고 하자, 옆으로 비켜서면서 박완서더러 먼저 타라고 했다. 박완서가 사양하자 “레이디 퍼스트”라고 했다. 박완서가 사양 끝에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영 레이디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했더니, “나보다는 영이지요” 하며 뒤따라 탔다.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며 박완서는 “저 어른이야말로 천당은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무엄한’ 생각을 했노라고 했다.

    김 추기경은 유머감각이 빼어났다. 2003년 서울대에서 있었던 초청강연 때다. “만득이가 도대체 이 삶이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 하는 겁니다.”

    “연세 많은 분들이 ‘내가 어서 죽어야지’ 하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게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면서 어떤 기자가 추기경에게 “그런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추기경은 말했다. “매일 한다. (웃음) 그러나 내 나이 85세다. 내일 죽는다고 해서 빨리 죽었다고 안타까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 심정이다.”

    김 추기경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좋아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를 정말 좋아했지만, 감히 읊어볼 생각을 하기가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하늘을 우러러 너무 부끄러운 게 많아서”라고 했다. 김 추기경은 가요‘사랑으로’와 ‘애모’를 좋아해 가끔 흥얼거렸다고 했고, 어느 무대에서 앙코르 요청을 받으면 ‘등대지기’를 부르기도 했다.

    “그만하면 다 이뤘다”

    ‘나는 바보야.’ 김 추기경은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추기경의 이 짧은 한마디에는 그의 삶, 그의 종교적 세계가 다 들어있는 것 같다. 이 짧은 말 속에 함축된 내면세계의 깊이를 제3자가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추기경이 걸어간 87년의 세계를 상투적으로 풀이하는 것 역시 언어도단이며, 필자의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영적인 세계 그 어딘가에 해답의 열쇠가 있어 보인다.

    세계 최연소 추기경, 국내를 통틀어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던 장기집권자(?) 김 추기경이 선종하자, 서울에서 대구에 이를 만한 조문인파가 차가운 겨울을 따뜻하게 녹였다. 2월20일 명동성당에서 교황장 격으로 치러진 김 추기경 영결미사에서 한국주교회 의장인 강우일 주교는 눈물의 추모사를 했다.

    “온 국민이 마음으로 의지하던 아버지 같은 분을 잃은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추기경님이 계속되는 육신의 한계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정신적으로도 고통과 외로움 속에 홀로 힘겹게 싸우는 걸 봤습니다. …저는 몇 주 전에 ‘주님, 이제 그만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추기경님을 편히 쉬시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제 혜화동 할아버지가 아니라 한국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사랑하는 바보야. 그만하면 다 이뤘다.’”

    명동성당에서의 장례미사 후 김 추기경은 용인 가톨릭 공원묘역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김 추기경의 묘비에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추기경의 평생에 걸친 사목 목표와 성경 ‘시편’에 나오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가 새겨졌다. 묘비의 크기도 여느 신부의 것과 크게 다름이 없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사랑과 겸손에 목말랐으며 물질과 권력, 명예에 중독돼 있었다. 김 추기경의 선종은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이 소중한 가치를 되새겨주는 사회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어느 신부는 “김 추기경은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이루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체험케 했다”고 감사해했다. 추기경의 영결미사는 준비에서 마무리까지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모든 이가 함께 치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톨릭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울 명동성당으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지금도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란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김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명동성당의 그 ‘깜짝 놀랄 만큼’ 감동적인 물결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지하수 같은 흐름이 되어 이어지고 있다. 각막 기증과 장기 기증이 불과 몇 개월 사이 여느 때의 1년치를 훌쩍 넘어서는가 하면, 가톨릭에 입교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한 분의 죽음이 삶을 움직이는’ 좀처럼 보기 힘든 ‘사건’을 우리는 겪었다. 이 혼탁한 시대에 축복의 한 장면이 연출된 셈이다.

    정신세계에 뜬 큰 별

    김수환 추기경
    윤무한

    1943년 대구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김 추기경의 선종을 가리켜 “대한민국은 (2월)16일 해방 후 가장 큰 어른을 보냈다. 그가 떠나자, 정신의 천체도에 큰 별 하나 떴다”고 했다. 소설가 공지영은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건 각막이 아닌 잃어버린 내면의 눈이었다”고 감사했고, 신경숙은 “‘고맙다’는 마지막 말씀, ‘사랑하세요’라고 남겨놓으신 그 말씀을 고스란히 돌려드립니다. 우리 곁에 계셔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사랑했습니다”라고 눈물겨워했다.

    김 추기경의 나래 속에서 평화와 안식을 느꼈던 모든 사람에게 김 추기경도 어쩌면 하늘나라에서 이웃집 할아버지 같던 평소의 그 웃음 띤 얼굴로 말할지 모르겠다. “나는 바보야. 나 같은 바보에게 평화를 찾는 이 바보들아, 그러나 ‘감사하고 사랑한다’”라고.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