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편 가르기 논쟁에 휩싸였다. 언론정책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무현과 그의 지지세력인 노사모는 이른바 동·조·중과 전쟁을 벌였다. 2000년 4월29일은 노사모가 첫 모임을 가진 날이다. 당시 대학 4년생이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 모임의 창립회원이 됐다. 이후 동아일보에 입사하면서 노사모에서 멀어진 나는 취재과정에 그들로부터 경멸의 시선을 받았고, 그들의 운동권적인 행태에 절망하기도 했다. 노무현에 대한 비난이야 어쨌든 노무현은 이 나라 정치개혁의 아이콘이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그가 죽고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2002년 3월 민주당 대통령후보 전북경선에서 1위가 확정된 후 기뻐하는 노사모 회원들.
모든 것은 9년 전,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만일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그’의 서거 소식에 조금 덜 울었을지 모른다. 난 그 전화를 받기 3일 전,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짤막한 댓글을 남겼다. 당시 HTML 집합에는 다음과 같은 주제의 리플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진짜 정치인 노무현을 후원합시다” “옳소!” “어떻게?” “모여서 상의?” “대찬성!” 아마도 2000년 4월19일이나 20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0년 4월13일 치러진 제16대 총선은 미디어 측면에서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선거였다. 바로 인터넷이란 미디어가 최초로 개입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대다수 정치인은 컨설턴트의 조언을 받아 개인 홈페이지를 급조했고 어쭙잖게 인터넷을 홍보의 무기로 삼았다. 물론 그 수준은 천양지차였고 그 효과 역시 특정 세대에 한정됐을 뿐이었다.
선거가 끝나자 누리꾼들은 선거 초반을 주도했던 ‘낙선운동’보다 한 사내의 고군분투, 아니 바보스러움에 관심을 집중했다. 바로 부산 북·강서을에서 낙선한 ‘노무현’이란 정치인이었다. 아마도 선거 직후 몇몇 진보매체와 방송사 시사프로그램에서 그의 뚝심을 주목했나보다. 네티즌들의 애정표현은 일순간 파도가 돼 그의 홈페이지를 다운시킬 정도가 됐고 누군가 자발적으로 인터넷 게시판을 급조한 것이다.
당시 기자는 꽤 앞서가는 누리꾼이었다. 미국 첨단 인터넷시장을 경험하고 돌아온 대학 4학년생으로, 학점과 토익점수를 제외하면 두려울 게 없는 팔팔한 청춘이었고 인터넷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란 믿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엊그제 노무현 후원회에 동참하신다고 댓글 다셨죠? 그거 보고 연락드립니다. 돌아오는 토요일(29일) 종각역 청진동에서 모이려는데 나와주실 수 있으시죠?”
당시 게시판을 급조하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건 이는‘절세미녀’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20대 후반의 평범한 처자였다. 그녀가 다른 직장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정치인 노무현의 ‘사이버 보좌관’이란 직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인 노무현은 노하우라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130여 명의 온라인 참모를 모집 운영하는 남다른 웹친화력을 선보였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한 나는 상기된 목소리로 “참석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소꿉친구와 불알친구’
약속날인 토요일 오후는 한가로웠다. 약속시간인 5시보다 2시간 빠른 3시에 모임장소를 찾았다. 모임을 준비 중이던 ‘절세미녀’는 내게 이름표를 달아주며 “가장 먼저 도착했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면 나는 노사모 모임에 가장 먼저 도착해 이름을 올린 ‘역사적 인물’이 된 셈이다.
2000년 4월29일은 ‘노사모’ 조직이 첫 모임을 가진 날이다. 물론 역사는 이보다 조금 늦은 5월7일, 대전에 집결한 수백 명의 회합을 정식 노사모의 출발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야사로 기억될 첫 모임은 바로 서울을 위시한 전국 각지에서 번개 형식으로 모임이 이뤄진 4월29일이다. 청진동 골목에는 당시 이광재, 서갑원씨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카페 ‘소꿉친구와 불알친구’가 있었는데, 그 장소에서 30여 명이 회합을 가졌고 그날 모임이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셈이다.
그날 모임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노무현을 지지하는지를 놓고 두 가지 의견이 대립했다. 망국적인 지역정치를 타파하는 데 그를 지렛대로 삼자는 주장과 일각에서 제기된 ‘노무현 대통령론’의 경쟁이 바로 그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대학 4학년생인 나에게도 꽤나 당혹스러운 주장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YS나 DJ급의 거물만이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했지, 의정 경험이 일천한 그를 대통령감으로 낙점해 후원하자는 발상에는 어색함을 느꼈다.
1. 2004년 3월 한 노사모 회원이 노무현 탄핵에 반대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2. 2005년 송광수 검찰총장의 퇴임식날, 기자들이 축하해주고 있다.
3. 2003년 검찰의 대선자금수사는 노무현 정권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이가 적지 않았다. 이른바 ‘인물과 사상’의 시대관에 감화된 그룹이다. 당시 첫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당시 대학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의 정신을 실천하던 그룹, 둘째 노무현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그룹, 셋째 30대 386출신으로 새로운 비전을 찾던 소시민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사모(www.inmul.co.kr)로 불리던 첫 번째 그룹은 ‘학벌주의와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언론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을 선진화하자’는 시대정신을 앞세웠기에 노무현을 주목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자신들의 이상을 실천하고 싶어했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식의 발상은 선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자리의 성격이 범상치 않았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세대와 출신지역이 모두 달랐지만 진심으로 노무현이 걸어온 길에 존경을 넘어 사랑을 표하는 이들이었다.
어느 순간 모임의 분위기는 ‘노무현이란 인물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논증하는 장으로 돌변했다. 마치 고해성사하듯 그에 대한 사랑이 쌓여갔고 마침내 참석자 대다수가 그가 장기적으로 믿고 신뢰할 만한 지도자라는 데 공감을 표했다. 결국 모임의 성격이 ‘노무현 팬클럽’으로 결정되자 단체의 명칭도 자연스레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일명 노사모)’로 확정됐다.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결성이 확정됐다. 단순 팬클럽이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지만 앞으로 한 정치인을 ‘사랑’하겠다는 선언은 평범한 대학생의 입장에서도 범상치 않은 충격이었다.
그날 30대가 주축이 된 뒤풀이 모임은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고 한다. 1차를 끝으로 버스를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노사모 게시판 운영자가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필자는 당시 인터넷 비즈니스 수업을 들으며 취미로 HTML을 공부하던 풋내기 개발자이기도 했다. 물론 노사모 홈페이지는 경험 많은 자발적인 봉사자들로 꾸려졌기에 감히 내가 낄 여지는 없었지만.
고려대 초청 특강
이후 온라인상으로 노사모가 출범하고 대전에 모여 ‘노짱’과 뜨거운 만남을 가졌다는 소식을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딱히 참가할 이유를 찾진 못했다. 졸업일정에 쫓기기도 했지만, 당초 기대했던 NGO(비정부 단체)식 모임이 아닌 ‘대통령 만들기 모임’이란 얘기에 흥미를 잃은 탓이다.
그와의 만남은 마치 예고된 시간표처럼 자연스레 찾아왔다. 2000년 7월, 고려대 학생회관 정면에 다음과 같은 공고가 나붙었다.
“오늘 오후! 민주당 노무현 최고위원 고대 언론출판협의회 초청특강”
이를 본 나는 ‘이건 내가 빠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3시에 찾아간 4·18기념관 강당에는 겨우 몇 명의 학생이 서성거릴 뿐 어떤 열기도 느낄 수 없었다. 실제 대학생 기자들이 해놓은 준비를 살펴보니 어이가 없었다. 강사를 알리는 플래카드는커녕 마이크도 없었다. 그리고 청중은 20명을 넘지 못했다. 내 얼굴이 화끈거렸고 강연회가 무산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일었다.
안희정 등 3명의 비서관을 대동하고 도착한 노무현도 이 상황을 보고 조금 당황했나보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주요 정치인 가운데 하나로 언론에서 대선후보로도 거론되는 인물인데 청중이 고작 이 정도라니…. 행사를 주최한 대학생은 연신 죄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참석한 학생들도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때 노무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소리쳤다.
“더 기다려야 하나요? 상관없어요. 20명이면 어떻고 2명이면 어떤가요. 자! 강의 시작합시다!”
그리고 그는 연설을 시작했다. 조선 이래 600년 대한민국 역사의 비굴함,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의 한,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회복해야 할 우리 사회의 정의와 이를 위한 자신의 전략에 대해 청중을 흥분시킬 정도의 어조로 1시간10분 이상 강연을 펼쳐나갔다.
노무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전 존재를 걸고 응답하는 인물이란 사실을 그 소수의 대학생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노무현의 열정적인 강연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성이 존재한다. “아! 이 사람 진짜구나.”
기념관 수위와도 악수
그날 노무현은 청중은 물론 4·18기념관 수위와도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고 민주광장을 ‘걸어서’ 빠져나갔다. 그때 내가 그와 악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지금도 확실치 않다. 아마도 조금은 냉정한 자세로 뒤에서 찬찬히 지켜봤을 테지만, 나는 가끔 그와 열정적인 악수를 나눴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실제 난 그와 1대 1로 직접 대면한 적이 없는 희귀한 지지자이자 기자였다). 그리고 이 강연회의 감동을 노사모 홈피에 적어 내려갔다.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 강연 직후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인터넷 정치 시장의 성장과 함께 노사모 회원 역시 2000년 연말을 기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2002년 초에는 팬클럽이 아닌 정당을 대체할 만한 조직으로 성장해 온라인 회원만 무려 5만명에 이르렀다.
1.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귀향을 환영하는 밀양 시민들.
2. KTX 타고 고향에 내려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환송하러 서울역에 모인 시민들.
3. 봉하마을에서 귀향을 축하하러 찾아온 손님을 맞는 노무현 전 대통령.
2001~2002년
무사히 대학을 졸업한 필자는 기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쳤고, 생애 첫 공직 생활을 했던 노무현은 장관 이력이 추가되자 어엿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됐다. 2001년 10월 나는 기자가 됐고 가끔 취재를 핑계로 여의도 허름한 건물에 마련된 노사모 사무실을 찾아간 기억이 난다. 노사모의 열정은 때로 과도하기도 했지만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해 지지도와 인지도가 4~5%에 불과했던 비주류 정치인을 불과 1년 만에 이인제 후보를 바짝 위협할 만한 돌풍의 주역으로 만들어냈다.
민주당의 최고 히트작인 국민경선이 치러지던 2002년 3월 무렵 나는 동아일보 ‘신동아’ 부서에서 막내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는 정치기사와 무관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초년기자로 그의 선전을 기사가 아닌 가슴으로 응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태풍을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아니 감격적이었다.
그해 3월31일에는 민주당 전북지역 경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익산체육관을 찾기도 했다. 당시 득표율 2위를 기록 중인 노무현은 광주 승리를 발판으로 분위기를 압도해나가고 있었다. 기세에 위축된 1등 이인제는 색깔론과 지역감정으로 분위기 반전을 노렸지만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명계남씨를 앞장세운 전북 노사모는 전북지역 1위를 기념해 목이 터져라 노무현을 연호하고 체육관 앞에서 기차놀이를 하면서 한바탕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광경을 멀찌감치 지켜보던 정동영 추미애 등 민주당 중진 의원들이 내비친 부러움에 가득찼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궂은일을 도맡아 다 처리해주는 정치인 팬클럽이라니…, 조금은 유치하고 어설퍼 보이지만 정치인 입장에서 얼마나 꿈에 그리던 현실일까? 그렇게 노사모를 앞세운 그는 거짓말처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됐다.
팬클럽이 만들어낸 대통령후보
노사모는 서울 시내에서 가끔 번개 형태의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번인가 종로 모임에, 그리고 내가 거주하던 동작 모임에 나갔더랬다. 모임에 나가 동아일보 기자라고 밝힌 적도 있고 굳이 밝혀야 할 필요가 없었던 적도 있다. 그저 ‘노무현 현상’이 너무도 신기했고 과연 이러한 평범한 시민들의 지지가 비주류 정객을 나라의 최고 권력자로 밀어 올릴 수 있을지가 화두였다. 초창기 모임에는 평범한 직장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의사나 교수 심지어 공무원까지 참석해 한국사회 개조를 논할 정도가 됐다.
한번은 고등학교 동기를 종로 번개모임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는 경찰대를 졸업하고 경위로 일하던 엘리트였음에도 노사모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알면서도 농담 삼아 다음과 같이 찔렀다.
“공무원이 무슨 이유로 노무현을 지지하는 거지?”(나)
“공무원도 대한민국 시민이잖아(웃음). 그리고 그 이외에 어떤 대안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나는 그가 한국사회를 새로운 단계, 즉 민주공화국으로 진입시킬 것으로 믿어. 그의 정치 인생을 돌아보면 간단하게 검증되잖아. 그가 과연 우리의 기대를 배신할 수 있을까? 아니 배신하지 못하게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감시하는 거야.”
“그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진정으로 바뀔까?”(나)
“그렇게 돼야지…. 네가 기자라면 여기 나온 사람들의 표정을 반드시 유심히 살펴보렴.”
그 뒤로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모임이나 집회에 나온 사람들의 표정을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물론 이와 정반대의 시각도 없지 않았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선배 한 분은 한나라당 주변에서 특급참모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신분이 상승한 김용태 의원(서울 양천을)이 바로 그다. 그는 종종 맥주잔을 앞에 놓고 ‘노풍(盧風)’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을 내리곤 했다. 그는 ‘노무현의 장점이 곧 한나라당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정했지만 결론은 늘상 똑같았다.
“나와 내기해도 좋아! 네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다고 믿는 것은 순수함이자 순진함이라는 것을. 현실정치가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건 네가 초짜 기자이기 때문이지. 물론 계속 취재해가면서 배워야 할 숙제일 테지만….”
2002년 6월초 한 통의 e메일이 나를 흔들었다.
“노사모 3차 총회에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희망 2002, 이제 다시 시작이다/ 행사일시 6월29-30일/ 장소: 무주리조트/ 노사모의 염원인 12월 승리를 결의하고 약속한다.”
문성근의 경멸적 시선
동작 노사모가 예약한 버스를 타고 무주리조트로 향했다. 취재가 목적이기도 했지만 꼭 한 번쯤 노사모 전국 모임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오랜만에 접한 노사모는 어느새 대학가 운동권인 한총련처럼 긴밀하게 조직됐고, 실제 유사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수천명의 노사모는 한가족처럼 웃고 떠들며 문화축제를 치러냈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스러운 축제와 서로를 배려하는 정신에 감동받기도 했지만 불편한 장면도 없지 않았다. 행사의 상당부분이 ‘안티조선 운동’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언론개혁 콘텐츠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1. 2004년 3월 노무현 탄핵에 반대해광화문에 모인 시민들.
2. 2002년 4월 민주당 대통령후보 서울지역 경선에서 명계남씨를 앞세운 노사모 회원들.
3. 2002년 문성근씨가 주축이 된 개혁적 국민정당 추진위원회 발족식.
그 자리에 초대받지 않은 동아일보사 소속 기자로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조금은 씁쓸한 감정으로 행사를 지켜봐야 했다. 저녁 모임에 앞서 노사모의 정신적 지주인 문성근씨를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그도 방송인이었기에 굳이 기자 신분을 숨긴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취재 온 ‘신동아’ 정호재 기자입니다.”
“(깜짝 놀라며) 아니! 동아 기자가 여기 왜 있어요?”
그는 무척이나 당황했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어색한 정적이 수초간 지속됐을까. 그의 적대적 눈빛에 나도 적잖이 흔들리고 있었다.
“취재를 금지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는 회비 다 내고 참석했는데요.”
차마 노사모 회원이란 얘기는 꺼내지 못했다. 그는 내게 잠깐이나마 언론의 편향성에 대해 하소연을 쏟아냈지만 그뿐이었다. 그와 그렇게 차가운 대화를 나누다 보니 모임에 참석한 의미가 없어졌다. 모두가 술로 밤을 지새우던 그날 갑작스레 불청객이 된 기자는 콘도 한구석에서 잠을 청했을 뿐이었다. 무주리조트에서 2002월드컵 터키와의 준결승 경기를 관람했고 이후 갑작스러운 서해교전 사태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진 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튿날 아침 한적한 무주구천동 계곡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며 ‘다시는 노사모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최근 당시 상황을 정리한 수첩을 꺼내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흡사 대학 운동권 출범식 같은 분위기, 때려잡자 조선일보 분위기의 유치함, 몇몇 노사모 지도부의 예비정치인 같은 행보, 그리고 문성근-명계남씨의 오버스러움….’ 돌이켜 보면 그 정도 일에 상처 받은 내가 매우 순진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이.겼.다! 이.겼.다! 노.무.현, 대.통.령!”
2002년 11월24일 밤 11시. 집에서 TV를 보던 룸메이트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택시를 타고 곧장 서울 강남구 르네상스 호텔로 달려갔다. 그곳에선 후보단일화를 외치던 정몽준과 노무현이 벌이는 사상 초유의 여론조사 룰렛 게임결과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역사를 현장에서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길 10여 분. 곧 역사적 발표가 청중을 흥분시켰다. 순간 뒤쪽에서 “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괴성의 주역들은 민주당 관계자보다 오히려 뒤편의 노사모였다. 그 오밤중에 정몽준 지지자들은 한줌에 불과했지만 노무현 지지자들은 무더기로 모여들어 마치 게릴라처럼 강남을 휘저었던 것.
“꼭 2번을 찍자”
떠올려보니 2002년 그에 대한 기억은 쉼 없이 끄집어내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정몽준의 지지 철회’해프닝이 벌어진 2002년 12월18일 밤이 아닐까 싶다. 당시 기자는 노무현과 정몽준의 종각역 마지막 유세를 지켜본 뒤 대학교 선후배들과 송년회를 겸한 모임에 참석 중이었다. 대다수 1990년대 학번이 노무현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자 1980년대 학번 선배들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던 기억이 새롭다.
“쯧쯧, 너희가 어떻게 기호 4번을 놔두고 2번을 찍을 수 있니? 선배는 이해할 수가 없다.”
선배의 일성에 잠시 숙연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갑작스러운 뉴스에 술자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정몽준의 지지철회 소식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전달된 것이다. 우리는 술 먹는 것도 잊고 다시 이 소식을 친구들에게 문자로 알리며 “꼭 2번을 찍자”고 결의 비슷한 것을 했더랬다. 따지고 보면 당시 그 뉴스는 지지율 상승에 조금은 나사가 풀린 지지층을 재결집시킨 승리의 결정타가 아니었을까.
2003년
“노무현의 업적이란 당선된 것 그 자체에 있지, 그 이상을 기대하긴 쉽지 않을 걸?”
선배 기자는 노무현의 참모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국정운영 능력에 대해서는 뿌리 깊은 불신감을 드러냈다. 따지고 보면 참여정부의 핵심을 이룬 안희정 이광재 등 상당수 핵심참모가 1980년대 초중반 학번에 불과했다. 게다가 노무현 자체가 의정 경험이 일천하고 뼛속까지 비주류인 정치인이 아니던가. 원칙과 이상은 숭고했으되 그것을 현실과 조화시켜낼지가 관건이었고 기자들은 그 점을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
언론과의 허니문 기간도 잠시, 실제 참여정부는 곧장 아마추어적인 행태로 여러 약점을 노출시켰다. 대표적인 사건이 TV로 생중계된 ‘검사와의 대화’ 그리고 야당이 발의한 ‘대북송금 특검’ 법안을 덜컥 수용한 선택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주간동아’ 소속으로 법조 분야를 담당한 기자는 참여정부와 정통 보수세력인 법조계의 불협화음을 꽤 근접 거리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노무현과 검찰, 그리고 노무현과 대법원 혹은 헌법재판소의 대결은 참여정부의 흥망성쇠를 보여준 하이라이트였다.
권력의 칼을 놓다
‘검사와의 대화’를 TV를 통해 지켜본 한 재경지검 검사는 흥분해 당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도대체 저런 얘기들을 일반 시민에게 공개해서 대통령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일부 정치검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일에 충실합니다. 따지고 보면 완전하게 비정치적인 조직이 가능한가요? 그런데 대놓고 대통령이 검찰 고위직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면 우린 뭐가 되나요? 대통령은 깨끗하고 흠결 없으니 다들 입 닥치라는 건가요?”
이어 재야의 불만을 무릅쓰고 덜컥 수용한 ‘대북송금 특검’은 지지층 분열과 향후 6차례나 계속된 특검정국이라는 두 가지 부담을 동시에 안겼다. 당시 특검에 파견 나온 검사와도 그와 비슷한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 역사나 민족 화해 흐름에 대해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 되지 않을까 고민하지 않나”란 질문에 당시 한 검사는 “우리는 가치 판단보다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고 응수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100% 옳은 말이었고 노(盧)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암시이기도 했다.
물론 노무현은 자신의 그 선택에 대해 논리적인 일관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시대적 사명은 베일에 가려 있던 권력의 본질을 철저하게 전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노의 파격적인 선택은 기존 권력의 패러다임을 깨부숨과 동시에 자신의 권력 근거까지 허물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놓아버린 칼을 검찰이나 국정원 등 사정기관이 가로챈 꼴이 됐기 때문이다.
“아니, 왜 이런 (너절한) 사건에 대통령이 언급되지?”
정권의 영혼을 갉아먹는 특검이 그의 재임기간 중 모두 6번 진행됐다. 측근비리 의혹과 유전사업 비리의혹은 아예 최측근인 이광재만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검찰의 칼날은 측근비리를 넘어 대선자금 수사로 향했고 정치판 자체를 뒤흔들었다. 지금 와서 곰곰이 따져보면 검찰과 노무현의 악연은 ‘한 사채업자와 부동산 업자의 갈등’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썬앤문 게이트’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기자는 이 사건과는 인연이 깊다.
“서울구치소에 구속된 김성래라는 사채업자가 동업자 문병욱 썬앤문 회장이 상당한 대선자금(95억원)을 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하고 있대….”
당시 데스크로부터 들은 제보는 꽤 뜨거운 취재거리였다. 게다가 친분 있는 변호사가 실제 김성래를 접견한 선임변호사이기도 해 취재 여건이 나쁘지 않았다. 당시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 보였던 썬앤문 사건의 실체는 간단했다.
‘부산상고 출신의 문병욱 썬앤문 그룹 회장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측근들로부터 시달림(?) 끝에 이광재에게 1억원의 정치자금을 건넸다. 이를 고마워한 노무현은 그를 청와대로 초청해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 문 회장은 이 사실을 주변에 조금은 허황된 어조로 자랑을 한다. 결국 그와 결별한 김성래란 사채업자가 재판과정에서 노 대통령을 끌어들인…’
문제는 노무현과 문 회장의 연관성이 드러나자 문이 받았던 과거 여러 특혜의 원천이 혹시 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 것. 실제 농협이 사기대출의 희생양이 됐고, 국세청은 특별세무조사 면제 의혹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썬앤문 사건은 최근 벌어진 박연차 사건의 판박이 사건이었다.
당시 이 사건을 무모하게 ‘게이트’로 규정한 H일보와 거의 동시에 취재에 들어가 앞선 기사를 몇 번 쓰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처럼‘게이트’란 수식어는 내걸지 못했다. 대신 몇몇 단독 기사를 쓰자 농협과 검찰이 몸이 달았다(사실 그때는 그 기사의 의미조차 알지 못했다). 법조기자를 한 뒤 처음으로 검사들로부터 뜨거운 러브콜을 받았다.
당시 몇몇 검사는 너무도 겸허한 자세로 ‘노통과 이 사건은 완전 무관하다’고 기자에게 개인 브리핑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검사는 참여정부 시절 승승장구했고 지금도 검찰 지휘부로 살아남았다. 문제는 그가 포함된 검찰이 썬앤문 사건과 거의 흡사한 박연차 사건을 통해서는 전직 대통령을 겨냥해 ‘포괄적 뇌물죄’를 흘렸으니 검찰이 정치적이란 얘기는 두말하면 입만 아플 것 같다.
이광재에게 편지를 쓰다
썬앤문 사건은 즉각 측근비리 특검으로 확전됐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측근을 압박해가며 판을 크게 벌였고 결국 후폭풍은 한나라당 대선자금 수사로 되돌아왔다. 계속된 러시아 룰렛게임에서 이긴 것은 놀랍게도 노무현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기자는 종로구의 한 빌라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광재가 썬앤문의 돈 1억원을 실제 받았는지가 너무도 궁금해 어느 날 밤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이다 평창동에 산다는 이광재에게 편지를 전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존경하는 이광재님. 저는 현재 당신과 관련된 사건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혹시 썬앤문으로부터 돈을 받았는지, 왜 그랬는지, 사죄 인터뷰를 할 의향은 없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애정을 담뿍 담은 ‘신파조’의 편지를 작성해 새벽 4시 이광재의 평창동 빌라로 걸어가 편지봉투를 스카치테이프로 그의 집 문에 붙여놓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아마 그 편지는 이광재씨 부인이 먼저 봤나 보다. 부인과 전화한 직후 이광재씨와 통화가 됐으니 말이다.
그와 어렵사리 대화도 나눴고 법정에서도 몇 번 스치듯 만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내 편지에 대한 뚜렷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무척이나 담담한 자세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2004~2007년
대선자금 수사란 또 한 번의 러시안 룰렛 게임이 있었고 전무후무한 탄핵이란 후폭풍이 한국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국민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헌법과 헌법재판소의 존재에 대해 다시 살펴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소란은 그치지 않았다. 대법관 임명을 둘러싼 4차 법조파동이 있었고,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결, 그리고 이용훈 대법원장 임명이라는 법조계 이슈들이 숨 가쁘게 참여정부를 관통해 지나갔다. 또한 검찰을 개혁하고자 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안 혹은 경찰 수사권 부여안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언제나 논란은 논란으로 끝났을 뿐 노무현은 법조계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겨우 인사권만 행사하고 물러나고 만다.
그도 지쳤겠지만 이를 바라보는 관객 역시 노무현식 개혁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수많은 개혁입법은 산으로 올라갔고 그의 로드맵은 프로그램 오류인지 매번 ‘삑사리’가 났다. 그 원인이야 여럿이겠지만 다만 입바른 소리만 늘어놓고 한 치도 진보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해 참을성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2008년
2008년 2월22일은 금요일이었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근무일이었기에 나는 잠시 시간을 내 삼청동에 들러 8년 전 노사모 모임에서 만난 ‘절세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님, 시간 되시면 차나 한잔….”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그를 두 번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선거사무실에서, 한 번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노사모 출범에 기여한 그녀는 2002년 대선 운동에 참여했고 그 공로로 청와대에서 5년간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짐을 정리하던 그녀의 표정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5년이 금방 가버리네요.”(나)
“그러게요. 이제 월요일 아침에 가시는 길에 박수만 치면 끝이 나는군요.”
“보람은 좀 있었나요?”(나)
“글쎄요. 역사적 평가와 별개로 만일 먼 훗날 (5년을) 되돌아본다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
비교적 가깝게 모셨던 사람들조차 노무현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웠다. 사실 나 같은 지지자도 마음이 돌아섰는데, 지근거리에서 일상의 번잡함을 함께했던 사람이라면 그런 감정이 없는 게 오히려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봉하마을은 안 가보세요?”(나)
“네. 청와대 별정직은 서울 부근에서 대기해야 해서요.”
퇴임식날 봉하마을로 따라가다
고심 끝에 노무현의 마지막 길을 동행하기로 했다. 그가 퇴임 직후 봉하마을로 향하는 행로를 KTX로 잡았다는 얘기를 접하고 그 직전 KTX를 예약했다.
노무현을 따라 봉하마을로 향하는 길은 놀랍게도 그에 대한 감춰놓은 애정을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경남지역 노사모들은 밀양부터 봉하마을까지 거리 곳곳을 노란 풍선으로 치장하고 서울이 아닌 고향으로 복귀하는 노짱을 뜨겁게 환영하고 있었다.
빙긋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건도 있었다. 넘쳐나는 인파로 밀양에서 봉하로 가는 차를 잡지 못해 잠시 방황할 때다. 두 명의 청년이 기자를 향해 “봉하마을까지 2명 급구!”를 외쳤다. 즉석 카풀의 주인공은 알고보니 충남 노사모 회원들이란다.
퇴임식 날 “야~기분좋다”고 외친 노무현을 뒤로하고 마을회관에 임시로 마련된 기자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기억도 새롭다. 밤 12시 무렵 작업복 차림의 평범한 40대 남성이 기자를 흔들어 깨웠더랬다.
“대구에서 일 마치고 내려왔는데, 혹시 행사 관계자세요?”
아니라고 손을 휘젓는 기자에게 그는 거대한 유리병을 들이밀었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온 노짱에게 빈손으로 오기 싫어 송이버섯주 한 병 구해왔어요. 귀한 것이니 꼭 좀 전해주세요.”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나도 다음날 아침 경호실을 방문해 그 술을 건네주고 봉하마을을 떠났다.
그러고 보면 난 봉하마을을 두 번이나 방문한 흔치 않은 기자다. 그것도 귀향(歸鄕)축제와 귀천(歸天)축제라니…. 그의 죽음이 알려진 후 일주일간 잠을 이루지 못했고, 밥맛이 없었으며, 정신이 나간 듯 PC화면을 보며 눈가의 이슬을 훔쳤다. 봉하마을 부엉이바위까지 다녀온 것도 모자라 대한문 앞과 서울역 앞, 심지어 서울역사박물관 부근에서도 서성거렸다.
안도현 시인의 추도사에 앙앙 울다
그와 관련된 취재는 언제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안겼다. 불행히도 내가 속한 회사는 그와는 대척점에 자리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스트레스임과 동시에 행복한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가 잘하면 잘해서 좋았지만, 실패하면 그것 자체가 언론인의 자존심을 세울 기회가 됐다. 아니, 현실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포악하기에 그처럼 바보같이 행동해선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 자위했다.
5월29일 정오 서울광장에선 그를 위한 마지막 노제가 치러지고 있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인 안도현(48) 시인이 추도시를 낭독했다.
“뛰어내렸어요 / 당신은 무거운 권위주의 의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
아아, 부디 편히 가시라는 말, 지금은 하지 않을래요
당신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이 나라 오월의 초록은 저리 푸르잖아요/(…)
살아남은 우리는 당신에게 졌어요, 애초부터 이길 수 없었어요 /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아아, 노무현 당신!
문득 중학교 시절 선생님이자 문학반 지도교사였던 안도현 시인이 오버랩됐다. 그는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 전교조 활동을 하다 퇴직당했고, 이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섰다. 중학교 동창들은 몇 번씩 그를 찾아가 안부 인사를 드렸다고 했지만 난 부끄러워서 찾아보질 못했다.
“저 선생님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래”하며 존경을 금치 못했던 한 소년이 20년 뒤 동아일보 기자가 되어 전직 대통령의 노제가 치러지는 단상에서 생뚱한 관계로 맞이한 기분은, 비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가 3월, 삭힌 홍어를 안고 노무현을 만나고 왔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를 읽곤 앙앙 울어버렸다. 내게도 노무현을 만날 기회가 적지 않게 널려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그와 진실로 한 시대를 함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말이다.
에필로그
2008년 9월 민주당 정세균 대표에게 흥미를 가져봤다. 그는 고학을 통해 어렵사리 성공한 노무현과 이명박 중간쯤에 위치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이 이명박 대통령의 인생 역정과 비슷하다고 홍보하고 있었다. 그게 답답해 그와 인터뷰 도중 다음과 같이 하소연했던 기억이 난다.
“대표님, 젊은 사람으로서 민주당은 지지하고픈 매력이 생기질 않습니다. 과감하게 친노를 끌어안으시고 다시 열린우리당 정신으로 돌아가시는 건 어떤가요?”
“그건 어렵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제되지 못한 말로 국민에게 큰 상처를 준 인물입니다. 정권을 잃게 한 1등공신이고요.”
고작 어투 때문에 정권을 놓쳤다고 생각하다니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노무현 서거 이후엔 노무현의 정신을 잇겠다고 투쟁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치판이란 항상 이런 곳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