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호

‘현장취재’ 봉하마을 뒷이야기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일 새벽 초등학교 동창에게 전화 걸었다

  • 윤희각│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toto@donga.com│

    입력2009-07-08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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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0만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5월23일부터 29일까지 7일간 국민장을 치르는 동안 봉하마을 분향소를 다녀간 추모객 수다. 봉하마을은 노 전 대통령이 한때 환경친화적인 농촌사업을 꿈꾸었던 곳. 그에게 ‘잔인한 달’이었던 4월 이후 봉하마을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현장취재’ 봉하마을 뒷이야기

    봉하마을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하는 추모객들.

    야아~기분 좋다.”

    지난해 2월25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귀향 환영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48분간 이어진 귀향 소감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이후 마을에서 친환경농법인 봉하 오리쌀 재배, 인근 하천인 화포천 정화 활동, 장군차 묘목 심기, 봉화산 산림 정비 등 여러 가지 농촌사업을 벌이며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난해 11월부터 본격화된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친형 노건평씨, 부인 권양숙 여사, 아들 건호, 딸 정연씨 등 가족에게로 확대되면서 그의 귀향은 ‘귀양’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자연인으로 해방감을 맛본 시간은 9개월 남짓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4월7일 자신의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에 사과문을 발표한 뒤 모든 언론은 봉하마을 사저를 주목했다. 4월30일 검찰에 소환될 때까지 많게는 100여 명의 취재진이 마을에 몰려들면서 그는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200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 렌즈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측근들은 이 기간 노 전 대통령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했다고 했다. 그에게 ‘잔인한 달’이었던 4월 이후 봉하마을 사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5월23일 새벽. 노 전 대통령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평소 노 전 대통령은 별일이 없으면 오후 11시 이후에는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오전 5시에 일어나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하거나 간단한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청와대에 있을 때와 비슷한 일과 패턴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다. 모두가 잠들 시각인 오전 1시2분, 이어 1시20분에 진영 대창초등학교 동창인 서성대씨 휴대전화로 두 차례 연락을 했다. 현재 서씨는 진영읍내에서 부동산 중계소를 운영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로 돌아온 뒤 서씨와 두 차례 만났지만 새벽에 전화통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노무현’이름으로 부재중 전화 2통

    “아침에 일어났더니 ‘노무현’ 이름으로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왔더라고요. 전화번호는 ○○○-1400번이었어요. 노 전 대통령이 전에 이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어 ‘노무현’으로 전화번호를 저장해놓았어요. 그래서 오전에 사무실에서 해당번호로 전화했더니 전화기에서는 없는 번호라는 음성이 들렸어요. 전직 대통령 사저 전화번호여서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보안번호였던 것 같아요. 어쨌든 ‘친구가 새벽에 왜 전화했지’라고 생각하며 무심결에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친구가 죽었다는 뉴스가 나오더라고요. 충격이었지요.”

    서씨는 노 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하기 전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며 마지막으로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씨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시절에 몇 차례 도움을 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서거 며칠 전 또 다른 이상 징후가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측근에게 봉하마을 사저 뒤뜰의 풀을 뽑고 사저 벽에 걸려 있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액자를 떼라는 지시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개설한 웹 사이트 ‘민주주의 2.0’에서 꾸준히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뜻을 이룬다는 뜻의 고사성어 ‘우공이산’과 성씨인 ‘노’를 합쳐 ‘노공이산’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저 컴퓨터 바탕화면에 남긴 유서에서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다’고 썼다. 이는 건강 때문에 자신이 개설한 비공개 연구 카페에서 활동하지 못해 괴로웠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귀향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에서 관료로 활동한 학자, 측근들과 함께 연구카페를 개설해 진보주의 연구에 몰두했다. 이곳에서 그는 수시로 진보주의, 민주주의, 정치적 협상 등 다양한 주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서거 8일 전인 5월15일 이후로는 연구카페에 더 이상 글을 올리지 않았다.

    글쓰기와 책읽기는 그에게 생활의 중요한 낙이자 존재감을 확인하는 일이었지만 측근과 가족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한 4월 이후에는 이마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비서진에 따르면 4월 이후 이 카페에 노 전 대통령이 글을 올린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거친 상황이 다가오면서 노 대통령은 마음이 번잡한 탓에 집중력이 떨어져 독서와 글에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을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도 “당시(4월 중순 이후) 노 전 대통령 특유의 농담이 사라졌고 부산 사투리의 억양마저 없어진 듯 대통령의 말투는 나지막했다”고 전했다.

    ‘현장취재’ 봉하마을 뒷이야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을 마감한 부엉이바위.

    측근들은 “서거 직전 여러 가지 정황은 노 전 대통령이 생을 마감하겠다는 결심이 섰음을 암시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국민장 7일간 봉하마을에서 있었던 일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5월23일부터 29일까지 7일간의 국민장 기간에 봉하마을 분향소에는 110만명의 추모객이 다녀갔다. 진영읍 인구(3만여 명)의 40배 가까운 인파가 일주일 동안 주민 120여 명이 살고 있는 봉하마을을 다녀갔다는 계산이다. 2002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봉하마을 방문객(1만여 명)과 지난해 귀향 환영 모임 때 1만2000여 명의 100배 수준이다.

    이 때문에 진영읍내에서 봉하마을까지 모든 도로와 인근 공단 주차장 할 것 없이 빈 공간이 있는 곳이면 금방 주차장이 돼버렸다. 갑작스러운 조문 인파에 숙소 품귀 현상도 빚어졌다. 진영읍내 10여 개 모텔은 전국에서 온 조문객과 취재진이 몰리면서 첫날부터 아예 동이 났다. 일부 조문객과 취재진은 숙소를 구하지 못해 마을에 텐트를 치거나 뜬눈으로 밤을 새울 정도였다.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진 국민장답게 봉하마을에서는 다양한 기록도 나왔다. 분향소에서는 국화꽃 20만여 송이를 사용했는데 100만명 이상의 조문객이 몰리면서 국화 한 송이를 5번가량 재활용하기도 했다. 조문객을 대접할 쇠고기국밥을 만드는 데 쌀 72t이 소비됐다. 하루 평균 쇠고기 800kg과 김치 300kg, 간식(빵, 우유, 라면) 14만개가 제공됐다. 등록된 취재진만 600여 명이나 됐다. ‘근조(謹弔)’라고 적힌 검은색 리본은 당초 60만개를 준비했지만 나흘 만에 동이 나 40만개를 추가로 주문했다.

    전국에서 몰린 자원봉사자도 5000명이 넘었다. 마을에서 배출된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50L, 120L들이 쓰레기봉지 1만2000여 개를 사용했다고 김해시가 밝혔다. 김해시 관계자는 “ 실제 조문객 수는 마을 입구 도로가 아닌 주변 농로로 들어온 인파를 합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진이 600여 명이나 몰렸지만 봉하마을 취재는 결코 쉽지 않았다. 5월23일부터 며칠간 노 전 대통령의 일부 지지자들이 “언론이 대통령을 죽였다”며 취재진에게 욕설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들은 일부 언론사의 취재용 비표번호를 미리 파악한 뒤 비슷한 번호를 가진 기자를 발견하면 “당신 ○○일보 기자 아니냐. 당장 여기서 나가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24일 새벽에는 모 방송사 중계차가 마을 밖으로 쫓겨났고 조선일보 기자도 마을 밖으로 쫓겨났다. 서거 첫날 임시 천막 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던 기자들에게 화를 내며 천막을 철거했다. 24일에도 노 전 대통령 지지자로 보이는 10여 명이 동아일보 여기자를 둘러싸고 욕설을 하며 머리채와 멱살을 잡았다. 이 기자는 인근에 있던 기자들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봉변은 피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9인승 승합차를 몰고 다니며 일부 신문 기자들의 뒤를 쫓아다녔다. 서거 당일 경남 양산부산대병원에서는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폭행을 당해 전치 2주의 진단을 받기도 했다.

    일부 신문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노트북 앞면에 있는 자사 로고가 적힌 스티커를 떼버린 채 기사를 작성하거나 아예 마을 밖에서 기사를 송고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서거 이후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권양숙 여사가 봉하마을에 계속 머물지가 우선 관심사다. 참여정부 측근들은 “권 여사님은 사저에서 계속 생활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저는 지하 1층, 지상 1층, 건축 연면적 1227㎡ 규모로 3채의 독립건물이 연결된 형태. 권 여사가 혼자 기거하기에는 무리라는 분석이 많다.

    그동안 사저에는 노 전 대통령과 권 여사 부부만 기거했다. 비서관과 경호원 등은 마을 내 경호동이나 연립주택, 김해시 등지에서 출퇴근했다. 권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충격에다 피로가 쌓이는 등 심신이 허약해져 양산부산대병원에 입원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의 간호를 받기도 했다. 건호, 정연씨는 노 전 대통령의 49재 날인 7월10일까지 사저에 머물며 어머니를 돌볼 것으로 알려졌다. 장지도 결정해야 하고, 노 전 대통령의 유지인 ‘아주 작은 비석’도 마을 내에 곧 세워야 하기 때문에 유족들의 의견은 매우 중요하다.

    노 전 대통령의 형인 건평씨는 구속집행정지로 5월23일 석방된 뒤 6월1일 오후 서울구치소에 재수감됐다.

    부엉이바위에 얽힌 이야기

    건평씨는 재수감되기 전날인 5월3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일부 의견 차이가 있어 장지와 비석 문제는 유족과 참여정부 측근들이 논의해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생을 잃은 뒤) 심한 두통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며 “재판에 성실하게 임하겠지만 집행유예나 사면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투신한 장소는 봉화산(해발 140m) 부엉이바위다. 오래전 이 바위에 부엉이가 많이 앉아 있었다고 해서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졌을 때 정작 진영읍민들은 부엉이바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읍내에서는 이곳이 ‘자살바위’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높이 45m, 경사 70도 가량으로 봉화산 해발 100m 지점에 있다. 노 전 대통령 사저 뒤편에서 500m, 노 전 대통령의 유골함이 임시로 안치된 봉화산 정토원에서는 200m가량 떨어져 있다.

    한 진영읍민은 “예전에도 이곳에서 한 읍민이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자살이 드물던 시기에 이곳에서 사고가 발생해 주민들 사이에 ‘자살바위’라고 알려졌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읍민은 “봉화산 기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노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투신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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