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서거 소식을 듣고 500만이 넘는 시민이 조문했다. 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 기간에 200만이 넘는 시민이 조문해 기록을 세웠으나 이 기록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깨졌다. 왜 수백만의 시민이 몇 시간을 기다려가면서까지 조문하기 위해 줄을 섰는가? 생전에 그에게 비판적이었던 사람들, 그를 조롱하던 사람들, 그를 적대시하던 사람들도 조문 대열에 섰다.
전직 대통령의 비리와 부정을 캐서 망신을 주고 사법처리함으로써 ‘노무현 시대’를 청산하려던 정부도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러주고 국가예산으로 공식 분향소를 차려서 시민들로 하여금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추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은 정부가 지원하는 공식 분향소보다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차린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와 고인의 고향인 봉하마을 분향소에서 조문을 했다.
그런데 생을 마감하면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면서 화해를 원했던 노 전 대통령의 유지(遺志)와는 달리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도 보수와 진보는 분열하고, 정파는 대화하지 않으며, 가해자와 피해자는 화해하지 않는다. 나라는 쪼개져 노 전 대통령의 죽음 자체가 새로운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노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검찰은 국민장 기간에 근조(謹弔)리본을 달지 않았다. 신문 지면이나 인터넷 공간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보수우익 인사들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고 사자(死者)의 죽음을 폄훼하고 모진 언어로 주검을 훼손하고 부관참시하는 등 상례(喪禮)에 어긋나는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문객 수에서 노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이겼고, 추모의 정치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이겼다. 패배한 죽은 권력이 승리한 살아 있는 권력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내었다(死孔明走生仲達)’는 고사를 연상시킨다.
산 권력이 죽은 권력 앞에 떨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는 노 전 대통령 유서의 한 구절 앞에 이명박 정부는 허둥댔다. 정부는 애도 기간에 조문객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든 서울광장을 경찰버스로 봉쇄했다. 덕수궁 분향소는 국민장 기간 중에는 폐쇄하지 않았지만 국민장이 끝나자마자 경찰이 강제로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영정과 조화가 훼손되고 짓밟혔다.
노제에서도 대나무 만장을 PVC로 바꾸도록 강요했다. 노제의 제관이던 도종환 시인이 꼬집은 것처럼 “산 권력은 죽은 권력 때문에 벌벌 떨고” 있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 봉하마을에서 칩거하던 노무현은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비극적 죽음 이후 다시 살아났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처럼 죽은 뒤에 그의 정신이 부활하여 그의 정적(政敵)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같이 노 전 대통령의 조문정치는 고인이 살아 있었을 때 그가 펼친 정치처럼 범상치 않았다. 편 가르기가 있었고, 격렬한 애정표시와 섬뜩한 증오의 표현이 동시에 있었고, 친노와 반노, 서민과 기득권, 진보와 보수 간 ‘혀의 전쟁’이 있었다. 죽은 뒤에도 국민 사이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히 나뉜다. 생전에 그를 증오하던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증오의 언어를 뱉었다. 뱉은 말은 다시 담을 수 없었고 그들은 다시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격받고 저주받았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노무현을 애도하기 위해 분향소로 갔는가? 대통령 재임시 그는 그렇게 인기 있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요샛말로 하자면 레임덕이 빨리 온 대통령이었다. 그는 1200만표라는, 50%에 가까운 투표자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퇴임했을 때 그의 지지자 수는 조문객 수보다 적었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왜 그렇게 많은 시민이 투표장에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분향소에, 그것도 두 시간 넘게 기다리면서 조문행렬에 동참하려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