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7월7일 목장갑을 끼고 삽을 든 채 마을 청소를 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의 귀향생활은 성공적이었다. 5년 내내 소란스럽고 소모적인 정쟁에 시달렸던 그는 봉하마을에서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언론에는 그가 손녀를 태운 유모차를 자전거로 끌고가는 사진이 실렸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Sundance Kid)에 ‘Rain drops falling on my head’ 노래와 함께 나오는 목가적인 장면을 봉하마을이라는 한국 농촌에서 보여주었다. 동네 주민과 함께 봉하쌀도 재배하고 환경정화운동도 벌였다.
노 전 대통령을 보러 오는 사람도 늘어갔다. 그리고 그는 인터넷을 통한 국민과의 온라인 소통을 재개했다. 그는 서울을 떠나 낙향해 이름 없는 촌부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래의 대통령이 퇴임 후 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 같았다.
보수와 소통 불가능한 비주류 대통령
그러나 그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낙향생활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노 전 대통령 측근으로 확대되었다가 대통령의 가족을 겨냥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노 전 대통령에게 직격탄으로 날아들었다. TV방송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봉하마을에서 대검찰청까지 갔을 때 이미 노 전 대통령의 자존심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대검찰청에 다녀온 후 노 전 대통령은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언론은 “억대의 시계를 선물 받았다가 논두렁에 버렸다” “자식들이 미국에서 호화주택을 구입했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보도함으로써 전직 대통령을 파렴치범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노 전 대통령과 오랫동안 반목 관계에 있던 검찰과 주류 언론은 노무현을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하지 않았다. 그는 모멸감과 치욕에 떨었을 것이다. 그는 수사가 계속될수록 그 치욕은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 측근들에게 미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세를 진 분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선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노 전 대통령은 보수세력의 집단 이지메(따돌림)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그는 치열한 국민경선 끝에 당시 집권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에도 한국의 범보수세력으로부터 집권 여당의 후보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상고(商高)밖에 안 나온 노무현이 대통령감이 되지 못하며, 한국의 이념적 경계가 허용하는 범위 밖에 있는 급진적 정치인이고, 비록 변호사이며 국회의원을 지냈다고는 하나 사회의 밑바닥 출신이기 때문에 주류 보수세력과는 소통이 불가능한 비주류 인물이라고 보았다.
노무현은 보수세력의 비토뿐 아니라 새천년민주당 내의 주류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후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노무현 흔들기’에 들어갔다. 범보수세력의 집단 이지메와 당내 주류세력의 흔들기로 노무현의 지지율은 계속 하락해 급기야는 10%대로 떨어졌다. 다행히 정몽준 후보와의 후보단일화에 성공해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노무현의 가슴속에는 보수세력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피해의식은 보수세력에 대한 노무현의 언사를 더욱 강경하게 끌어갔다. 실제로 노무현은 보수세력이 원하는 정책을 대부분 채택했다. 이라크 파병, 부동산 정책, 각종 신자유주의적 규제완화, 민영화 정책, 한미FTA 체결 등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노무현을 지지했던 진보세력은 노무현이 “좌회전 신호를 넣고 우회전을 한다”고 그의 ‘우경화’를 비판했으며, 노무현 자신도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형용모순적(oxymoron)인 모호한 용어로 자신의 변신을 옹호하려 했다.
그럼에도 노무현은 한국의 주류 보수세력으로부터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집권한 후 얼마 안 되어 열린 ‘검사와의 대화’에서 평검사들이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대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노무현은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지요?”라고 되받아쳤다. 그의 말은 점점 더 품위를 잃어갔고 보수세력과의 불통은 계속되었다.
2004년 탄핵사태로 노무현과 보수세력은 되돌아갈 수 없는 ‘불통의 강’을 건넜다. 실제로는 보수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면서도 노무현은 한국의 주류 보수세력에게 독설을 뱉으면서 조롱했다. 보수세력도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대통령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는커녕 계속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칙주의자의 승리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으나 보수세력의 노무현 이지메는 계속되었다. 노무현에 대한 보수세력의 앙금은 보수적인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도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봉하마을 신축 사저를 아방궁이라 부르고, 그가 김해 봉하마을에서 무슨 일을 꾸밀 것 같다는 추측 기사를 남발했다.
그럼에도 이때까지 노 전 대통령은 평정심을 유지한 것 같다. 그러나 박연차게이트가 터지면서 주류 보수세력과의 대결이 재연되자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명박 정부가 이러한 집단 이지메에 합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의 측근에서부터 시작해 가족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에게 수사의 칼날이 겨누어오자 그가 받은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놓은 상황에서 집단 이지메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상실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한국 정치인 중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공격적이고, 말 잘하고, 댓글 잘 쓰던, 칠전팔기의 오뚝이 같던 그가 유서에서 고백하듯이 잠도 오지 않고, 댓글도 쓸 수 없고,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우직한 노무현은 자신의 가족, 측근, 그리고 충성스러운 지지자와 후원자에게 줄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생명의 끈을 끊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