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큐슈시의 강력한 환경 정책으로 수질이 회복된 무라사키강에서 시민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 강에 서려 있는 옛이야기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 사람들은 칭얼대는 아이를 꾸짖을 때 “계속 울면 무라사키강에 집어넣을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시커멓고 악취를 내뿜는 이 강이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민들은 무라사키강가를 지날 때면 으레 손수건을 꺼내들고 코를 막았다.
이곳이 지금의 모습을 얻은 것은 기타큐슈시가 1969년부터 1980년까지 11년에 걸쳐 무려 2만5000㎥의 오니(汚泥)를 긁어낸 덕분. 기타큐슈시는 이처럼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극복한 ‘기적의 도시’다.
기타큐슈시청을 찾았을 때 환경국 환경정책부 가지와라 히로유키 계장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왼쪽에는 매연으로 뒤덮인 잿빛 하늘과 황갈색 바닷물이 찍힌 사진 두 장, 오른쪽에는 청명한 하늘과 푸른 바다가 펼쳐진 사진 두 장이 각각 프린트돼 있었다.
“보십시오. 왼쪽이 1960년대의 기타큐슈입니다. 오른쪽은 오늘날의 풍경이지요.”
일본내 최악의 공해 지역
기타큐슈시는 1970년대까지 일본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였다. 1901년 근대식 용광로를 갖춘 일본 최초의 제철소가 문을 열면서 ‘철강도시’가 됐고, 철로와 항만을 갖춘 편리한 물류 환경 덕에 시멘트 기계 화학 등 중화학공업도 발전했다. 환경오염은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고도성장기 시절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얻은 참혹한 부산물이다.
기타큐슈시 환경국 환경감시부의 히가시다 미치코씨가 들려준 1950~60년대 대기오염 상태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1965년 제철소가 있는 야하타(八幡)구 시로야마(城山) 지구에서 측정한 결과 한 달에 1㎢당 108t씩 분진이 떨어졌다. 특히 검은 분진이 많아 ‘야하타의 참새는 검다’는 말이 다른 지역까지 퍼질 정도였다.
제철소와 맞닿아 있는 연안 도카이(洞海)만의 수질 또한 심각하게 오염된 건 마찬가지였다. 1969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지역 해수의 용존산소량은 0.6㎎/ℓ(한국 해수욕장 수질기준은 7.5㎎/ℓ이상)였다. 수은, 비소 같은 유해물질도 고농도로 포함돼 당시 언론은 ‘대장균조차 살 수 없는 물’이라고 했다.
시민들은 1950년대 도카이만에 빠진 한 선원이 무사히 구조되고도 며칠 만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한 뒤부터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사망원인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타큐슈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다의 유해물질이 그의 생명을 빼앗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타큐슈시 전역은 공포에 휩싸였고, 자녀들의 건강을 걱정한 어머니들이 가장 먼저 들고일어났다. 야하타구와 더불어 대기오염이 가장 심각한 지역인 도바타(戶畑)구 주부들이 1957년 ‘도바타 부인협회’를 결성하고 문제 제기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깨끗이 세탁해 널어놓은 빨래가 얼마 만에 더러워지는지, 청소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먼지가 내려앉는지 등을 조사해 결과를 발표했고, 시청에도 같은 데이터를 보내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야하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기타큐슈시 공무원 시로야마씨는 “어린 시절 어머니는 빨래를 널기 전 늘 내게 빨래봉을 걸레로 닦으라고 말씀하셨다. 수시로 닦아내도 닦을 때마다 걸레가 새까맣게 변하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이러한 생활경험이 시민운동으로 이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