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과 현대의 조화’는 진부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이 도시는, 옛 건물을 보존하되 그 안에서 현대적 편리함을 누릴 수 있도록 개선하는 노하우를 꾸준히 축적해왔다. 옛것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환경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앞 광장의 오후.
늦은 밤, 달빛에 강물이 반짝이는 스트라스부르의 옛 중심가 그랑딜르(Grande ille)가 뿜어내는 교교한 아우라는 지구 반 바퀴를 홀로 날아온 여행자를 갖가지 상념에 빠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솟아오른 성당의 첨탑과 중세 거리를 잇는 고풍스러운 다리,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수백 년 된 건물밖에 없는 낯선 분위기. 기억하지 못하는 14세기쯤의 어느 전생으로 되돌아온 게 아닐까 하는 아찔한 상상이 머릿속 가득히 피어오른다.
그런데 저건…. 머릿속을 유영하던 상념을 단숨에 제압하는 물체가 눈앞에 나타난다. 날렵한 유선형으로 잘 빠진 금속과 유리의 탄탄한 조합체가 매끄럽게 석조 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단연 비현실적이다. 중세의 거리에 등장한 SF 영화 속 물건이라니.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지금은 21세기이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스트라스부르가 자랑하는 도심형 대중교통수단 트램(tram)이다.
중세 프랑스의 모습이 간직돼 있는 프티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연상케 하는 대성당이 하늘 높이 첨탑을 세운 것이 이 시기였고,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갈고 닦은 곳이 이 도시였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강변의 프티프랑스(Petite France)는 1988년 지정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세기 후반 유럽연합 의회(European Parliament)가 자리하면서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떠오른 이 도시에는 또 하나의 별명이 있다. 바로 ‘프랑스 제일의 환경도시’다.
온실가스가 없는 대중교통
스트라스부르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트램.
소음이나 진동이 거의 없고, 매연도 배출하지 않으며, 생김새마저 깔끔한 이 지상 전기열차는,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내 중심부와 주택가·공장지대로 이뤄진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5개 노선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의 구간에서 레일 위에 잔디를 심어놓은 것 역시 트램의 친환경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스트라스부르 시청의 홍보담당자 베로니크 프티프레즈씨는 말한다.
“트램에 사용되는 전기는 주변지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양이 80%를 차지합니다. 나머지는 인근 강의 수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고요. 한마디로 트램 때문에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거의 없는 셈이지요. 우리가 트램을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친환경 교통수단의 전형’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트램 운영을 담당하는 기업 CTS (Compagnie des Transports Stras-bourgeois)는 독특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공공자본과 민간자본이 공동으로 참여하되 항상 공공지분의 의결권이 앞서도록 유지하는 형식. 기업 자체는 시에 소속된 형태지만 민간기업의 경영노하우를 접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시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운영비용 역시 요금에서 충당되는 부분은 25%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공공영역의 보조금으로 부담한다.
흥미로운 것은 운영비용을 보조하는 주체 가운데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포함돼 있다는 것. 친환경 대중교통 수단의 확산을 고민하고 있는 유럽연합 측은 스트라스부르와 계약을 맺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 트램의 선구자인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각 도시에 트램의 설치나 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제공하는 형태다. 트램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던 1990년대 중반에는 매주 3~4팀의 방문단이 이 도시를 찾았을 정도라고 한다. 몽펠리에나 리용, 보르도 등 프랑스 도시들은 물론 아일랜드의 더블린이나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도 스트라스부르의 도움을 받아 트램을 도입했다.
500km, 13만명
일요일 아침, 자전거를 빌려 타고 유럽의회를 향해 나선 길은 상쾌하다. 트램에 자전거를 싣고 오란제리 공원으로 가서 시내로 되돌아오는 코스가 가장 좋다는 추천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가을 바람결 사이로 멀리 유럽의회의 멋들어진 남색 유리 의사당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이어지는 강변의 자전거도로는 고색창연한 도시의 가을풍경을 마음껏 선보인다. 물 위를 떠가는 유람선, 이어지는 성당의 첨탑들, 강가에 늘어선 카페의 노천좌석에서 볕을 즐기는 노부부까지.
어느새 다시 번화가로 접어들었나 싶은 자전거도로의 끝에 거대한 거품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베를린, 서쪽으로는 파리를 향하는 TGV가 멈춰 서는 스트라스부르 기차역이다. 1883년 완공된 건물을 창조적으로 재활용한 건축미학. 역사 앞 옛 광장 부분을 덮어씌운 유리와 철골의 타원형 돔이 마치 거대한 거품처럼 보이는 것이다.
왕복 차선의 가운데 만들어진 시내 자전거도로의 끝은 바로 이 건물의 지하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나선형 경사로를 타고 내려가면 만나는 곳은 트램 정거장과 대형 환승 주차장, 그리고 한꺼번에 500대의 자전거를 세울 수 있다는 자전거 보관소다.
바로 옆 자전거 대여소의 점원 줄리 도이치만씨는 “시 외곽에서 트램이나 기차를 타고 출근하는 이들이 시내에서 이용하는 자전거로, 오늘 같은 주말에는 가득 차 있지만 평일 낮에는 거의 텅 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보았던 트램 종점의 자전거 보관소에는 자전거가 거의 없었던 게 기억난다. 아마 금요일 저녁 트램에서 내린 이들이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갔으리라.
트램 건설이 결정되던 1989년 당시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의 자가용 의존도는 72.5%에 달했고, 대중교통 이용률은 11%에 불과했다. 이를 개선하는 것이 트램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만큼, 건설되는 노선의 종점이나 주요 역에는 환승 주차장과 자전거 보관소가 함께 지어졌다. 외곽에 거주하며 시내로 출근하는 시민들을 위한 장치였다. 덕분에 1호선이 완성된 뒤 그랑딜르 지역에 진입하는 자가용의 수는 28% 이상 줄었다는 게 시 당국의 통계다.
트램을 타고 도시를 살펴보는 동안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자전거 보관소는 모두 50여 개에 달한다. 지하화한 곳도 있고, 건물 형태로 만들어진 곳도 있으며, 좁은 공간에 많이 보관할 수 있도록 세워놓는 형태도 있다. 시 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건설된 자전거도로는 총 500km. 규칙적으로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만 13만명에 달한다는 숫자는 단연 프랑스 최고다.
국경을 넘어선 환경 협력
스트라스부르 기차역의 유리돔 내부.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의 주요 건물을 친환경적으로 바꿔나가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2025년까지 주요 건물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절반으로 떨어뜨린다는 목표로, 이미 모든 다중이용시설을 에너지 저소비 건물로 단장했다. 각급 학교의 에너지 소비에 관한 모니터링 체계 구축, 에너지 절약 캠페인, 대중교통과 관용차를 천연가스 자동차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외곽에 위치한 옛 공장지대들도 친환경적으로 리모델링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네 군데에서 진행하고 있다. 도시의 주요산업이 제조업에서 의학과 연구개발, 금융업 등 3차 산업으로 빠르게 이동함에 따라 골칫거리로 전락한 낡은 공장을 에너지 효율이 높은 비즈니스·주거·레저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다. 재활용 건축자재를 주로 사용하고 대안적 에너지 생산설비를 구축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소화한다는 것이 기본 콘셉트. 자동차 출입이 아예 금지되어 대중교통으로만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이 프로젝트는 내년부터 공사에 돌입할 예정이다.
스트라스부르의 환경 정책 운용에서 눈여겨볼 또 한 가지 특징은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다. 시의회와는 별도로 운영되는 자문기구 형태의 지역평의회가 대표적. 구역별로 15개가 있는 이들 평의회는 자원자와 추첨으로 뽑힌 이들로 구성된다. 자전거도로 건설이나 공원 개보수, 학교 증축 같은 지역의 주요 사안은 모두 이들 평의회 월례회의의 검토를 거친다. 시의 환경정책과 문화정책을 모니터링하는 전문가 워크숍, 외국인 거주자들과 청소년들이 시의 현안을 청취할 수 있도록 하는 회의체도 구성돼 있다.
공기와 물을 공유하는 주변 도시와 환경정책을 조율하기 위한 시스템도 구체적이다. 심지어는 국경 너머 독일 지역 지자체들과도 2005년부터 협의체를 구성해 공공 인프라 투자나 환경설비 구축 등 다양한 사안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 독일이냐 프랑스냐를 가리지 않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할 수 있는 앰뷸런스 제도나 초등학교 공동 교육프로그램 구성 같은 구체적인 제도는 이미 시행에 들어갔다. 국경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지역공동체를 형성해나간다는, 우리로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200년 뒤를 생각하며
내 못된 성격 탓일까. 도시를 보면 볼수록, 부럽다는 생각 못지않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유럽 산업화의 초기 원형에 해당하는 이 도시의 사람들은 우리가 보릿고개와 전쟁에 허덕이던 수백년 전부터 이렇듯 탄탄한 다리와 하늘 높은 건물,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놓고 살았던 것이다. 그 오랜 시간 전에 만들어진 도로와 거리가 지금 쓰기에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게 가장 샘나는 사실이었다.
1809년 한양에 살던 김 첨지가 우연히 외계인의 타임머신을 얻어 타고 2009년의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당도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과연 서소문 밖에 있던 자신의 옛집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1809년 스트라스부르에 살고 있던 식자공이 2009년으로 온다면? 그는 십중팔구 낯익은 골목을 걸어 익숙한 다리를 지나 자신의 집을 찾아올 것이다. 운 좋게도 그가 강 어귀 프티프랑스에 살고 있었다면, 아마도 고스란히 보존된 자신의 집 문고리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말은 진부한 용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해 1000년이나 전에 오늘날의 모습을 대체적으로 완성했다는 이 도시는, 옛 건물을 보존하되 그 안에서 현대적 편리함을 누릴 수 있도록 개선하는 노하우를 꾸준히 축적해왔다. 유서 깊은 거리를 관통하는 트램처럼, 200여 년 전에 지어진 호텔 안에 설치된 유리 엘리베이터처럼, 고색창연한 시가지 곳곳에 깔아놓은 무선인터넷 포트처럼,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조화해야 하는지 고민한 흔적이 모든 곳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보존과 개선의 조화는 수백년 된 건물이 오늘도 불안감 없이 쓸 수 있을 만큼 튼실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난 세기, 보존 대신 싹쓸이 개발을 택하며 도시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온 우리에게 스트라스부르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그것이 아닐까. 지금 만드는 우리의 건물과 거리, 도시는 200년 뒤의 후손들을 생각하며 지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우리도 그럴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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