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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종횡무진 공간 읽기 ②

서울월드컵경기장

꿈과 열정이 타오르는 거대한 용광로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서울월드컵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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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월드컵경기장

스태프는 한 편의 경기를 완전하게 완성하는 숨은 공신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방패연과 돛배와 소반으로 시작된 이 경기장의 ‘전통 이미지 효과’는 그 내부로까지 실속 있게 이어진다. 단순히 외관에만 과거의 문화적 원형을 덧씌워놓은 게 아니라 일반인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안전시설이나 보행시설까지 전통의 점과 선이 콘크리트 면들을 여유 있게 채우고 있다. 서쪽 주출입구의 귀빈석 로비는 한눈에도 한옥의 대청마루를 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산 대리석을 유연하게 깔아놓은 짙은 색깔의 로비는 안동의 병산서원이나 지리산 화엄사의 각황전 마루를 떠올리게 한다. 그 마루 위로 성벽에서 따온 묽은 색의 벽이 흐르고 맨 위 천장을 서까래가 탄력 있게 가로지른다.

경기장 운영을 맡고 있는 서울시설공단 서울월드컵경기장사업단 김영진 경영관리부장의 안내를 따라 경기장의 세부 영역까지 들어가본다. 축구 관련 칼럼을 10년 가까이 써온 필자로서는 10년 가까이 이 경기장을 출입하면서도 취재기자석과 관중석 외에는 현장 답사를 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해소하는 좋은 기회였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백제 온조왕 15년에 새 궁실을 지으면서 채택한 당시의 건축 이념인데, 이후로 한반도의 많은 건물은 특별한 목적이 아닌 한 ‘검이불루 화이불치’정신을 지켜왔다.

특히 검박한 일상을 고결한 윤리적 기준으로까지 추존해온 조선의 유학 세계관에서 이 개념은 단순한 건축 포장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의 관계 맺음을 통칭하는 이념으로 승격되었다. 도성의 궁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병산서원, 각황전을 비롯해 전주의 객사, 담양의 소쇄원은 물론 구한말에 지어진 익산 나바위선당(화산천주교회), 강화도 온수리 성공회성당, 당진 공세리 성당 등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오랜 건축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안팎에서도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구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서쪽 주출입구에서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귀빈 전용 통로의 대청마루와 서까래가 그렇고 귀빈 스탠드와 관람석도 마찬가지다. 귀빈에 대한 정중한 대접과 신변 안전을 위해 따로 진출입 동선과 간이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는 정도이지 결코 ‘귀빈’이라는 말에 상응하는 호사스러운 치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귀빈 스탠드 역시 좀 더 ‘정중하고 안전한’ 정도이지 과장된 그 무엇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귀빈 안전을 위한 방탄유리 역시 무릎 정도 높이인데, 이는 신축 당시 재임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나치게 높은 방탄유리는 권위주의의 일면’이라는 견해를 밝힌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김영진 경영관리부장은 6만여 석의 관중석 스탠드를 가리켰다. 그 ‘무채색의 행렬’을 가리키며 “여러 경기장에서 다들 좌석에 형형색색을 입혔지만, 이 경기장에는 오직 콘크리트의 무채색에 가까운 색깔의 좌석으로 세팅했다”고 말했다. 무채색은 언뜻 특별한 개성이 없고 둔탁해 보이지만 차분하고 음전하다. 사실 엄청난 규모의 경기장에 온갖 색까지 입히면 크기만 과장되어 위압적으로 느껴질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천박해 보이기 쉽다. 그런 점을 감안해 이 경기장은 과감히 무채색으로 통일했고 지붕재로 쓰인 테프론 막이나 스탠드 그리고 경기장 안팎의 사인보드까지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음전한 색을 유지하고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한 단면이다.

한국 건축계의 오랜 화두 실천

설계 과정의 한 에피소드로, 당시 설계팀은 기본 설계안을 제출하면서 이 경기장의 이름을 ‘우리세움(Wooriseum)’으로 짓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직접 세운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로마의 콜로세움이 갖는 역사적 경연장의 상징성까지 고려한 작명(作名)이다. 이 경기장을 IMF 사태 이후의 사회 심리적 상태와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이라는 대규모 행사에 응하는 자긍심의 표현으로 여기는 신념이 담겨 있다. ‘우리세움’이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경기장 안팎의 크고 작은 디테일에 이 신념이 유연하게 적용되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세계 곳곳의 대규모 공사 현장에서 확인되는 뚜렷한 흐름은 ‘개별 지역의 특수한 문화적 전통’을 지나치게 현실화하는 것을 꺼린다는 점이다. 단적인 사례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버드 네스트’다. 2006 독일월드컵 개막 경기가 열린 뮌헨의 축구 전용 경기장 ‘알리안츠 아레나’를 설계하기도 한 스위스 건축회사 ‘헤르조그 & 드 므롱’이 설계한 이 베이징의 새 둥지는 가로 297m 세로 320m로 9만1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중국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다. 강철을 엮은 형상이 거대한 새 둥지를 닮아 ‘버드 네스트’라는 별칭을 얻은 이 경기장에서 ‘중국 문화’를 직접적으로 추출하기는 어렵다.

경기장 증개축의 모범이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올드 트래포드’나 아스널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잉글랜드 축구의 상징인 뉴윔블리 스타디움 등에서도 특별하게 ‘영국성’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대규모 건축물이나 도시 공간 조성은 (두바이, 송도, 청라 등이 보여주듯이) 지역성보다 세계성을 염두에 둔다. 그에 반해 10여 년 전 지어진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한국 건축계의 오랜 화두를 마지막으로 실천해낸 셈인데, 일단 그 성취가 적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1세기형 복합 문화 공간

오늘날 경기장은 ‘경기 진행’ 목적으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문화적 기능까지 훌륭하게 만족시키는 공간이어야 한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설계 및 신축 당시 매우 낙후됐던 서울 서북부 지역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목적을 안고 출발했다. 생태공원, 영화관, 쇼핑몰, 생활스포츠 시설 등이 ‘축구’라는 단 하나의 경기 종목으로부터 능률적으로 파생되어 상호 연관성을 이뤄야 하는 공간이다.

이 대목은 어떤 면에서 설계자 책임 밖의 일이다. 물론 설계자는 대규모 하드웨어가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충분히 고려해 작업한다. 주차, 출입, 대피, 편의 등 세부 요건의 결합에 의해 경기장이라는 전체가 구성된다. 그러나 일단 그 상상이 현실이 되고 거대한 경기장과 그 부속 기능들이 완료되고 나면 그 다음은, 김영진 부장의 말을 빌리면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 발상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문화적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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