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레르미타 vs 핑구스

전통품종 중심 블렌딩으로 승부수 이방인의 단일 토착품종 고집

  • 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입력2009-07-29 15:5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레르미타 vs 핑구스
    세계 최대 경작 면적을 자랑하는 ‘무적함대’ 스페인의 간판 와인 중에 레르미타(l‘Ermita)와 핑구스(Pingus)가 있다. 세계 와인시장에서 둘은 스페인 최고 와인 자리를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선의의 경쟁을 하는 두 양조장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전통적인 명산지 리오하 지역을 생산 거점으로 택하지 않은 것과 두 명의 양조가가 모두 40대란 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핑구스는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 레르미타는 프리오라토 지역에 터전을 잡았다. 스페인 와인 지도는 스페인 와인의 시장점유율이 낮은 우리나라 애호가들에게 무척 낯설다. 하지만 이런 곳들이 대표적인 생산지이니 그 위치와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북서쪽에 위치한 리베라 델 두에로는 리오하 다음가는 명산지다. 리오하는 스페인 최고의 생산지다. 원산지 등급인 DO(프랑스의 AOC에 해당)보다도 한 단계 높은 DOC 지역으로 한동안 유일하게 이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고급 와인의 명성이 주변에 비해 약하고 리베라 델 두에로, 프리오라토 등 경쟁 산지에 신흥 명문 양조장이 우후죽순 설립돼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리오하는 점점 구시대의 생산지로 퇴색하고 있다. 리오하가 침체되는 동안 리베라 델 두에로와 프리오라토는 실질적인 간판 생산지로 진화했다.

    1982년 DO로 지정된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에는 로마시대에 포도밭이 조성됐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 즉 국토회복 운동인 레콘퀴스타(Reconquista) 시기인 10~11세기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오랫동안 버려진 이곳을 다시 소생케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중세의 수도사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마을 시토에서 시작된 시토파 수사들은 수도원 클로 드 부조에서 포도밭 개간에 힘썼고, 밭의 토양 차이에 눈을 떠 엄청난 양조의 비밀을 체득했다. 이를테면 클로 드 부조는 유럽 와인 양조의 ‘싱크 탱크’였던 셈이다. 수도사들은 교황청의 부름을 받아 유럽 방방곡곡으로 근무지를 옮겨 다닐 때도 근엄한 종교 수칙뿐 아니라 양조 기술도 함께 전수했다.

    신규 유입 세력, 핑구스

    리베라 델 두에로에도 시토파의 손길이 닿았다. 12~13세기 수도사들이 이곳으로 부임해 밭을 조성하고 주변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석회암 토양에 조성된 셀러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유서 깊은 지난 시절의 추억을 어루만질 수 있다. 피레네 산맥이 지형적으로 가로막고 있음에도 수도사들을 막을 순 없었다.



    레르미타 vs 핑구스

    핑구스

    중세 수도사들이 이 산맥을 맨 처음 넘은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증표가 있었다. 약 2000년 전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스페인으로 전도여행을 왔다. 그 사도를 따라 수도사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그 수도사들을 통해 경건함과 정화를 목도한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도 오늘날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순례 길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산티아고의 길)’가 그것이다. 약 800km 거리의 끝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를 위한 교회가 세워진 도시다.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은 세 번째 성지 순례 길인 이 길의 종착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는 ‘세인트 야콥’, 우리말로 ‘성자 야고보’로 풀이된다.

    리베라 델 두에로는 이 순례 길 중간에 위치하는데, 순례자들이 몇날 며칠을 걸어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긴 지역이다. 리베라 델 두에로에는 사실 1980년대까지 베가 시실리아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전통과 품질, 그 어떤 척도를 갖다 대도 스페인 최고의 와인으로 평가받는, 그래서 스페인 국왕도 고객이라는 베가 시실리아는 리베라 델 두에로의 간판 양조장이다.

    하지만 그 위상은 가우디의 건축처럼 생뚱맞게 높은 첨탑으로서 존재했다. 즉 베가 시실리아를 빼면 별로 내세울 게 없다는 얘기다. 이 점은 스페인 와인산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러나 원산지로 등록된 이후 외부에서 투자자금이 몰려오고, 전문가들이 정착하면서 리베라 델 두에로는 최고급 산지의 모양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해발 800m 고원에 있는 리베라 델 두에로의 포도밭에서는 포도가 쉽사리 익질 않아 11월에도 수확할 수 있다. 산도 높은 포도 템프라니요를 충분히 무르익힐 수 있는 조건이다. 핑구스는 이런 신규 유입된 세력 중 하나다.

    레르미타 vs 핑구스

    레르미타 라벨

    블렌딩의 안전성

    프리오라토는 오늘날 스페인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 나오는 산지로 유명하다.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져있다. 로마시대에는 지금보다 휠씬 많은 인구가 모여 살았다. 그러니 포도밭과 양조장도 발달했을 게 틀림없다. 오래전 와인으로 유명했던 프리오라토는 오랜 세월 무명의 신세였지만 역사서적과 기술서적을 통달한 일단의 와인 양조가들에 의해 1970년대 들어 재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옛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프리오라토가 생산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데는 양조가 르네 바르비에르의 도움이 컸다. 그는 양조장 클로 모가도르를 세워 잊혔던 로마시대 와인 생산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를 따르는 젊은 양조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각기 양조장을 건설하면서 스페인에는 새로운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통 품종인 가르나차에 천착했다. 남프랑스에서 ‘그르나슈’로 불리는 이 검은 포도는 스페인의 대표 품종이다.

    프리오라토는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남동쪽의 바다로 향하는 경사면을 제외하고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발 600m에 조성된 포도밭에는 가르나차와 카리녜나(남프랑스의 카리냥)가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아 잡초처럼 자랐다. 양조가들은 이런 포도와 국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을 함께 재배했다. 대부분 보르도에서 수학했던 이들은 단일 품종보다 여러 품종이 섞인 와인에 애착을 보였다.

    블렌딩의 매력은 어느 한 가지 품종에 흠결이 있어도 다른 품종의 특성으로 덮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의 절묘한 배합을 몸소 체험한 이들은 가르나차의 장점을 살리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결함을 다른 품종으로 만회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시행착오는 보르도에서 견습을 하고 있던 한 젊은이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이름은 알바로 팔라시오스, 그가 레르미타를 탄생시킨다.

    오늘날 스페인의 위력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위세가 그 옛날 대서양을 주름잡았던 무적함대에 근접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피카소, ‘클레이코트의 제왕’ 나달,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살인마를 연기해 오스카상을 거머쥔 하비에르 바르뎀, A매치 35게임 무패 기록을 달성한 스페인 국가대표 축구팀과 함께 예약자 명단이 6개월 이상 밀려있는데도 여전히 예약 전화가 빗발친다는 레스토랑 ‘엘 부이’만 봐도 그렇다.

    와인 명산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최고급 와인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와인의 맛은 품종, 지역의 다양성, 사람에 달려있다. 여기서 품종은 토착 품종을 가리킨다. 보르도의 카베르네 소비뇽, 부르고뉴의 피노 누와, 피에몬테의 네비올로, 토스카나의 산지오베제, 독일의 리슬링, 오스트리아의 그뤼너 벨트리너 모두 토착 품종이다. 스페인의 리베라 델 두에로에는 템프라니요가 있고, 프리오라토에는 가르나차가 있다.

    두 번째 요소는 지역의 다양성이다. 와인 메뉴는 다양해야 질리지 않는 법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폭넓은 와인세계를 널리 인정받는 것도 이런 다양성의 결과다. 프랑스에 육박하는 면적의 국토에서 다양한 와인을 길어 올리는 스페인은 지역의 다양성에 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와인의 핵심은 사람이다. 이제부터 논의하는 두 사람이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촉망받는 양조가이며, 각기 스페인 최고 와인 중 하나를 빚어내고 있다.

    레르미타를 만드는 사람은 알바로 팔라시오스(Alvaro Palacios)로 스페인 출신이다. 핑구스를 만드는 피터 시섹(Peter Sisseck)이 덴마크 출신인 점과 뚜렷이 구분된다. 프리오라토의 잠재력을 간파한 알바로는 1965년생으로 40대 기수다. 리오하에 있는 집안 양조장 팔라시오스 레몬도에 합류하지 않고, 자신의 양조장을 건설했다. 그는 보르도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한 후 샤토 페트뤼스와 샤토 트로타누아에서 견습했다. 이탈리아의 명품 와인 사시카이아가 샤토 라피트 로쉴드에서 포도나무를 받아 최고의 슈퍼 토스칸 와인이 된 것처럼, 레르미타는 페트뤼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농익은 포도의 생동감

    청운의 꿈을 품은 그는 고향 대신 프리오라토에 자리 잡았다. 프리오라토에서 가르나차 품종이 번성하는 것을 목격하고, 페트뤼스의 메를로 같은 잠재력을 발견했다. 그리고 1993년에 첫 출시된 레르미타를 통해 페트뤼스와 호주 그랜지의 공통적인 장점을 표현하려 시도한다. 풍부한 향기, 균형 그리고 놀라운 숙성력이 그가 추구하는 목표다. 레르미타의 포도는 아주 가파른 등성이에서 재배되는 탓에 사람 손 외에는 별다른 수단이 없다. 비탈길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면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는 매일 투지를 보이며 밭으로 나간다.

    그는 소출을 극도로 줄여 농익은 포도로 키운다. 60년 이상 묵은 포도나무, 어떤 것은 100년 넘게 묵었다. 이런 나무는 소출이 많지 않다. 그러니 저수확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잠재력을 동원해 소출을 극대화하지 않고 오히려 잠재력을 줄이고 줄여서 농익은 포도알 획득에 몰두한다. 품종은 가르나차 외에 카리녜나와 카베르네 소비뇽이 조금 있다. 매년 3000병 정도 병입한다. 로마네 콩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양이다.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지만 애호가 한 사람이 한 달도 안 걸려 다 마셔버릴 만큼 소량이 들어온다.

    레르미타는 와인 이름이자 밭 이름이다. 포도밭이 있는 산봉우리에 들어선 작은 교회를 보고 알바로가 붙인 이름으로, 불어의 ‘에르미타주(Hermitage)’와 가깝다. 실제로 남프랑스 론강 유역에는 에르미타주 마을이 있고, 그 마을 어떤 산 봉우리에는 교회가 있는데, 유명 양조장 폴 자볼레의 에르미타주 라 샤펠르가 거기서 나온다.

    레르미타 vs 핑구스

    핑구스의 오너 피터 시섹.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2004년과 2005년 빈티지의 레르미타에 대해 98점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높은 평점은 보르도 1등급 샤토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다. 특급 와인의 증표인 숙성력 역시 굉장하다. 파커가 짐작한 레르미타의 수명은 2045년까지로 약 40년 동안 숙성해갈 걸로 보았다. 아주 유혹적인 블랙 체리, 검붉은 산딸기 향내가 난다고 평했다. 레르미타는 한마디로 굉장한 힘과 질감이 느껴지는 풀바디(Full Bodied) 와인이다. 아주 긴 여운을 지녀 삼키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향기가 진동한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가볍고 생동감이 넘친다. 균형이 뛰어나 돌처럼 무거운데 이상하게도 곧 공기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알바로는 전통 포도의 중요성에 매달린다. 그래서 프리오라토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산지 개발에 나섰다. 비에르초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동해 여러 빈티지를 연이어 출시했다. 알바로는 이미 세계적인 양조 스타 반열에 올랐다.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가 2003년에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며, ‘디캔터’ 2009년 7월호에 보도된 ‘와인업계 파워 리스트’(격년 조사)에서 43위에 올랐다. 이탈리아 최고의 양조가 안젤로 가야(47위)를 넘어섰다.

    타국에서의 성공

    스페인 와인산업을 끄는 힘이 스페인에서만 나오는 것 아니다. 양조기술 표준화 덕분에 세계는 이미 고급 기술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포도밭만 좋으면 얼마든지 고품질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최근 들어 고품질 와인의 후보지로 급부상한 스페인을 와인세계에서는 ‘뉴 스페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뉴 스페인의 저력은 내국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다국적 전문가들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와인산업에서 외국인은 그저 컨설턴트다. 잠깐 들러 기술을 지도하고 떠나는 자들이다. 소위 ‘플라잉 와인메이커’는 성수기 때 자기 고장에서 일하고, 비수기에는 적도를 넘어 남반구 혹은 북반구로 날아가 컨설팅을 한다. 스페인은 이러한 컨설턴트를 정착자로 만드는 묘한 힘을 가졌다. 산티아고 거리를 걷는 순례자처럼 외국 컨설턴트들은 스페인 땅덩어리에 매료되어 발바닥으로 포도밭을 누빈다. 철새처럼 계절이 바뀌면 고향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스페인에 터를 마련하고 정착해 고품질 와인 생산에 매진한다. 이런 사람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이가 바로 핑구스의 오너, 피터 시섹이다.

    피터는 양조가 집안 출신답게 이국땅에서 보란 듯이 성공했다. 보르도 그라브에서 양조전문가로 이름을 날린 그의 삼촌 이름도 피터라서 어린 시절부터 핑구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삼촌을 따라 어디든 갔다. 결국 스페인까지 와선 5ha의 오래된 포도밭을 구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템프라니요로 덮인 밭은 볼품없었으나 그는 끈질긴 노력과 뜨거운 열정으로 밭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템프라니요는 가르나차처럼 스페인 토착 품종이다. 리오하와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 잘 자란다. 피터는 오직 템프라니요로만 핑구스를 만든다. 가르나차를 주품종으로 그밖에 여러 품종을 블렌딩하는 레르미타와 구분된다. 아무래도 한 가지 포도를 고집하는 것은 힘겨운 결정이다. 여러 포도를 섞는 것이 보험에 드는 셈인 반면, 단일 품종을 고집하는 건 양조가로서 쉬운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보람은 있다. 완숙한 포도를 얻을 수 있다면, 완벽한 포도를 얻을 수 있다면 그 포도의 특성이 밭의 풍토를 투명하게 드러내기에 ‘개성 와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와인을 담그는 자가 수십만 이상인데, 그들의 하나같은 소원은 자신의 포도밭 특성이 담긴 개성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단일 품종은 그런 매력이 있다.

    출시와 동시에 고급 와인 반열에

    피터는 1995년 빈티지를 시작으로 핑구스를 출시하고 있다. 핑구스 밭은 소출이 극도로 제한돼 1ha당 12헥토리터 정도이며, 빈티지가 아무리 좋아도 20헥토리터를 넘지 않는다. 로마네 콩티가 35헥토리터이니 얼마나 소출을 줄이는지 짐작이 간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한 병도 채 얻지 못할 정도니 희소성이 실로 대단하다. 이는 부르고뉴의 그랑 크뤼에 해당하는 특성이다. 전 세계 와인 애호가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양이라 도저히 수요에 부응할 수 없으니 값이 비싸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거기다 최초의 빈티지는 그 희소성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따랐다. 겨우 325상자(3900병) 생산된 핑구스 1995년 빈티지는 출시되자마자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미국으로 보내는 75상자가 항해 중 풍랑을 맞아 유실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수량이 적은 와인이 사고까지 당하는 바람에 더 구하기 힘들어졌다. 수집가들은 무조건 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무언가를 모으는 사람들은 그러한 에피소드가 가치를 한껏 높인다는 걸 경험적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핑구스는 어떻게 해서 출시되자마자 보르도 1등급 와인과 비슷한 가격에 거래됐을까? 세상에 비싼 와인이 얼마나 많은가. 저마다 자신의 와인이 최고 와인으로 평가받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명성을 얻어 고급 와인으로 대접받는 확률은 아주 낮다. 핑구스는 출시와 동시에 고급 와인 대열에 오른 예외적인 와인이다. 한마디로 핑구스는 신데렐라같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로버트 파커의 평가가 한몫했다. 피터가 보르도에 사는 삼촌(Peter Vinding-Diers)을 만나러 갔을 때, 그 자리에는 보르도 와인 판매상, 영국과 미국의 유명 와인수입상 등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여러 와인을 시음하고 있었는데, 피터가 자신의 와인도 좀 마셔보라고 병을 내밀었다. 전문가들은 항상 새로운 와인에 대해 목말라 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수입상은 이튿날 미국으로 돌아갔고, 파커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핑구스를 소개했다. 파커는 그 품질에 크게 감동받아 갓 데뷔한 와인임에도 높은 평점을 줬다. 파커는 96~100점을 부여하면서 스페인에서 나온 어린 와인 중에 이런 와인은 처음 맛본다며 찬사를 보냈다. 2002년을 제외한 빈티지 전부에 높은 점수를 줬다. 1995년 빈티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평점 98점으로 정해졌다.

    레르미타 vs 핑구스

    와인셀러

    피터는 2002년 핑구스를 만들지 않았다. 그 품질 수준이 상당했는데도 불구하고, 피터 자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2002년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곧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핑구스 2003년부터는 거의 완벽한 점수를 받고 있다. 100점, 99점을 연이어 받으면서 고급 와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피터는 품질을 위해 한 해의 포도를 죄다 강등 조치할 만큼 고급 와인에 대한 신념이 강하다. 핑구스는 4ha 남짓한 포도밭에서 많아야 8000병 나온다.

    피터 시섹의 양조 기술은 아마도 핏줄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삼촌 피터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사촌들도 모두 와인을 만든다. 사촌 한스는 토스카나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만드는 아르지아노의 양조 책임자이고, 또 다른 사촌 안데르스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양조장에서 일하고 있다.

    스페인 양조산업의 떠오르는 태양

    태양만큼이나 뜨겁고 정열적인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와인은 드넓은 땅덩어리 여기저기서 실로 다양하게 양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스페인 와인시장이 구색을 갖추지 못했지만 말이다. 스페인 내륙에 조성된 포도밭들은 뜨거운 태양과 푄현상으로 인한 특유의 고온 건조한 날씨로 인해 물 부족을 겪는다. 그래서 포도나무 심는 방법이 남다르다. 뿌리가 서로 경쟁하도록 촘촘하게 심는 것이 아니라 듬성듬성 심는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스페인은 경작면적에서 세계 톱이다.

    와인문화엔 사람들의 일상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최근까지 스페인 와인이 대량 소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을 보면 스페인 와인은 질보다는 양이다. 하지만 토착 품종의 개성에 눈뜨기 시작한 일단의 양조가들은 품질 향상에 역점을 두고 있다. 소출을 줄이고 포도의 완숙을 기하여 땅 맛을 제대로 표현하는 와인을 등장시켰다.

    ‘디캔터’ 2009년 3월호에 실린 피터 시섹 인터뷰 기사를 보면 피터가 얼마나 소출을 줄이는지 알 수 있다. 양조장에 세무공무원이 와서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조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밭 면적 대비 와인 생산량이 터무니없이 적은 것을 의심한 세무공무원은 혹시나 남은 포도로 몰래 다른 와인을 만드는 게 아니냐고 따져 물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피터는 이렇게 말했다. “내 와인 가격이 300유로이고, 근처 와인들이 6유로인 이유를 나는 설명하고 있다. 그를 수확기에 초대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포도를 땅바닥에 버리는지 목격하게 해야겠다.”

    알바로와 피터는 생산 거점이 다르고 취급하는 품종도 다르지만 보르도 대학에서 와인 공부를 했다는 점과 보르도 양조장에서의 체험, 그리고 가족에게 배운 양조기술, 연령 등에 공통점이 있다. 둘은 최고급 와인 양조에 매진하는 현대 스페인 양조산업의 떠오르는 태양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