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비뇽 블랑은 여름철 무더위를 한잔에 날려주는 새콤하고 상큼한 와인으로 손꼽힌다. ‘반지의 제왕’의 나라 뉴질랜드의 말보로와 유럽 문화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스티리아는 이 소비뇽 블랑의 대표적인 산지다.
- 상큼한 소비뇽 블랑의 맛은 엇비슷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말보로와 스티리아는 뉴질랜드와 오스트리아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판이한 와인이다.
오스트리아 스티리아 치렉 포도밭.
투명하고 순수한 소비뇽 블랑의 매력은 특유의 새콤함과 상큼함에 있다. 소비뇽 블랑의 원산지는 프랑스 루아르 지역이지만, 대량 생산으로 가격이 저렴한 뉴질랜드 말보로 지역이 그 대안으로 꼽힌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오스트리아의 스티리아가 새로운 소비뇽 블랑의 산지로 떠오르고 있다. 소비뇽 블랑의 굳건한 1인자는 역시 루아르 지역이다. 2인자 자리를 놓고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말보로와 스티리아의 현 주소를 찾아가본다. 과연 말보로가 절대왕좌를 차지할 것인가, 아니면 스티리아가 루아르의 정통성을 물려받을 것인가.
왜 소비뇽 블랑인가
소비뇽 블랑은 어떤 청포도일까. 1910년판 ‘포도품종학’의 공저자인 미셸 카조-카자레(Michel Cazeaux-Cazalet)는 소비뇽 블랑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소비뇽 블랑의 아로마는 아주 독특해서 다른 품종과 혼동될 수가 없다. 그것은 바닐라의 아로마와 뮈스카 포도의 아로마와 비교된다.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와인은 단일한 맛을 가진다.”
소비자가 열광하는 이유는 소비뇽 블랑의 다채로운 맛에 있다. 보르도 대학의 드니 뒤부르디외(Denis Dubourdieu) 교수는 “소비뇽 블랑의 맛은 자몽, 유칼립투스, 패션프루츠, 토마토 잎, 구즈베리, 구아바, 흰 복숭아, 아스파라거스 수프, 아카시아 꽃을 연상시킨다. 병에서 몇 년 숙성되면 좀 더 고급스러운 맛이 나는데 약간 연기 냄새가 나며, 부싯돌 느낌이 있고, 어떨 때에는 트뤼플 향내가 있다”고 한 세미나에서 발표했다. 좀 쉽게 표현하자면 소비뇽 블랑의 맛은 풀맛이요, 잔디나 풀을 벤 후에 풍기는 식물성 향이다. 시퍼런 풋사과의 상큼함도 있고, 자몽이나 귤의 신맛도 있다. 오크 숙성한 소비뇽 블랑은 특유의 바닐라 향기가 버무려져 풍성한 질감 가운데 크림 같은 기름진 맛도 난다.
프랑스 와인에는 프랑스의 인문학적 요소가 깃들어 있지만, 신생국가들의 와인은 그렇지 않다. 뉴질랜드산 와인에는 이 나라가 자랑하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통째로 녹아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자연의 원초성, 뉴질랜드의 개성은 이러한 자연에서 나온다. 뉴질랜드의 국조(國鳥)는 ‘키-위-’하고 운다는 키위새다. 오직 뉴질랜드에만 산다는 키위새의 이름을 따라 우리는 뉴질랜드 사람들을 키위라고 부른다. 특이한 동식물 군락을 잉태한 지리학적 특징은 와인까지 개성 강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수많은 와인 가운데 총체적으로 봐서 뉴질랜드 와인만큼 확실한 이미지를 지닌 종류는 없다. 뉴질랜드 와인은 한마디로 특유의 신맛이 활기를 띠는 와인이다.
뉴질랜드는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따지고 보면 일찌감치 소비뇽 블랑으로 전세계에 확실하게 알려졌다. 그리고 소비뇽 블랑은 다른 곳이 아닌 말보로 지역에서 맨 먼저 재배됐다. 강력한 담배 브랜드 말보로처럼 말보로 지역은 소비자를 소비뇽 블랑에 중독되게 만들었다. 와인전문가 오즈 클라크(Oz Clarke)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이전의 어떤 와인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것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면서 등장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비자를 중독시키는 맛, 말보로
뉴질랜드 와인 경작지의 절반이 말보로에 있다. 가장 큰 규모의 와인 산지인 말보로는 뉴질랜드 남섬의 북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그 일대는 우리의 다도해 국립공원과 상하 대칭된다.
뉴질랜드 와인의 역사는 일천하지만 그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뉴질랜드 와인을 일찍부터 영국시장에 수입 유통한 존 애버리(John Avery MW)는 “뉴질랜드의 와인산업이 1970년대에 개시된 것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1973년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함으로써 더 이상 영국과의 전통적인 교역 조건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뉴질랜드는 농업에서 타개책이 필요했다. 이에 뉴질랜드 정부는 와인산업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달려온 이민자들이 30년쯤 전부터 와인의 불모지를 본격적으로 개간하기 시작했다. 말보로에 처음 소비뇽 블랑을 심은 양조장은 거대 양조회사 몬태나(Montana)다. 미국 시장에서는 브란콧이라는 이름으로 팔린다. 미국의 몬태나주와 이름이 같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름을 지은 것이다. 몬태나의 최초 빈티지는 1979년. 그러나 정작 말보로 소비뇽 블랑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린 이는 몬태나가 아니라 클라우디 베이 양조장이었다. 1985년 빈티지가 출시되면서부터 소비자는 말보로의 소비뇽 블랑을 뉴질랜드의 와인으로 인식하게끔 되었고, 클라우디 베이는 금방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이 추세는 유지되고 있다.
말보로의 강력한 대안, 스티리아
뉴질랜드의 포도 재배 환경은 남다르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밤낮의 일교차가 크며, 가을비가 별로 없고, 배수가 잘되는 충적토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뉴질랜드 와인은 날지 못하는 키위를 대신해 전세계를 날아다니는 효자 수출품이 되었다.
잰시스 로빈슨이 신참기자로 근무했던 월간지 ‘와인 앤 스피리트(Wine&Spirit)’가 2008년 보도한 바에 따르면, 말보로는 와인업계 종사자에게 질문한 원산지 인지도 평가에서 8위를 차지했다. 이는 샴페인, 보르도, 부르고뉴, 리오하, 캘리포니아, 코트뒤론, 샤블리 다음 가는 결과로 이탈리아의 모든 원산지를 능가하는 대단한 힘을 보인 것이다. 그 유명한 키얀티는 이 평가에서 말보로 다음 순위인 9위에 올랐다.
유럽 중심에 위치한 오스트리아는 화이트 와인의 수준이 세계적이다. 하지만 이는 와인전문가의 세계에나 통할 뿐, 일반 소비자는 오스트리아 와인을 거의 알지 못한다. 한국에서 오스트리아 와인을 수입하는 곳은 겨우 두 군데밖에 없다. 영국 와인전문 월간지 ‘디캔터’의 에이미 위스로키(Amy Wislocki)는 “세계의 와인 음용자들 대부분이 오스트리아 와인의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썼다.
뉴질랜드 말보로에서 생산되는 소비뇽 블랑의 우수성을 알린 클라우디 베이.
이런 무명의 오스트리아 명산지 중에서 외래 품종 소비뇽 블랑에 천착하는 지방이 스티리아다. 지난 30여 년 동안 오스트리아 와인을 지켜보고 있다는 와인평론가 스티븐 브룩(Stephen Brook)은 ‘디캔터’ 기고문에서 스티리아 소비뇽 블랑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스트리아 와인의 강점은 토착 품종으로 와인을 만드는 데 있기 때문에 외래 품종은 발붙이질 못한다. 그럼에도 스티리아에서는 소비뇽 블랑이 성공했다.”스티리아의 소비뇽 블랑은 천편일률적인 맛을 낸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말보로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탈리아 중심에 위치한 토스카나의 풍광이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듯, 스티리아의 경관 역시 빼어나다. 오스트리아의 남단에 위치한 스티리아는 슬로베니아와 접경을 이룬다. 스티리아는 북쪽에 위치한 다른 와인 산지들과는 달리 대부분 드라이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데, 이런 경향 역시 슬로베니아와 흡사하다. 나라 전체 경작지의 5% 정도에 불과하지만 품종이나 스타일은 다채롭다. 특히 개성 강한 소비뇽 블랑과 샤르도네는 오스트리아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스티리아의 주도는 그라츠다.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여주인공이 숨어들어갔던 도시이기도 하다. 그라츠는 수도 빈 다음가는 도시이지만 인구는 25만명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라츠는 오스트리아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2003년에는 유럽연합이 매년 지정하는 ‘올해의 유럽 문화수도’에 선정되었고, 구(舊)시가는 유네스코 자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보디빌더이자 배우, 그리고 현재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그라츠 출신이다.
스티리아는 우리로 치면 지리산 일대의 전남이나 경남에 해당하는 산악지대다. 해발 600m의 봉우리에 조성된 차도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데, 길가에는 깔끔한 호텔, 양조장, 레스토랑들이 늘어서서 관광객을 부른다. 유럽인들에게 이런 스티리아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1순위로 꼽힌다. 울창한 삼림을 산책하고, 맛난 화이트 와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멋진 나무숲을 병풍 삼아 가파른 언덕에 조성된 스티리아의 포도밭은 오늘날 다뉴브 강가의 포도밭과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고품질 화이트 와인을 끌고 가는 쌍두마차다.
2009년 6월, 슬로베니아와 접경을 이루는 지역에 포도밭을 두고 있는 양조장 테멘트(Tement)를 방문했다. 지역 최고로 꼽히는 테멘트의 양조장 건물은 포도밭 치렉(Zieregg) 바로 위에 조성돼 경관도 뛰어났다. 마주 보이는 높고 낮은 산등성이는 바로 슬로베니아 산야다. 최고의 양조장은 쉴 틈이 없는 것일까. 일꾼들은 하루 종일 밭에 무언가를 뿌리느라 분주했다. 이곳에서 영업과 마케팅을 맡고 있는 아르노 베르글러(Arno Bergler)는 “지금 뿌리는 약은 파스폴리어(Pasfoliar)다. 이곳은 고온에다 습도가 높아 비가 오기만 하면 금세 흰가루병(Mildew)이 번진다. 그래서 미리 파스폴리어를 뿌려 병충해에 대비한다”라고 설명해주었다.
두 와인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역만리 떨어진 말보로와 스티리아의 공통점은 둘 다 서늘한 기후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후는 화이트 와인 양조에 유리하다. 새콤한 청포도를 서서히 익힐 수 있는 기후는 고품질 화이트 와인 제조의 필수 조건이다. 남반구에 위치한 말보로는 남위 40도 부근에 있다. 적도를 기준으로 상하대칭을 해 보면 북한 신의주에 해당한다. 스티리아는 북위 47도에 위치한다. 말보로와 스티리아 둘 다 농작물 한계선에 육박하는 위도에 있기 때문에 포도 완숙을 쉽게 장담하기는 어렵다.
전통주의자들은 스티리아와 말보로의 차이를 테루아(terroir)와 기술의 차이로 설명하려 한다. 스티리아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와인을 생산하므로 그들의 터전인 땅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이전할 수 없는 대지를 자산으로 가족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스티리아라면, 말보로는 이와 판이하다. 말보로의 와인 양조는 이제 한 세대를 지났을 뿐이다. 말보로의 양조장은 생활이 아니라 기업이자 프로젝트다. 거기서 일상생활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산업화하고 규모화한 대량 생산체제로서의 양조장 운영이 지고의 목표이기 때문에 와인 한 병에서도 문화적 가치를 따지는 스티리아와 다를 수밖에 없다.
말보로의 소비뇽 블랑 경작지는 1만㏊를 넘지만, 스티리아는 겨우 400㏊이다. 개별 양조장의 규모 역시 차이가 크다. 몬태나는 자체 포도원과 수매하는 포도원의 면적을 합하면 1000㏊를 넘는다. 그러나 스티리아 지역에서 대규모로 알려진 테멘트는 겨우 수십㏊ 수준이다. 스티리아와 말보로는 다윗과 골리앗에 견줄 수 있다. 말보로의 4% 남짓한 스티리아의 규모는 정말 하찮은 수준이다. 하지만 테루아와 가업정신으로 똘똘 뭉친 스티리아는 개성 강한 와인으로 점점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1995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에 스티리아 양조장들은 수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팔 수 있는 수량은 말보로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
소비뇽 블랑의 신데렐라, 클라우디 베이
말보로를 단숨에 소비뇽 블랑의 중심지로 등극시킨 클라우디 베이 브랜드는 동명의 하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Cloudy Bay라는 이름답게 자주 구름이 끼는 지역이다. 클라우디 베이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호주 서부에서 와인을 만들던 데이비드 호넌(David Hohnen)이 뉴질랜드 출장 때 우연히 소비뇽 블랑을 얻어 마시고 그 품질에 반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클라우디 베이의 풍광에 반한 그는 와인 이름을 클라우디 베이로 짓고 말보로에서 양조를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스티리아의 테멘트 양조장.
한편 이에 대적하는 스티리아 와인에 대한 평가는 스튜어트 피곳(Stuart Pigott)이 쓴 1998년 ‘LA타임스’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1998년 10월, 최고의 화이트를 가리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와인은 다름 아닌 스티리아 소비뇽 블랑이었다. 테멘트 치렉 1993이 세계 최고가 화이트 DRC 몽하쉐 1995를 누르고 대망의 1위에 오른 것이다.
2006년 이벤트도 빼놓기 힘들다. 빈 와인전시회 ‘비비눔’기간에 소비뇽 블랑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준비됐다. 전세계 27개국 53명의 와인전문가가 초대되어 스티리아, 말보로, 보르도, 루아르, 캘리포니아 등의 최고급 소비뇽 블랑을 가렸다. 최근 빈티지(2004, 2005)와 올드 빈티지(2000~2003) 두 분야로 나뉘어 진행된 시음대회에서 스티리아는 두 분야 모두 수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드 빈티지 분야에서는 10위 안에 무려 일곱 와인이 스티리아산이었으며, 최근 빈티지 경쟁에서는 10위 안에 다섯 와인이 입상했다. 오스트리아 와인수출상 안드레아스 비크호프(Andreas Wickhoff)는 이런 놀라운 결과는 스티리아의 사설 와인단체 STK(영어로 Styrian Terroir and Classic Wineries)의 공이 크다고 평했다. 이 단체의 다섯 양조장이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말보로는 올드 빈티지 시합에서 단 한 개도 10위권에 들지 못했으나, 최근 빈티지 경합에서는 네 와인이 입상했다. 클라우디 베이는 7위를 차지했다. 테멘트 치렉 2000년 빈티지는 올드 빈티지 부문 5위로 기록되었다.
스티리아 소비뇽 블랑의 명성
스티리아 소비뇽의 명성은 2008년에도 만천하에 알려졌다. 제1회 ‘월드 소비뇽 대회 (World Sauvignon Congress)’가 루아르나 말보로가 아닌, 스티리아의 한복판 그라츠에서 열린 것이다. 여러 학술적인 내용이 발표되고, 품질 향상에 대한 전망과 기후 변화에 대한 대처 방안들이 모색되는 자리였다.
2009년 스티리아에서 열린 ‘와인 서밋(Wine Summit)’2009에서는 루아르, 말보로, 스티리아 세 지역의 와인에 대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있었다. 등수를 가리기보다 세 지역의 와인 스타일을 체험하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열린 행사였다. 참가자들이 예상한 대로 말보로는 톡 쏘는 신맛과 과일향이 풍부했으며, 루아르는 미네랄 향취와 풍부한 질감이 돋보였다. 스티리아는 다채로운 스타일을 보인 가운데 스타일 자체가 새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말보로보다는 미네랄 향취가 강하고 부드러우며, 루아르보다는 과일향이 신선하고 순수한 맛이라는 뜻이다.
AWMB의 수전 스타글(Susanne Staggl)은 이들 와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루아르는 뻣뻣하고 억제된 듯하며 후추맛, 양념맛, 라임 등이 느껴진다. 스티리아는 이런 루아르보다 훨씬 프루티하다. 물론 말보로가 더 프루티하지만. 그리고 루아르의 산도는 분명하게 느껴지며, 미네랄이 많고, 삼킨 다음에 짠맛이 느껴진다. 스티리아의 산도는 좀 더 균형적이고 구조를 뒷받침한다. 반면 말보로는 레몬이나 시트러스 맛이 두드러진다.”시음이 끝나고 또 하나의 와인이 제공되었다. 그것은 테멘트의 치렉 1997년 빈티지였다. 여전히 활기와 생기가 돌면서 풍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특별한 날을 위한 선택이라면 스티리아를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는 클라우디 베이 2007을 정확한 소비뇽 블랑이라고 평하면서 89점을 부여했다.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은 월간지 ‘마이닝거’(Meininger‘s)’에 “소비뇽 블랑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열정을 가지고 이 와인을 애호하지만, 그 맛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소비뇽 블랑을 비난함에 있어 미세함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라고 소비뇽 블랑의 미묘함을 지적했다.
말보로 품질의 전반적인 밋밋함과 스티리아 품질의 개성을 기준 삼아 두 와인 의 우열을 합리적으로 가려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두 와인 산지의 특징을 일반화하면서 비교하는 일에는 늘 무리가 따른다. 표본 추출의 신뢰성과 비교연구의 타당성이 반드시 담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적인 추천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으로 비교해보자면, 말보로 양조장에서는 ㏊당 1만ℓ이상 와인을 얻지만, 스티리아는 5000~6000ℓ정도를 얻을 뿐이다. 단위면적당 말보로의 생산량이 훨씬 많으니 포도 용액의 농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말보로는 포도를 기계로 수확하는 반면, 스티리아는 사람이 직접 수확한다. 기계로 수확하면 잎사귀, 줄기 등이 포함되지만 사람이 수확하면 송이만 고를 수 있어 훨씬 순수한 맛을 얻을 수 있다.
말보로는 상큼한 화이트 와인의 전형이다. 언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기에 여름철 와인으로 그만이다. 이에 반해 스티리아는 말보로 수준의 와인뿐 아니라 단일 포도밭에서 나오는 테루아 와인이 많다. 숙성력도 우수하다. 10년 정도는 너끈히 견디는 탄력을 지녔다. 스티리아는 특별한 날을 위한 화이트 와인인 동시에, 나중을 기약하는 저장용 와인이다. 그래서 필자는 집에서 주로 말보로를 마시면서 귀한 손님이 오든지 자축할 일이 있을 때에는 흔쾌히 스티리아를 딴다. 필자의 선택에 대해 격월간지 ‘와인 애드보키트(Wine Advocate)’의 데이비드 쉴드크네흐트(David Schildknecht)도 동의했다. 그는 e메일 답신을 통해 테멘트의 치렉 등 최고의 포도밭은 앞으로 더욱 전도유망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일상의 번잡함과 무료함을 한 방에 날려줄 소비뇽 블랑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국 시장에는 말보로가 많다. 클라우디 베이(수입 모엣헤네시코리아, 6만4000원), 몬태나(페르노리카코리아, 3만2000원), 빌라 마리아(신동와인, 3만원), 포레스트(루벵코리아, 6만원), 킴 크로포드(나라식품, 3만9000원), 배비치(롯데아사히, 6만원), 마투아 밸리(금양, 5만원) 등이 유통된다. 반면 스티리아는 아무래도 찾기 힘들다. 특히 단일 포도밭 와인은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스트리아 내수가 많다. 한국 시장에서는 자틀러호프의 크라나흐베르그(수미르와인, 15만원대)가 유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