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사춘기 딸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 김혜남│나누리병원 정신분석연구소 소장│

    입력2009-07-30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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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 딸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와 딸 사이의 진한 사랑을 그린 영화 ‘아이엠 샘’의 한 장면

    Q두 딸을 둔 40대 남성입니다. 어린 시절 딸들은 저를 참 좋아했습니다.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친하게 지냈지요.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서 점점 저와 거리를 두는 게 느껴집니다. 엄마하고는 여전히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등을 하는데 저하고는 공감대가 사라져갑니다. 이러다가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저는 이방인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지 걱정됩니다. 가끔은 딸들과 여전히 친밀하게 지내는 아내에게 질투마저 느낍니다. 예전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만약 아들이 있다면 아내보다 저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듭니다.

    A‘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에게 언제나 포근함과 안정감을 준다. 사람은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신화를 마음에 품고 산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 키워주며, 오직 가족만을 위해 등불을 켜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이미지. 그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무쌍한 시기를 견뎌내면서 새로운 생명을 끝없이 탄생시키고 거두어들이는 대지의 여신으로 상징화된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좀 더 역동적이다. 가족을 보호하고 이끌어나가는 선장과 같다. 아버지는 부족을 보호하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법칙과 질서를 세우는, 힘세고 현명한 신격화된 왕의 이미지로 신화화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여신과 남신을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미지로 간직하고, 평생을 그러한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자신이 부모가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이후에도 말이다.

    사실 부모가 되고 나면, 누구나 자신이 신화화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부모가 되는 것은 경이롭고 기쁜 일이면서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소설 ‘피터 팬’에 등장하는 웬디의 부모 달링 부부는 이 불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웬디를 임신하고 처음 한두 주 동안, 엄마 아빠는 웬디를 키울 수 있을지 불안했습니다. 아기가 생긴다는 생각에 달링씨는 가슴이 터질 만큼 기분이 좋았어요. 하지만 웬디도 먹여 살려야 할 입이니, 명예롭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달링 부인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뭔가 애원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동안에도 달링씨는 한 손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열심히 비용을 계산했죠. …달링 부인이 이런저런 제안이라도 하면, 계산이 헷갈려 달링씨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답니다. 존을 낳을 때도 똑같은 법석이 일어났고, 마이클 때는 더한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자신이 머지않아 부모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뛸 듯이 기뻐한다. 곧 태어날 아이와 그 아이가 살아갈 세계에 대해 이것저것 꿈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꿈 안에는 기대와 희망만큼이나 걱정과 불안이 뒤섞여 있게 마련이다. 이 아이만은 나같이 힘든 시절을 보내지 않게 하고, 세상의 모든 상처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안전하게 잘 키우고 싶다는 꿈. 내가 못 가진 행복을 주고, 내가 못 이룬 꿈을 이루게 하고 싶다는 꿈. 아이에게 완벽한 사랑과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능력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꿈!



    그러나 과연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지점에서 아버지들은 좌절한다. 내 안에는 아직도 유치하고 어린애 같은 마음이 많은데, 나 역시 누군가 끝없이 나를 돌보아주길 간절히 원하는데, 나 혼자 생활해나가기도 버거운데 내가 무슨 수로 한 아이의 인생을 책임지고 돌볼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내 책임일 텐데 과연 내가 어디까지 아이를 책임지고 보호할 수 있을까?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데, 내가 이 아이에게 최고의 환경을 줄 수 있을까? 만일 무능한 아버지가 되고 그것 때문에 아이가 나를 원망하게 된다면? 이 아이를 잘 키우려면 나의 자유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나의 꿈조차 뒤로 미루거나 그만 접어야 하는데 내가 이 아이를 미워하기라도 하게 된다면? 상처를 주게 된다면? 이런 불안을 안고 남자들은 아버지가 되는 길을 밟기 시작한다.

    자녀의 사춘기와 오이디푸스 갈등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람이 생후 3세까지 어머니와 맺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때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훗날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틀을 마련해주고, 독립된 개체로 서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아버지는 어떤 역할을 할까? 이 시기의 아버지는 아이와 어머니의 밀착관계에 끼어들어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 아이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의 숨막힐 듯한 사랑의 세례로부터 서서히 분리되어 나온다. 어머니 역시 남편의 도움으로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풀려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부부관계는 아이 성장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된다.

    아버지는 아이의 발달에도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신경정신과를 찾은 환자와 상담을 해보면 가장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즉,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한 것인 경우가 많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즉각적인 만족을 주고 보호하면서 영원성과 합일하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그러나 아버지는 좀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영역의 발달을 돕는다. 아버지는 권위와 법을 상징한다. 아이들과 어울려 뒹굴고 새로운 놀이를 찾는 과정에서 규칙과 자율성을 가르치고 호기심을 키워준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느냐는 아이의 지적 능력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4~5세가 되면 딸은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와 경쟁한다. 일명 ‘오이디푸스 시기’다. “이 다음에 커서 아빠와 결혼하겠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아들 역시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경쟁한다. 그러나 부모와 대적하기에 아이들은 너무 작고 무력하다. 이때 어머니나 아버지가 충분한 사랑을 보여주고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이 되면 아이들은 같은 성의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오이디푸스 갈등을 해결한다. 딸의 경우 ‘이 다음에 커서 엄마 같은 여자가 되어 아빠 같은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안전한 관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이 오이디푸스 갈등이 다시 살아난다. 사춘기는 성적 기능이 발달하는 시기다. 아이들은 너무 가까워지면 위험하다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딸은 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오히려 거리두기를 한다. 아들은 어머니와 거리두기를 하고 멀어진다.

    아버지 처지에서는 자신과 친하고 재잘거리며 이야기도 잘하던 딸이 점점 멀어지고 심지어 어머니와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 집안에서 소외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아들이 있었으면 남자 대 남자로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들을 그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사춘기의 발달 과제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은 친구나 스타 같은 외부 대상에 열광하지, 부모와는 가까워지려 하지 않는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자신을 멀리한다면 이를 서러워할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발달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춘기가 지나고 딸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면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것이 정답이다.

    제자리를 잃어버린 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들

    문제는 이러한 익숙한 삶의 과정이 최근 크게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추락이다. 오랜 세월 우리는 부계사회에서 살아왔다. 아버지의 위상은 막강했다. 그러나 사회가 현대화되고 가정에서 아이들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모계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아버지가 할 일은 부인이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도록 물질적 심리적 보호처를 제공하는 정도로 축소됐다. 어머니와 아이가 똘똘 뭉쳐져 교육이라는 소명을 향해 나아갈 때, 아버지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이러한 변화의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기러기 아빠’의 출현이다. 부인과 아이들을 외국에 보내고 학비를 벌어대느라 아버지는 중년이라는, 인생의 의미를 중간점검해야 하는 중요하고 위태로운 시기를 혼자 보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아버지들은 가족과 대화의 단절을 경험하고, 권위적이면서 이기적이고 무능한 존재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난을 감수하고 외로움을 견뎌낸 결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만큼 낯설게 국제화되어 돌아온 아이들과, 예전과는 다른 낯선 부인의 모습일 수 있다. 이때 아버지들은 낯선 이방인이 되어 가족의 주변을 맴돌 뿐이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분노와 충동을 조절하는 힘을 잃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만약 질문자의 고민이 이런 지점에 닿아 있다면, 이때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사실 이 시대 아버지의 위치가 이렇게 위축된 것은 아버지 자신들 때문이다. 시대적 흐름과 요구를 외면하고 가부장적 위치에서 남성의 권위를 내세우고 가족을 지배하려 들었던 잘못된 관행들이 이제 그들을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의 행복은 그 사람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안정되어 있으며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졌느냐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호기심이 많고 진취적이며 긍정적인 아이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바로 아버지가 아이와 즐겁고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경험을 했을 때 길러진다.

    그러니 아버지들이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당당하게 찾아야 한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즐겨야 한다. 능력 있는 아버지가 되려 하지 말고 아이들과 같이 있어서 즐거운 아버지가 되는 게 중요하다. 완벽한 아버지가 되려고 발버둥치지 말자.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의 아이들에게 항상 옳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버리자. 모든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역시 불완전하다. 우린 때때로 잘못할 때가 있다. 어머니나 아버지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상실이다. 이 틀림 속에서 여유와 배려, 감사와 유머가 싹튼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사춘기 딸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김혜남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現 나누리병원 정신분석연구소 소장

    서울대 의대 초빙교수, 성균관대, 경희대, 인제의대 외래교수

    저서: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왜 나만 우울한 걸까’ ‘어른으로 산다는 것’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우리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과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우리 곁을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아이들이 떠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다.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정상적인 가정을 복원하려면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에 서서, 아이가 내가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게 중요하다. 아이의 여행 준비를 해줄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눈길 위에서는 그들 스스로 부츠를 신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신동아’에서는 중장년층 남성의 고민을 듣고자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담은, 그렇지만 쉽게 풀지 못하는 고민을 spring@donga.com으로 보내주십시오.

    정신분석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인 김혜남씨가 카운슬링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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