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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히로시마’ 경남 합천

원폭 피해자 집단 거주지… 대물림 원폭 고통에 가난, 차별 삼중고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한국의 히로시마’ 경남 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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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평지 찾기 어려운 첩첩산중 산골마을의 소외된 사람들
  • ● 일제 수탈 피해 도일(渡日)했다 피폭된 주민 수만 명
  • ● 노부모 사망 뒤 방치되는 원폭2세 환자 사회문제화
‘한국의 히로시마’ 경남 합천
합천군 합천읍에는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원자폭탄피해자 진료소가 있다.’ 1983년 출간된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합천군 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 일반인에게 경남 합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해인사다.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이 이곳에 보관돼 있다. 조선8경이라 불리던 명승지 가야산국립공원도 합천에 걸쳐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제치고 ‘원자폭탄피해자진료소’가 가장 앞에 소개돼 있다. 여기에 이제는 한 줄이 더해지게 됐다. ‘합천군 합천읍에는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원자폭탄피해자 2세 쉼터도 있다.’

3월1일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 국내 유일의 원폭2세 복지시설인 ‘합천 평화의 집’이 문을 열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폭자의 자녀를 위한 공간이다. 왜 머나먼 한국 땅에, 원폭 투하 후 6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이런 공간이 만들어진 걸까. 궁금증을 안고 길을 나선다.

합천에 이르는 길은 굽이굽이 산이다. 마음만 먹으면 제주도도 한나절에 오갈 수 있는 세상이지만, 서울서 322㎞ 떨어진 이 도시에 닿는 방법은 도로뿐이다. 하루에 다섯 번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가는 데만 4시간30분이 걸린다. 소백산맥에서 동쪽으로 뻗은 지맥을 따라 합천에 이르니 가야산(1430m) 남산(1113m) 표류산(1046m) 비계산(1126m) 두무산(1038m) 오도산(1134m) 황매산(1108m) 등 해발 1000m 이상 되는 산들이 둘레를 감싼다. 1962년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마지막 야생 표범이 잡혔다. 동서남북 둘러봐도 평야라곤 없다. 산 중턱 경사지, 깊은 계곡 옆까지 꼼꼼히 흙 골라 펼쳐놓은 논밭이 보일 뿐이다.

억센 산줄기에 가로막힌 땅. 이 지역 사람들은 직접 땅을 일궈 제 먹을 것을 얻으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합천의 주된 산업은 예나 지금이나 농업이다. 꼭 100년 전, 경술국치가 있기 전까지 이곳은 넉넉지 않을지언정 아늑한 그들만의 공동체였다.

원폭 피해자의 12%는 조선인



‘합천 평화의 집’에 도착하자 소장 혜진 스님과 강제숙(42) ‘한국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공동대표가 반갑게 맞아준다. 가정주택을 개조한 76㎡ 규모의 쉼터는 ‘위드 아시아’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모아 마련한 공간이다. 방 3칸과 거실, 부엌으로 구성된 이곳을 혜진스님은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원폭2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사랑방”이라고 소개했다.

‘왜 원폭2세 쉼터를 지금 합천에?’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려면 이제 이곳에서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이 도시 전체를 파괴한 날, 방사능 불꽃 속에서 죽어간 이들은 ‘황군(皇軍)’만이 아니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자료에 따르면 당시 두 도시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77만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10만명은 징병, 징용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이었다. 일제의 수탈로 국내 경제가 붕괴되면서 생계를 위해 스스로 일본행 배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5만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4만3000명은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7000명은 일본에 남았다.

‘한국의 히로시마’ 경남 합천

국내 유일의 원폭1세 복지시설인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안에는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 947명의 신위를 모신 위령각이 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인 8월6일, 매년 이곳에서는 이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린다.

일본이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이라는 ‘상식’은 이 통계 앞에서 힘을 잃는다. 강 공동대표는 “8월6일 히로시마에서만 조선인 3만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험난했던 한국 근·현대사 어디를 뒤져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숨진 날은 발견할 수 없다. 원폭 투하는 일본 못지않게 우리 역사에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셈이다. 그러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문제 해결에 동분서주하는 동안 한국은 그저 침묵했다.

한국에 원폭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1973년 합천에 ‘원자폭탄피해자 진료소’가 생기면서부터다. 이곳에 진료소가 생긴 이유는 피폭 조선인 가운데 절대 다수가 합천 사람이었기 때문.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히로시마 피폭자의 60%가 합천 출신이다. 혜진스님은 “일제강점기 합천은 일본의 식민 지배로 경제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땅에서 살 수 없던 농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도일(渡日)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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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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