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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노숙인대학 연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

“어려워도 남을 돕고 배우려는 마음을 세워 주고 싶어요”

  • 안기석│출판국 기자 daum@donga.com│

노숙인대학 연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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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은 하지 않고 받기만 한다는 통념을 깨고 아이티 지진 참사 때 자그만 성금을 모아 보내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배우려는 노숙인들이 있다. 이들의 변화를 북돋워주는 ‘키다리 아저씨’ 이주연 목사를 만났다.
노숙인대학 연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
폭설이 전국을 뒤덮은 3월9일 오후 6시경 서울역에서 공덕동로터리로 넘어가는 만리재에는 어둠이 깔리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만리재길 옆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상가건물 2층에 있는 산마루교회의 이주연(54) 담임목사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비가 오면 그분들이 오기가 힘들 텐데…”라며 걱정스러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0대로 보이는 두 명의 노숙인이 비를 맞은 채로 교회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콧수염을 기른 한 노숙인이 파카 점퍼에 달린 모자를 깊이 쓴 다른 노숙인을 앞세우며 “목사님, 저 학생 한 분 모시고 왔어요”라고 활기차게 말했다. 그 자랑스러운 표정에 이 목사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같이 저녁을 듭시다”며 식탁에 앉기를 권했다.

이 목사는 자신이 먹기 위해 챙겨놓았던 컵라면을 새로 온 노숙인에게 먼저 권했다. 그 노숙인은 컵라면을 먹고 식탁에 있는 빵에 잼을 발라 먹은 뒤 노숙인대학 안내서인 ‘산마루해맞이학교 핸드북’에 나오는 커리큘럼을 읽어보았다. 기대와는 달라 실망했는지 그가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해요?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강의를 해야지….”

‘산마루해맞이학교 핸드북’에 적혀 있는 강의 주제는 ‘영문학 입문, 서양의 역사, 일상생활 속의 인류학, 법과 시민생활, 언어의 기원 연구, 미디어와 사회’ 등이었다.



노숙인이 몇 명 더 들어와 자그마한 식당이 가득 차자 저녁 7시부터 강의가 시작됐다. 강사는 최주리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였다. 최 교수는 강의 자료를 나눠준 뒤 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 자료에는 한글이라고는 단 한 자도 없고 에즈라 파운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조지 허버트, 윌리엄 워즈워스 등 영미 문학가들의 시가 이들의 사진과 함께 영어로 적혀 있었다. 영국에서 공부한 최 교수는 “시는 뜻보다도 소리입니다”라고 말한 뒤 단 두 줄로 구성된 에즈라 파운드의 시 ‘지하철역에서’를 감성 어린 목소리로 낭송했다.

최 교수는 번역은 하지 않고 간단하게 의미만 전달한 뒤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물었다. 한 노숙인이 손을 들고 “까만 가지는 지하철이고요, 꽃잎은 사람들 얼굴이에요. 지하철 창문에 얼굴이 비치는 거죠”라고 대답했다.

최 교수가 셰익스피어의 시 ‘소네트 18’을 읽어준 뒤 “셰익스피어가 짝사랑했던 ‘젊은 남성’에게 바친 이 시의 주인공은 실제로 누구였을까”라고 묻자 한 노숙인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요”라는 답변을 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워즈워스의 시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에 나오는 무지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자, 노숙인들은 앞 다투어 ‘약속’ ‘희망’ 등의 단어를 쏟아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노인도 있었지만 최 교수의 강의내용을 일일이 받아 적는 노숙인도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강의 주제에 불만을 터뜨렸던 노숙인에게 강의 평가를 부탁하자 “뭔지 잘 모르지만 참 좋았다. 계속 나오고 싶다”고 대답했다.

바깥은 이미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노숙인들과 강사를 배웅한 이 목사를 산마루 교회 사무실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

교수와 노숙인이 서로 배운다

▼ 오늘 영시에 대한 강의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습니다.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숙인의 교육수준이나 필요성을 배려해서 커리큘럼을 짰습니까.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교수님들과 준비과정에서 여러 번 논의한 끝에 노숙인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적인 강의와 예술적인 경험을 통해 자존심을 높이고 정체성을 찾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자고 했어요.”

▼ 취지는 좋지만 강의가 실제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저도 이분들을 이해하는 데 몇 년이 걸렸어요. 하물며 노숙인과는 생전 처음으로 만나는 강사도 있는데 어떻게 강의할지 궁금했지요. 그런데 오늘 강의만 하더라도 이분들이 영시는 물론이고 영어를 몰라도 최 교수와 대화가 가능하잖아요. 상상력은 더 뛰어나기도 하고요. 사실 이 과정을 통해 교수와 학생이 서로 배워요. 강사들도 나름대로 자극을 받고 의미가 있다며 좋아해요. 이분들도 받아쓰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걸 좋아해요. 한 할아버지는 ‘내 일생에 이런 교수님의 강의를 언제 다시 들을 수 있겠느냐’며 꼬박꼬박 참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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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석│출판국 기자 da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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