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지나지 않아 40대로 보이는 두 명의 노숙인이 비를 맞은 채로 교회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콧수염을 기른 한 노숙인이 파카 점퍼에 달린 모자를 깊이 쓴 다른 노숙인을 앞세우며 “목사님, 저 학생 한 분 모시고 왔어요”라고 활기차게 말했다. 그 자랑스러운 표정에 이 목사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같이 저녁을 듭시다”며 식탁에 앉기를 권했다.
이 목사는 자신이 먹기 위해 챙겨놓았던 컵라면을 새로 온 노숙인에게 먼저 권했다. 그 노숙인은 컵라면을 먹고 식탁에 있는 빵에 잼을 발라 먹은 뒤 노숙인대학 안내서인 ‘산마루해맞이학교 핸드북’에 나오는 커리큘럼을 읽어보았다. 기대와는 달라 실망했는지 그가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해요?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강의를 해야지….”
‘산마루해맞이학교 핸드북’에 적혀 있는 강의 주제는 ‘영문학 입문, 서양의 역사, 일상생활 속의 인류학, 법과 시민생활, 언어의 기원 연구, 미디어와 사회’ 등이었다.
노숙인이 몇 명 더 들어와 자그마한 식당이 가득 차자 저녁 7시부터 강의가 시작됐다. 강사는 최주리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였다. 최 교수는 강의 자료를 나눠준 뒤 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 자료에는 한글이라고는 단 한 자도 없고 에즈라 파운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조지 허버트, 윌리엄 워즈워스 등 영미 문학가들의 시가 이들의 사진과 함께 영어로 적혀 있었다. 영국에서 공부한 최 교수는 “시는 뜻보다도 소리입니다”라고 말한 뒤 단 두 줄로 구성된 에즈라 파운드의 시 ‘지하철역에서’를 감성 어린 목소리로 낭송했다.
최 교수는 번역은 하지 않고 간단하게 의미만 전달한 뒤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물었다. 한 노숙인이 손을 들고 “까만 가지는 지하철이고요, 꽃잎은 사람들 얼굴이에요. 지하철 창문에 얼굴이 비치는 거죠”라고 대답했다.
최 교수가 셰익스피어의 시 ‘소네트 18’을 읽어준 뒤 “셰익스피어가 짝사랑했던 ‘젊은 남성’에게 바친 이 시의 주인공은 실제로 누구였을까”라고 묻자 한 노숙인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요”라는 답변을 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워즈워스의 시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에 나오는 무지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자, 노숙인들은 앞 다투어 ‘약속’ ‘희망’ 등의 단어를 쏟아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노인도 있었지만 최 교수의 강의내용을 일일이 받아 적는 노숙인도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강의 주제에 불만을 터뜨렸던 노숙인에게 강의 평가를 부탁하자 “뭔지 잘 모르지만 참 좋았다. 계속 나오고 싶다”고 대답했다.
바깥은 이미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노숙인들과 강사를 배웅한 이 목사를 산마루 교회 사무실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
교수와 노숙인이 서로 배운다
▼ 오늘 영시에 대한 강의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습니다.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숙인의 교육수준이나 필요성을 배려해서 커리큘럼을 짰습니까.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교수님들과 준비과정에서 여러 번 논의한 끝에 노숙인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적인 강의와 예술적인 경험을 통해 자존심을 높이고 정체성을 찾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자고 했어요.”
▼ 취지는 좋지만 강의가 실제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저도 이분들을 이해하는 데 몇 년이 걸렸어요. 하물며 노숙인과는 생전 처음으로 만나는 강사도 있는데 어떻게 강의할지 궁금했지요. 그런데 오늘 강의만 하더라도 이분들이 영시는 물론이고 영어를 몰라도 최 교수와 대화가 가능하잖아요. 상상력은 더 뛰어나기도 하고요. 사실 이 과정을 통해 교수와 학생이 서로 배워요. 강사들도 나름대로 자극을 받고 의미가 있다며 좋아해요. 이분들도 받아쓰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걸 좋아해요. 한 할아버지는 ‘내 일생에 이런 교수님의 강의를 언제 다시 들을 수 있겠느냐’며 꼬박꼬박 참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