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⑪

희망이 없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짝사랑의 비밀

괴테의 베르테르 vs 투르게네프의 블라디미르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희망이 없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짝사랑의 비밀

2/3
희망이 없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짝사랑의 비밀

짝사랑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안타까운 응시다.

베르테르는 로테뿐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미래도 현실도 생각하지 않는 ‘첫사랑’ 속 블라디미르의 눈먼 사랑도 ‘사랑밖엔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픈 현실도피의 욕망을 보여준다.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로맨스가 좌절되자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는 탐욕과 경쟁이 판치는 세상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안에서만 ‘진정한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하나의 세계를 발견한다! 명확한 표현이나 팔팔한 힘에서보다는 예감이나 막연한 욕망 속에서 더 많은 세계를 발견한다. 거기에서 모든 것이 나의 오감(五感) 앞에 두둥실 떠오른다. 그러면 나는 멍청히 꿈꾸면서 다시 그 세계 속을 향해서 미소를 보낸다.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가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초특급 모범생 블라디미르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첫사랑 지나이다를 추종하는 남자들의 무리 중 가장 어린 블라디미르를 향해 이제 ‘미래’를 생각하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충고해주는 루신 박사에게 블라디미르는 명백한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다. 루신 박사는 매일 지나이다의 집에서 맴도느라 모든 일상을 작파해버린 블라디미르에게 점잖게 충고한다. “젊은 양반, 왜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이곳을 헤매십니까? 아직 젊으시니 일을 하고 공부를 하셔야 한 텐데,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블라디미르는 상대방의 지긋한 나이도 고려하지 않고, 거만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루신 박사의 충고를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제가 집에서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당신은 모르지 않습니까?” 사랑의 달콤한 환상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그 어떤 충고도 자신을 향한 ‘가혹한 공격’으로 들리는 것이다.

패배가 예정된 게임



나는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되었다. 나의 고통은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도저히 ‘나’와는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은 강력한 연적(戀敵)은 패배가 예정된 짝사랑 게임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로테의 연인은 너무도 완벽한 교양과 도덕을 갖춘 사람이기에 베르테르는 도저히 그에게서 로테를 빼앗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베르테르는 마음껏 질투조차 할 수 없는 고상한 인품을 갖춘 로테의 연인을 보며 괴로워한다.

블라디미르의 첫사랑 지나이다의 연인은 그가 가장 동경하는 남성인 ‘아버지’이기에 도저히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적인 지성으로 지나이다를 단숨에 굴복시킨다. 누가 봐도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블라디미르에 비해 훨씬 강력한 남성성과 중후한 매력을 갖춘 아버지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상대였다. 블라디미르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지나이다는 모든 면에서 자신의 미숙함을 상기시키는, 자신을 언제나 ‘소년’으로만 바라보는 존재였던 것이다. 블라디미르의 풋풋한 남성성을 단번에 끌어내놓고는 이제 막 개화한 그의 남성성을 본 척도 하지 않는 지나이다는 블라디미르를 끊임없이 애타게 만든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이상적 사랑과 현실의 여인 그 자체를 동일시한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로테가 누군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는 것, 시간이 가서 그의 짝사랑마저 지속될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의 이상에 비하면 ‘현실’은 가변적이고 세속적이고 아름답지 않기에. 그렇게 그들은 점점 자신이 창조한 이상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일상은 철저히 마비되고 사랑 이외의 다른 모든 관계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지는, 오직 사랑만을 찾아 헤매는 무중력의 자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단지 한 여자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무한한 생동감으로 충만하던 세상은 그녀의 한 마디 거절로 인해 철저한 암흑의 무대로 변해버리고 만다. 세상을 향한 모든 빛은 그녀를 통해 나 있었고, 그녀가 희망의 스위치를 내려버리는 순간 세상을 비추던 그 모든 빛도 함께 꺼져버린 것이다.

2/3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목록 닫기

희망이 없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짝사랑의 비밀

댓글 창 닫기

2021/05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