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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③

역사적 美-中 수교를 빛낸 중국 명주 마오타이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역사적 美-中 수교를 빛낸 중국 명주 마오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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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 중 사의

이런 성과에 힘입어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1922~) 후보를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표 차이로 이겼다.

그러나 닉슨의 화려한 정치 이력도 여기까지였다. 1973년 초부터 1974년 8월 그가 사임할 때까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언론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 6월 닉슨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비밀요원들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위치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몰래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돼 체포된 사건이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폭로 기사로 일시에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이 사건은 처음 백악관 측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관련 정황이 속속 드러남으로써 미국 국민의 불신 여론이 높아져갔다. 마침내 1973년 초까지는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닉슨의 말까지 거짓말로 드러나고 그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여론은 걷잡을 수없이 악화됐다.

결국 닉슨은 모든 정치적 지지를 상실한 데다 대통령직에 대한 탄핵안이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가결되는 등 탄핵이 거의 확실시되자 1974년 8월9일자로 자진 사퇴한다. 대통령직 사임 직후 캘리포니아 상 클레멘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 닉슨은 정신적 충격과 비통한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9월8일 후임 대통령인 포드(Gerald R Ford·1913~2006)가 내린 사면령으로 후속 조사는 받되 형사 기소는 면하게 된다. 이 때문에 포드의 지지율은 71%에서 49%로 대폭 떨어졌다.

닉슨은 설상가상으로 사면이 발표된 그날 밤 정맥혈전증과 이로 인한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후에도 병이 재발해 수술까지 받으면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1975년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된 닉슨은 조금씩 대외활동을 재개하면서 이듬해인 1976년 2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의 초청으로 중국을 다시 찾았고 이후 중국을 네 번 더 방문한다. 1980년대 들어서 닉슨은 저작활동을 포함해 특유의 탁월한 통찰력으로 왕성한 대외활동을 하면서 최악의 상태에서 차츰 벗어났다. 그러던 중 1994년 4월22일 갑자기 닥친 뇌졸중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中蘇 국경분쟁 틈 파고든 닉슨

이처럼 굴곡진 닉슨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에 꽃을 피운 대표적 업적 중 하나가 중국과의 첫 외교 관계 수립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닉슨은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60년에 이미 구소련과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중국은 닉슨 취임 초기인 1969~70년 중-소 국경분쟁을 겪으면서 공산 블록의 축이었던 구소련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닉슨은 이 틈을 이용해 냉전시대 주도권을 서방세계로 가져오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를 위해 닉슨은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개인 채널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니콜라 차우세스쿠(Nicolae Ceausescu) 루마니아 대통령과 야히야 칸(Yahya Khan)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중국에 화해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한 무역 제재 완화와 국내 반대여론 무마 작업 등 치밀히 사전 준비를 해나갔다.

그런 미국의 노력에 중국은 1971년 4월 미국 탁구팀을 초청해 양국 간 시범경기를 가지는 형식으로 화답했다. 15명으로 구성된 미국 탁구팀의 공식 방중은 중국 공산화 이후 무려 20년 이상 입국 비자가 거절됐던 미국으로서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의 직접 지시로 시작된 이 이벤트는 이 후 핑퐁외교(Ping Pong di-plomacy)라는 유명한 외교 용어를 탄생시켰다.

양국 간의 우호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닉슨은 1971년 7월에 당시 국가안보담당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1923~)를 중국에 비밀사절로 보낸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2년 2월 닉슨의 공식 방중 계획이 양국 간에 합의됐다는 발표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마침내 1972년 2월21일 닉슨이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도착하면서 그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 시작됐다. 일주일간 계속된 이 여정은 냉전시대의 재편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을 뿐 아니라, 닉슨 개인으로서도 그의 정치 행로에서 가장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다. 또 지구촌의 많은 사람에게는 그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죽의 장막 안의 여러 모습을 TV 화면을 통해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닉슨은 중국에 도착한 뒤 곧 최고지도자인 마오쩌둥을 만난다. 일주일의 체류 기간 중 유일한 마오쩌둥과의 이 만남은, 닉슨 도착 9일 전부터 아팠던 마오쩌둥의 건강 상태가 좋아진 시점을 이용해 급히 이루어진 것으로 훗날 파악됐다. 노쇠한 마오쩌둥을 대신해 내내 닉슨의 상대역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였다. 뛰어난 공산혁명가이자 탁월한 정치·외교적 수완으로 지금까지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저우언라이는 1949년 중국 공산정권 수립 이후 마오쩌둥 아래서 무려 27년간 총리로 일하며 중국 국내외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오랜 2인자 생활에도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마오쩌둥을 마지막까지 성실히 보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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