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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여기 사는 즐거움’ ⑥

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

시인 이육사와 딸 옥비 여사의 고향 마을 안동 원촌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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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문학관 지킴이

처음엔 일어통역관의 자격으로 문학관 식구가 됐고, 요즘은 상임이사의 직함을 갖고 있다. 예약을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겐 직접 나서서 아버지의 삶과 정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 내려올 때 미리 동박이한테 양해를 구했어요. 문학관에서 오라고 하는데 내가 가도 네 마음이 섭섭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지요. 동박이는 아버지의 양자입니다. 실제 어머니를 모시기도 했고, 지금도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아들이지요.”

오래되고 사연 많은 가문이니 이야기는 돌돌 흐르는 강물처럼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베이징 감옥에서 아버지 시신을 인수한 사람이 이병희 선생이에요. 고향이 부포이고 저희 집안이신데 백부가 백농 이동하 어른이고 부친이 이경식 어른으로 모두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이병희 선생은 아버지와 최후를 함께한 동지로 같은 일로 같은 감옥에 갇혔다가 며칠 먼저 풀려나와 있었대요. 매우 미인이시고 아버지와 베이징 주소가 같이 돼 있어 나중 독립운동사 공부하는 이들은 둘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지만 안동에서 집안끼리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해요? 이병희 선생은 그날 아버지가 소개해준 군사간부학교 후배와 선을 보기로 돼 있었대요. 그런데 감옥에서 안면이 있는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고 연락이 왔대요. 달려가 봤더니 옷이 피로 낭자하게 젖었더래요. 눈을 못 감고 계시더래요! 불과 며칠 전에 사람을 소개해줄 테니 시집을 가라고 권하던 사람이!”



그날 이병희 선생은 베이징 근처 화장장으로 육사를 실어 날랐다. 가진 돈이 없어,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죽여놨으니 가만두지 않겠다고 간수를 협박해 화장장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 일본인 간수는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던 사람이었대요. 시체를 그냥 없애버려도 무방했겠지만 자기 딴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하도 애통해서 이병희씨에게 연락했던 거겠지요. 그러나 이병희 선생은 화장해서 유골함을 받아 안았지만 막상 갈 데가 없었대요.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동지이고 친척인 이귀례씨가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며칠 전에 해산을 했대요. 그 집으로 유골을 안고 가서는 신생아의 머리맡에 아버지 유골을 두고 둘이서 통곡을 했답니다. 이귀례씨는 소설가 임화의 부인이지요.”

독립운동가 양산한 땅

한편 소식을 들은 서울에서는 동생들이 모여 다섯째 집 원창의 셋째아들 ‘이동박’을 육사의 양자로 삼자는 논의를 끝내고 유골을 모시러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유골은 수유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나중에 이곳 원촌의 고향 뒷산에 모셔진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고향으로. 옥비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소복을 입으라고 해서 입긴 했지만 아버지의 이장보다는 산천에 가득 핀 진달래가 아름다워 탄성을 질러대던 소녀였다.

원촌은 특별한 땅이다. 앞에 강이 흐르고 뒤에 산이 둘러쳐진, 전형적인 풍수적 길지로 퇴계의 후손들이 대대로 ‘군자 되기’를 염원하며 살아왔다. 육사는 퇴계의 14세손이다. 성리학의 경지가 높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족’과 ‘지조’일 것이다. 자족은 문학이 되고 지조는 저항이 된 것 같다. 안동은 돌뿌리 하나에까지 퇴계학맥이 흐르던 곳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이 여기서 열렸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가 없다.

“안동 1개 시가 320명이라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했어요. 1910년 국치를 전후해 자결 순국한 90명 중 10명이 안동 사람이지요. 거기다 이곳 원촌과 이웃마을 하계는 독립운동가를 양산한 곳이에요. 일제강점 이후 비분강개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치암 이만현이 바로 이웃에 살았고 아버지와는 8촌이었죠. 단식으로 목숨을 끊은 하계의 향산 이만도도 집안 어른이셨어요. 그러니 그 어른의 동생,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들이 모조리 항일 투쟁의 대열에 나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이곳에서 항일은 나라를 찾으려는 애국이라기보다 차라리 가문의 자존심이었고 가족 간의 단합에 가까웠다. 아무도 눈앞의 사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육사의 외가 역시 이름난 의병장 집안이었다. 외조부 허형도, 외종조부 왕산 허위도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의병장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여섯 아들을 어떻게 길렀을지 손에 훤히 잡힌다. 늘 “내 죽거든 울지 마라. 나라 잃은 백성은 부모 죽음에 눈물 흘릴 자격이 없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안중근에게 옥에서 죽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니가 있었듯 육사에게도 일경에 붙잡혀가는 아들을 응원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육사의 외숙들도 모조리 독립운동에 나섰다. 특히 육사에게 영향을 미친 이는 외삼촌 허규였다고 한다.

“우리 진외가인 허왕산의 후손들은 독립운동 하느라 모조리 만주나 소련으로 떠나버렸어요. 지금 국내에 남아 있지 않아 산소를 돌볼 사람조차 없어요. 아버지의 외사촌 여동생 허은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던 석주 이상룡의 손부가 됐지요. 그 시어머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영감집 이만유 어른의 따님이시고! 안동 독립운동의 중심인 임청각(석주 이상용의 본가)이 아버지에겐 외사촌집이고 재종고모가였어요. 아버지는 폐가 안 좋으셨는데 요양하느라 한때 임청각에 머물고 계셨대요. 그때 서울에서 나운규 선생이 내려와 영어를 가르쳤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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