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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⑥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신세계를 ‘발견한’ 유럽이 물었다

  • 김윤경 대구대 전임강사·영어영문학 ykyungkim@gmail.com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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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주 노동자를 보고 신경이 쓰일 때, 이국적인 식당을 찾아다닐 때, 엽서 속 이국의 풍경에 설렐 때 우리는 내 붓으로 타자(他者)를 그린다.
  • 우리는 다름을 어떻게 느끼고, 왜 그렇게 느끼는 걸까?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16~17세기 유럽인이 그린 타자의 모습. 좌측 그림은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여성으로, 전신에 나뭇잎모양 문신이 있다. 우측은 반인반어 괴물의 상상도다.

몇년 전 필자는 인터넷에서 여러 사람의 사진을 보고 국적을 맞혀보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외국 생활을 좀 했던지라 자신만만하게 게임을 시작했으나 점수는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거리 한복판에서 어떤 여성을 보고 ‘중국 사람이네’라고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절대적이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일단 그 여성이 한국인이 아니라고 분류할 때부터 한국 여성의 외양, 제스처 등에 대한 본인의 경험과 생각이 개입된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인 중에서 중국인이라고 추측할 때에도 그에 관계된 생각이나 편견이 다시 발동하게 된다.

낯선 이와 마주쳤을 때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처럼 낯선 얼굴을 ‘낯설다’라고 인식하는 과정과 그 낯섦을 그리는 방식이다. 규모는 다양하지만 전쟁과 여행, 교역을 통해 인간은 다른 세계의 사람을 계속 만나왔고, 이들을 인종적·민족적 ‘타자’로 인식하고 재현해온 역사도 짧지 않다. 일반적으로 타자를 자신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이들을 형상화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가 수반된다. 즉 타자를 그렇게 인식하는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과 실제로 타자를 그려놓았을 때 그 모습이 자신에게 타자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라는 고민이다.

17세기 영국 작가들도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글로벌 르네상스’라고도 할 수 있을 16~17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큰 범위로 자기 밖의 세계와 만났다. 항해술을 비롯한 기술의 발전으로 유럽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닿을 수 있었고, 이 지역을 대거 식민화하며 다량의 자원을 수입했다. 물론 오스만튀르크 같은 지중해 권역의 나라나 인도와의 교류도 확대됐다. 신세계의 발견과 식민화, 팽창하는 교역과 함께 다량의 새로운 문물과 지식도 유입됐다. 서구는 이런 ‘수입품’을 자신의 사회와 지식체계 속에 껄끄럽지 않은 형태로 안착시키고자 이런 것들과 지적·문화적 차원에서 협상하려 애썼다.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 확대된 만큼 신세계나 인종적 타자에 대해 보고하는 문헌이나 문화 상품도 대폭 늘었다. 또 몽테뉴의 ‘식인에 대해서’(1580)처럼 신세계 사람들을 어떤 존재로 봐야 할지를 논의한 글도 있었다. 그런데 문화 상품의 경우, 여행기이든 연극이든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 ‘객관적’인 보고와 재현은 거의 불가능했다. 문화 상품은 그것을 수용할 사람들의 기대 수준과 이해, 감성의 틀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에 대한 문화적 재현은 타자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정도로 이들을 재현하는 작가 자신과 재현된 타자를 해석하는 사회를 보여준다. 아래에서 논의할 두 작품, 셰익스피어의 ‘태풍’과 아프라 벤(1640~89)의 ‘오루노코’는 신세계, 신세계인과의 만남이라는 재료로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7세기 영국에선 지중해 연안의 나라를 포함해 외국을 배경으로 하거나 외지인이 주요 인물로 나오는 문학작품이 적지 않았으나, 이 두 작품은 타자의 모습을 더욱 섬세하게 그렸다고 평가돼왔다. 그러면 타자의 모습과 이들과 유럽인 사이의 만남이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주목하면서‘태풍’과 ‘오루노코’를 살펴보자.



“이 섬은 내 것이오” : 타자의 주장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1611년에 상연된 셰익스피어의 희곡 ‘태풍’은 밀라노의 공작 프로스페로의 고초와 복수를 그린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학문만 좋아하며 마법도 공부하던 프로스페로는 야심적인 동생으로 말미암아 쫓겨나서 딸과 함께 이름 없는 작은 섬에 은거한다. 그는 원래 그 섬에 살던 마녀의 아들 칼리반과 정령인 아리엘을 부리며 살았는데, 칼리반과 프로스페로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프로스페로는 천운의 힘과 자신의 마법을 이용해 근처 바다를 항해하던 자신의 동생 일행을 난파시켜 그 섬으로 데려오고, 이들을 혼내준 다음 함께 귀향하기로 한다.

‘태풍’은 프로스페로의 동생 일행이 튀니지로 시집가게 된 나폴리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것으로 설명하는 등 한층 교류가 활발해진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버뮤다 제도에 난파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담이 ‘태풍’의 소재라는 추측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그 섬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반과 아리엘의 노고에 의지해 사는 프로스페로 부녀의 모습은 일견 신세계에 건너간 이 시대의 유럽인처럼 보일 여지가 크다. 그런데 프로스페로를 식민주의자, 칼리반을 착취당하는 원주민으로만 보면 지나치게 단순한 독해라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지명을 언급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태풍’은 배경의 이름이 없다. 그저 신비로운 느낌이 강한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리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정령이고 칼리반은 알제리 마녀가 악마와 사통(私通)해 낳은 아들로 설명되고 있어서, 칼리반을 신세계 원주민들과 완전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선후와 비중을 정확하게 따지자면 셰익스피어는 프로스페로가 이국적이고도 신비로운 공간에서 겪는 사건을 원한 것이고, 그 공간에 살던 존재인 칼리반을 설명할 때 신세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일부분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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