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호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망국의 한, 인종차별 딛고 전사(戰史)에 이름 남긴 인도주의자”

  • 한우성│재미언론인,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저자 wshan@stanford.edu

    입력2011-07-19 18: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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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항거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아들
    •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전선에서 불세출의 활약
    • 미군 역사 최초의 비(非)백인 야전대대장
    • 제대 후 6·25 발발하자 재입대해 전선으로
    • 한국·프랑스·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2003년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아 이민 영웅으로 선정된 김영옥(왼쪽) 대령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겸 의학박사 새미 리씨가 캘리포니아주 패사디나에서 개최된 로즈퍼레이드에 참석한 모습. 두 사람은 죽마고우다.



    미국 포털사이트 엠에스앤닷컴(msn.com)은 최근 미국 현충일을 맞아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명을 발표했다. 고(故) 김영옥 대령(1919~2005)이 그중 한 명으로 꼽혔다.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으로 북군을 승리로 이끈 뒤 18대 대통령이 된 율리시즈 그랜트,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으로 34대 대통령이 돼 6·25전쟁의 포성을 멈추게 한 아이젠하워,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니미츠 제독조차 들어가지 못한 이 명단에 유색인종으로는 유일하게 그가 포함된 것이다. 니미츠 제독은 미군 사상 최대의 해전으로 꼽히는 미드웨이 해전(1942)에서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혀 태평양전쟁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꼽힌다.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니미츠 고속도로’가 있다. 대령으로 퇴역한 ‘김영옥’이 군인으로서 그보다 높게 평가받은 셈이다.

    엠에스앤닷컴은 명단을 발표하면서 “김영옥은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한국계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예편했으나 6·25전쟁이 터지자 재입대했다. 6·25전쟁 당시 김영옥은 한국어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통역장교가 되는 대신 보병부대로 갔다. 이후 여러 차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후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야전대대장이 됐다”는 설명과 함께 그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번 발표는 미국이 김영옥 대령을 어느 수준으로 평가하는지와 함께, 그에 대한 국제적 역사적 평가가 깊이 있게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엠에스앤닷컴의 짧은 설명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먼저 ‘6·25전쟁 당시 한국어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보병부대로 갔다’는 내용을 보자. 당시 미군은 한국어를 단 한 마디라도 할 줄 아는 한국계 미군 장병은 모두 정보·통역·번역 병과에 배정했다. 그런데도 김 대령은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최전선 전투부대로 갔다는 의미다. 실제로 김 대령은 극동군사령부 한국어 시험에 일부러 떨어진 뒤 1951년 3월 한국에 왔고, 도착한 뒤에도 정보나 통역 장교로 후방에 붙잡아두려는 주한미군사령부와 7사단 사령부의 시도를 애써 뿌리친 채 최전선으로 갔다.

    미국 최고의 전쟁영웅



    ‘여러 차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후’라는 설명은 미국 정치권이나 미군 지휘부의 정치적 제스처 덕택에 대대장이 된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대대장이 됐다는 의미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야전대대장이 됐다’는 부분이다. 이 문장에는 실로 커다란 의미가 함축돼 있다. 김영옥 대령은 사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 야전대대장이다.

    흑인 노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건국된 미국은 6·25전쟁이 진행되던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종차별이 합법적으로 이뤄지던 비인간적인 나라였다. 1964년이 돼서야 법적으로 인종차별을 폐지했으나 현실적인 차별은 계속되다가, 불과 2년 전인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처음으로 유색인도 대통령이 되는 나라로 발전했다.

    미국사(史)는 인종차별의 개선 과정,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의 확산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자유와 평등의 확산은 미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유색 인종이 흘린 피와 직접적으로 관계돼 있다. 미국은 전쟁에서 백인 군대의 힘만으로 승리하기 어렵거나 승리가 불확실할 때 유색인에게 미군 군복을 입혔다. 군대는 계급장을 공개적으로 달고 다닌다는 점에서 유색인에 대한 대우가 가장 직설적으로 나타나는 곳이었다. 유색인이 전장에서 능력을 입증하고 큰 희생과 공헌을 하면 조금씩 높은 계급과 중요한 보직이 허용됐고, 이는 다시 미국사회 전반의 인종차별 개선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군을 대단히 소중하게 대우하는 국가다. 미군에 대한 미국인의 자부심과 애정은 실로 대단하다. 매년 현충일, 부모들이 자녀의 손을 잡고 전국 도처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기념식장을 찾는 모습에서도 이런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국민적인 지지를 누리는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유색인을 징병대상에서 제외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유색인에게 야전중대장까지의 보직만 허용했다. 6·25전쟁 때 첫 유색인 야전대대장이, 월남전에서 첫 유색인 야전연대장이 탄생했다.

    미군이 전장에서 유색인을 대대장에 임명하는 것은 백인 장병 800명의 생사를 유색인에게 맡긴다는 걸 의미한다. 미국사(史)와 미국인의 유색인에 대한 사고를 고려하면 파격 중의 파격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평등의 확산이라는 면에서도 커다란 의미가 있는 조치다. 그 주인공이 바로 김영옥이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희생과 봉사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을 시찰하는 미국 전쟁성부장관(가운데 양복 정장)을 맞아 의장대 사열을 인도하는 김영옥 당시 대위.

    미국에서 ‘미국 최고 전쟁영웅’이란 호칭은 단순히 전쟁에서 가장 용감했거나 유능했던 군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으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남북전쟁이라는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국가로 살아남는 과정에서, 국가적 명운을 걸고 싸웠던 양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냉전을 승리로 이끌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를 여는 과정에서, 생명을 내놓고 사선을 넘나들며 현재의 미국이 있도록 희생과 공헌을 한 인물을 의미한다.

    미국이 전쟁영웅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있음으로써 인권도 복지도 존재할 수 있음을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웠기 때문이며, 오래도록 그것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전쟁을 기억하고 그 과정을 통해 왜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어떻게 전쟁을 피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전쟁이 강요될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들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 발표에 곁들여진 설명은 ‘김영옥은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한국계’라고 시작된다. 이 설명은 19년 전 한국인을 파렴치하게 묘사했던 미국 주류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교차되면서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1992년 4월29일 시작)으로 불리며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이 사건 당시 로스앤젤레스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주류언론은 한국인의 이미지를 왜곡하는 기사를 대량 생산했다. ‘한국인들은 지역 사회에 대한 공헌이나 국가를 위한 헌신에는 관심 없이 돈벌이에만 급급한 수전노다. 1달러짜리 오렌지주스 한 병을 훔쳐 달아나는 흑인 소녀의 등에 총을 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 같은 보도는 당시 ‘로드니 킹(Rodney King) 사건’으로 폭발 직전이던 흑백갈등의 분출구로 재미 한인 사회를 속죄양으로 만드는 데 톡톡히 일조했다. 결국 재미동포 사회는 인명피해와 함께 3억달러의 재산피해를 보면서 폭동의 참담한 제물이 됐다.

    일본계 미군부대에서 맹활약

    ‘로드니 킹’ 사건이란 1991년 로스앤젤레스 일원에서 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된 흑인 청년 로드니 킹(당시 26세)이 백인 경찰들에 의해 무참히 구타당한 사건이다. 이 장면을 우연히 포착한 시민의 동영상이 미국 내외로 퍼지면서 세계적 뉴스가 됐다. 이 사건을 심리한 캘리포니아주 법원은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관 4명 모두에 유죄 선고를 내리지 않음으로써 흑인사회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이것은 곧 폭동으로 이어졌다. (미국 법체계에서 무죄 선고와 ‘유죄 선고를 내리지 않는 것’은 법리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이후 미국 연방법원은 이 사건을 재심해 가해 경찰관 2명을 징역형에 처했다.)

    그러므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명 가운데 한 명인 김영옥 대령은 한국계’라는 설명은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 당시 범람했던 한국인에 대한 악의에 찬 왜곡 보도의 정반대편에서 한국인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두 가지 보도 모두에서 한국인 전체와 재미 한인의 이미지가 동일시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김영옥 대령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서 불패신화를 남긴 전설적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재미동포 2세인 그는 미군 육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일본계 미군부대인 100대대의 소대장·정보참모·작전참모 등을 맡으며 명성을 날렸다. 100대대는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미국이 일본계 이민자의 충성심을 의심해 일본계 시민 12만 명을 격리 수용하고 2세들로 편성한 미군부대다. 유럽전선에서 용맹을 떨쳐 훗날 부대 규모와 전투기간을 기준으로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가 됐다.

    김영옥 대령은 1941년 징집돼 육군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미군 사상 최초로 아시아계 장교후보생으로 선발됐는데, 그가 1943년 2월 임관해 처음 배치된 곳이 바로 이 부대였다. 독립운동가 김순권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음식은 먹지도 말고, 일본 아이들과는 놀지도 말라”는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고 자라난 그가 이 부대에 배치된 것은 혼돈의 역사가 빚은 아이러니다.

    김영옥 대령이 처음 이 부대로 가자 대대장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갈등을 잘 안다. 다른 부대로 보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그들도 저도 미국 시민으로 같은 목적을 위해 싸웁니다. 이 부대에 남겠습니다”라고 답해 잔류한 이야기는 이제 유명한 일화다.

    이후 그가 세운 전훈은 눈부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독일군이 이탈리아 로마를 놓고 공방전을 벌일 때 김영옥 대령은 야음(夜陰)을 이용해 부하 1명만 데리고 독일군 진영에 침투했다. 다음날 날이 샌 뒤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 포로 2명을 생포해 귀환한 그가 영웅이 된 건 당연한 일이다. 연합군은 이 포로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활용해 총공세에 돌입, 1944년 6월 로마 해방을 이끌어냈다. 3개월 후 벌어진 이탈리아 피사 해방전에서는 제갈공명을 무색게 하는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그가 이끄는 부대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아르노 강을 건너 피사에 무혈입성하도록 했다. 그해 9월 김영옥 대령의 부대에 의해 인류 문명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는 피사의 사탑이 전화(戰禍)에서 구제됐고, 피사는 해방됐다.

    의지와 능력

    프랑스에서 그는 연합군이 독일에 진입할 때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보주산맥 전투에서 브뤼에르,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킨 주역이었다. 같은 해 10월 브뤼에르 전투에서 김영옥 대령은 적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독일군의 항복을 이끌며 승리를 얻기도 했다.

    종전 후인 1946년 예편해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한 김영옥 대령이 다시 전선으로 향하게 된 건 6·25전쟁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재입대를 자원, 유엔군 3차 반격의 견인차가 돼 1951년 5~6월 전선 60㎞ 북상의 주역이 됐다. 중부전선에서는 이때의 전선이 오늘날 휴전선의 원형이 됐다.

    김영옥 대령은 이 전쟁에서 통상적인 미군 전선 복무기간의 2배인 18개월 동안, 중상을 입은 탓에 야전병원으로 후송된 기간을 제외하면 단 하루의 휴가도 없이 최전선을 지켰다. 그리고 1951년 10월 미군 역사상 전장에서 대대를 지휘한 최초의 유색인 대대장이 됐다. 그가 이끌던 미 육군 31연대 1대대는 최전선에서 싸우면서도 서울 삼각지 일원에 있던 고아원 ‘경천애인사’를 지원, 전쟁고아들을 돌봤다. 경천애인사는 고아를 최고 500여 명까지 수용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이후 화가·음악가·목사·교수·과학자·사업가 등 훌륭한 사회인으로 자랐다.

    6·25전쟁이 지지부진한 휴전회담과 함께 인명 피해만 양산하는 목적 없는 전쟁으로 변해가자 한국을 떠난 김영옥 대령은 1963년 군사고문으로 우리나라를 다시 찾았다. 이때 한국에서 다시 전쟁이 터질 경우에 대비해 한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를 창설하는 등 한국 방어계획을 현대화해 이후 한국이 경제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군사적 방패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6·25전쟁에서 입은 중상의 후유증으로 큰 수술만 약 40차례 받으면서 1972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전역 후에도 미국 정계나 재계의 유혹을 뿌리치고 인종을 초월해 입양아·장애인·노인·청소년·빈민·가정폭력피해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 데 33년을 바치다 2005년 눈을 감았다. 지금 그는 호놀룰루에 있는 미국 국립묘지에 영면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조국 없는 이민자의 자식이라는 설움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따른 가난 △법적으로도 인정되던 인종차별 △전장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한 신체장애라는 여러 걸림돌을 자신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넘어서 세계를 무대로 기상을 떨쳤던, 그러면서도 항상 약자의 편에 섰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이번 발표에 앞서서도 김영옥 대령의 희생과 헌신과 봉사를 인정하고 치하하는 조치를 계속해왔다. △각종 훈장 및 표창장 수여 △김영옥중학교 설립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설립 등이다. 우선 미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당시의 무훈에 입각해 특별무공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1개(1944년), 은성무공훈장 2개, 공로무공훈장 2개, 동성무공훈장 2개, 전상훈장 3개 등 최소 10개의 주요 훈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특별무공훈장은 미국 최고무공훈장인 명예무공훈장(Medal of Honor)에 이어 훈격 2위인 훈장이다. 김영옥 대령은 이외에도 한국 최고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2006년)과 국민훈장 모란장, 프랑스에서는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2005년)과 십자무공훈장, 이탈리아의 최고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1946년)과 동성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미국 정부기관, 연방의원들, 캘리포니아주 의회 및 주의원들, 로스앤젤레스 시의회 및 시의원들, 민간기관 등이 그에게 수여한 표창장도 250개가 넘는다. 에드워드 로이스 미국 연방하원의원은 수년 전 김영옥 대령의 업적을 찬양하며 연방의회 속기록에 이를 공식적으로 남기기도 했다.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왼쪽) 2009년 9월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개교한 김영옥 중학교.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의 이름을 딴 중학교다. (오른쪽) 2010년 9월 열린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개소식. 왼쪽 두 번째부터 1948년·1952년 올림픽 다이빙 종목 금메달을 획득한 한민족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선수 새미 리, 티모시 화이트 UCR 총장, 홍명기 후원이사장, 한 명 건너 연구소장 장태한 교수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고(故) 김영옥 대령

    1945년 2월 유럽전선에서 싸우다 귀향한 김영옥 대령이 로스앤젤레스 기차역으로 마중 나온 어머니와 포옹하는 모습. 당시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김영옥 대령의 귀환소식을 듣고 사진 기자를 역으로 보내 촬영한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조치로는 김영옥중학교 설립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교육위원회는 2009년 9월 코리아타운에 개교한 한 공립중학교의 이름을 ‘김영옥 중학교(Young Oak Kim Academy)’로 명명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이에 따라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의 이름을 딴 중학교가 탄생했다. 교정 화단에 무궁화가 심어져 있는 이 학교는 한국계 학생이 약 10%에 불과하다. 올해 봄 학기에 개설된 한국어 강좌 수강생 33명 가운데 31명이 타 인종이다.

    지난해 3월 리처드 마이어스 전 미국합참의장(예비역 공군대장)은 미국 국방대학교 재단 주최로 전국을 순회하는 국가안보 심포지엄을 시작하며 1회 장소를 김영옥중학교로 정했다. 개교 2년이 채 되지 않은 김영옥중학교는 이미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R·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이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눈여겨볼 일이다. 이 대학은 2010년 한국 정부와 손잡고 세운 재미동포연구소의 이름을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Young Oak Kim Center for Korean American Studies)’로 정했다. 이 연구소 역시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의 이름을 따 명명된 대학기구다. 동시에 한국 정부가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최초로 국제무대에 세운 동포연구소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 연구소를 세계 도처에 산재한 한국학 연구소와 달리 해외 동포에 대한 연구, 나아가 지구촌 한민족에 대한 연구를 하는 연구기관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재원은 한국 정부가 출연하는 300만달러, UCR이 내놓은 매칭 펀드, 재미동포 사회가 기부하는 100만달러로 마련했다. 이스라엘과 일본이 재미유대인이나 재미일본인과 손잡고 미국의 대내외 정책에 소리 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액수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출발인 것만은 확실하다.

    어린이의 롤모델

    이 연구소 출범과 관련해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관련 예산안이 17대와 18대 한국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당 남경필·정진석·김충환·구상찬·이정현 의원, 민주당 이미경·한병도 의원 등의 이해를 바탕으로 초당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권이 정치적 노선을 초월해 김영옥 대령과 관련된 사안을 힘을 모아 추진한 일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5년에도 있었다. 그에게 대한민국 최고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당시 한나라당 남경필·홍준표·황우여·나경원 의원과 민주당 이미경·유재건·송영길·한명숙 의원 등 여야 국회의원 100명이 뜻을 모은 것이다. 이들은 함께 이름을 적은 ‘합동지지서’를 발표하며 김영옥 대령에 대한 태극무공훈장 서훈을 촉구했다.

    불세출의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던 김영옥 대령이 남긴 유산을 미래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부터 초등학교 5학년1학기 국어교과서에 김영옥 대령의 이야기가 4쪽에 걸쳐 실렸다. 현재의 기성세대가 세종대왕·이순신·안중근 등을 한국이 낳은 영웅이자 역할 모델로 배우고 자랐듯, 이제 한국의 모든 학생은 김영옥을 배우며 자라게 된 것이다.

    국방대·육군본부·육군논산훈련소·육군3사관학교·해군교육사령부·해군사관학교·해군대학·공군작전사령부·공군사관학교·경찰대 등 군경기관뿐 아니라 연세대·인하대·금오공대 같은 일반대학, 국민은행·대영오앤이 등 민간기업도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을 주제로 한 강연을 개최하고 있다. 국방일보와 미주 중앙일보는 지면을 통해 그의 일대기를 연재했다. 사단법인 유엔인권정책센터(대표 신혜수·정진성·이양희)는 그의 삶을 담은 라디오 다큐드라마를 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국군방송에 기부돼 2007년 첫 방송 후 지금도 재방송 중이다. 미주 중앙방송과 라디오코리아 등을 통해 미국 내에서도 수차 방송됐다. MBC는 그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제작해 역시 수차에 걸쳐 방송했다. 그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것 같다. CJ E·M 계열사인 tvN이 또 한 번 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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