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년 지났으나 ‘교원호봉확인’ 2심 진행 중
- 청와대·안기부·문교부·기업 힘 합쳐 ‘전교조 탄압’
- 사망 50여 명, 이혼 100여 명, 생활비 없어 신문배달까지
- YS정권 때 ‘복직’ 아니라 특별‘신규’채용
- “2006년 교육부 ‘교원평가제와 맞바꾸자’ 제안했다”
- 명예회복 안 되면 ‘민주유공자증’ 반납하겠다
1989년 7월13일 서울 자양고 학생 500여 명은 전교조 관련 교사징계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
이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1세대 교사. 전교조는 노태우 정권 때인 1989년 5월 결성돼 10년 후인 1999년 합법화됐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최초 결성 당시 조합원은 3만명. 이 중 전교조 탈퇴를 끝까지 거부한 교사 1519명은 1989년 강제 해직됐다.
이들 중 1400여 명이 1994년 김영삼 정권 당시 ‘특별신규채용’돼 다시 교단에 섰지만, 당시의 상처는 아직도 선명하다. 현재 70명의 당시 해직교사는 2007년부터 ‘교원호봉확인’에 대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20여 년 전, 전교조 설립 당시 어떤 일이 있었을까?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국정원)이 발행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및 언론보도 기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중간평가 무마 위해 전교조 탄압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으나 민주세력의 반발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1988년 3월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해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했다. 노 대통령은 1987년 12월 대선 막바지에 “5공을 청산하고 국민의 신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중간평가를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으나, 당시 상황으로는 중간평가에서 승산이 없었다.
취임 2년차인 1989년, 노 대통령에게는 이 난국을 타개할 ‘한방’이 필요했다. 노 대통령이 선택한 카드는 ‘공안정국’이었다. 마침 1989년 봄 문익환 목사 등 민간인이 방북했다.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서경원의 방북으로 정부와 야당의 갈등도 깊어졌다. 안기부·검찰 등 정부 내 공안세력이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교사 사회에서도 노동조합을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1980년대 초반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흥사단 등 종교단체 중심으로 교사 소모임이 활성화되면서 자생적 교사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교사가 교육권을 침해받고 해임된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은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으로 이어졌다. 교사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 사이에서도 촌지, 부정입학 등 교육계 뿌리 깊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교사의 노동조합 설립은 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1989년 2월 임시국회에서 6급 이하 공무원의 노조 결성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조합법’이 야3당 단일안으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의 전교조 합법 설립에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전교조 합법 설립에 제동이 걸렸다.
전교협은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더라도 먼저 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노조의 힘으로 노동조합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1989년 2월 ‘교원노조 결성방침’을 정하고 5월 전교조가 공식 출범했다.
전교조는 출범과 동시에 탄압받았다. 충북 제원고 강성호 교사 등 상당수 전교조 교사가 수업 내용을 이유로 검찰에 구속되거나 직위해제됐다. 검찰은 전교조 결성 주동교사를 찾겠다며 상당수 교사를 소환해 조사했다. 동시에 학교와 정부는 전교조 가입 교사에게 “전교조를 탈퇴하면 모든 걸 불문(不問)하겠다”며 탈퇴를 유도했다.
경찰은 5월28일 전교조 결성대회를 원천 봉쇄하고 교사 1082명을 연행했다. 7월1일 문교부는 “전교조 조합원은 전원 파면하거나 해임하라”며 더욱 강경한 대책을 발표했다. 이때 상당수 교사가 교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교조를 탈퇴했다. 하지만 전교조 탈퇴를 끝까지 거부한 교사 1519명은 절차도 밟지 않은 채 무단 해고됐다.
당시 서울 강신중 송유정 교사는 전교조 분회 결성식 등 전교조 관련 행사에 두 번 참석했다는 이유로 부임 5개월 만에 해직됐다. 만삭이었던 전남 함평중 이명심 교사는 학교로부터 “출산휴가 전에 전교조를 탈퇴하라”는 종용을 받다 결국 출산을 보름 앞둔 8월16일 교사직에서 쫓겨났다.
1989년 5월14일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전교조 대회.
유례없는 교사 대량해고 사태에 학부모와 학생도 동요했다. 1989년 5월29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버려놓는 전교조 교사를 처벌해달라”고 시위한 반면, 같은 날 중·고교생 수백여 명은 직위해제된 교사의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심지어 모 학교 학생회장은 교사 직위해제에 반대하며 학교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에게 큰 갈등과 아픔만을 남긴 채 전교조 교사 1519명은 교단을 떠났다.
전교조 탄압은 청와대·안기부 공동작전
당시 전교조 교사 해직은 정부 주도하에 정치적으로 진행됐다. 1989년 이철 당시 국회의원이 공개한 ‘정부의 교원노조 대책에 관한 비공개자료’ 3건과 국정원 진실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와대는 전교조 탄압을 위해 △민정당의 각종 조직과 지역구를 이용해 교사와 학부모를 설득했고 △청와대 사회보좌역이 ‘전교조를 배척하자’는 내용의 지방 순회강연을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18억원을 갹출했다.
안기부는 △신규 임용자의 신원을 정밀 조사했고 △교원노조 배후세력, 지원단체, 재야세력을 밝혀내는 내사를 했다. 관련 정보는 청와대에 즉각 전달됐고 청와대와 안기부는 전교조 문제에 대해 깊이 협의했다. 안기부는 보안심사를 통해 신규 교사 임용대상자 중 학창시절에 시위에 단순 가담한 127명의 임용을 취소했다. 청와대 주관으로 안기부, 보안사, 내무부, 대검찰청 등 수사부처와 문교부, 문공부 등 관계기관이 참여한 대책회의가 수시로 열리면서 전교조 강경대책이 논의됐다.
대기업도 전교조 문제에 관여했다. 전교조가 1990년 펴낸 ‘한국교육운동백서’에 따르면 1989년 삼성그룹 내에 해직교사를 구제하자는 취지의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이에 삼성그룹은 △전교조 ‘실체’에 대한 구두 교육을 실시하고 △서명운동을 주도한 사원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주의하라’고 사실상 회유했다. 또 △전교조 서명 관련 사내 동향을 파악해 매일 비서실, 인사팀에 전달하게 했고 △비서실은 그룹 전체의 동향을 취합, 정리했다. 사실상 전교조 서명운동 및 직원 의사표현의 자유를 막은 것이다. 이에 대해 박석무 당시 국회의원은 법정에서 “그때 재벌이 전교조 분쇄를 위해 돈을 댔던 기억이 있다. 삼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많은 대기업에 이런 문건이 동시에 배포됐다”고 진술했다.
촌지·부정입학 없애기 앞장선 전교조
노태우 정권과 안기부는 교원노조 문제를 공안대책 차원에서 다뤘고, 전교조 가입 교사 해임이나 징계 수준은 청와대와 안기부가 결정했다. 즉 정부가 공안정국을 만들기 위해 전교조 문제를 일으켰고, 전교조 교사들은 무고하게 희생된 것이다.
왜 전교조는 설립만으로 이토록 핍박받은 것일까? 해직된 정만진(55) 교사는 “1980년대 대학진학률은 27%에 불과했다. 당시 ‘대졸’로만 만들어진 단체는 전교조가 유일했다. 정부로서는 지식인 집단이 두려웠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전교조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높았던 것도 정부에는 부담이었다. 전교조 소속 평교사였던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전교조 교사라면 택시 운전사가 차비도 안 받았다”고 말했다.
1999년 전교조가 합법화 됐다.
전교조의 촌지 안 받기 운동을 통해 1980년대 후반에는 학교 내 ‘공공연한’ 촌지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김상완 교사는 “모든 국민은 잠재적 학부모이거나 학생인 ‘교육 당사자’다. 전교조의 입장에 관심이 많다. 그간 전교조가 사회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활동을 많이 벌여왔기 때문에 국민적 인식이 좋았다. 정부로서는 우리가 두려웠던 것”이라며 “전교조 선생은 당시 다 존경받고 깨끗한 사람들이었다. 자기가 떳떳하니까 그 험한 시기에도 용기 있게 교육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해직 후 힘겨운 5년
평생 교직만을 업으로 삼아온 해직교사 1519명. 이들은 교편을 빼앗긴 채 거친 사회에 내던져졌다. 정만진 선생은 “신문배달부터 대학 강의까지 안 해본 게 없다”고 말했다. 일반 회사에 취직하려고 해도 ‘해직교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쉽지 않았다. 해직교사 사이에는 늘 “누구가 생활비가 없어 집을 팔았다더라” “누구 어머니가 아프신데 치료비가 없다더라” 하는 소식이 들렸다.
해직으로 인해 전교조 교사 100여 명이 이혼했다. 가장이 가정을 부양 못 하니 어쩔 수 없었던 것. 스트레스성 질환은 기본, 암, 뇌종양 같은 위독한 병에 걸린 경우도 많았다. 한 해직 여교사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현재까지 사망한 인원은 50여 명. 40여명은 암으로 투병 중이다.
퇴직교사는 ‘잠재적 시국사범’으로 취급받았다. 김상완 교사는 “전교조 행사가 있는 날이면 경찰서 정보과 직원이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다 붙잡아갔다. 경찰서에 연행하는 건 불법이니까 대구 팔공산 중턱 식당가에 나를 데려가 전교조 행사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문민정부’ 시대가 열렸다. 전교조 해직교사에게 희망이 생겼다. 김영삼정부는 해임교사와 협상 끝에 ‘특별채용’ 카드를 꺼냈다. 아직 전교조가 합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원상복귀는 어렵다는 것. 전교조 해직 교사들은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특별채용안’을 받아들였다.
이상호 교사는 “모두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억울한 면은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정만진 교사는 “전교조 해직교사는 너무 순수한 사람들이라 특별채용이고 뭐고 다 모른다. 그냥 아이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고 어서 교편을 잡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교사 1484명이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해직기간의 경력·호봉은 인정받지 못한 채 모두 ‘특별 채용교사’가 됐다.
교직으로 돌아갔지만…
교직에 돌아간 것은 행복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발목을 잡았다. 그간의 호봉, 경력, 연금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 퇴직 당시 받았던 연금액을 다시 납부해 연금 불입을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교사들은 생활이 어려웠기에 이미 연금을 생활비로 써버린 후였다. 나이 많은 교사들은 특별채용된 지 5년도 안 돼 만 62세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다. 그들은 40년 가까이 교직생활을 하고도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김상완 교사는 “내 나이 60으로 교장이 됐어도 진작 됐을 나이지만 아직도 평교사다. 1989년 15년 경력에 1994년부터 다시 경력이 쌓이니 진급에 불이익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만진 교사는 “해직 5년간 임금을 못 받았을 뿐 아니라 매년 동기들보다 5년만큼 호봉이 뒤처져 있으니 임금 차이가 너무 크다. 쌓이고 쌓이니 평생 어렵다”고 한탄했다.
7월6일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서울고등법원에 모였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면서 전교조 해직교사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에 전교조가 합법 단체로 인정된 것. 2000년 1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공포돼 전교조 교사 1504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민주유공자증’을 받았다.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는 호봉·보수·승진·경력·연금 등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관련 조항이 신설되면서 전교조 해직 교사는 ‘민주화 관련 해직교사 원상회복 추진 위원회’(이하 원회추)를 조직했다. 원회추는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현 교육과학기술부)에 해직기간의 교육경력, 호봉, 연금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교육부와 전교조 단체교섭이 이뤄졌다.
교육부 “교육평가제와 원상회복 바꾸자”
이상호 교사는 정부 공문 두 장을 제시했다. 2005년 11월25일 교육부가 전교조 위원장에게 보낸 질의 회신에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복직교사의 경력과 호봉 회복 문제는 관련부처와 협의해 2006년 3월부터 적용할 수 있도록 추진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가 2005년 12월13일 전교조 위원장에게 보낸 공문에는 “해직기간 경력과 호봉을 원상회복하는 것은 법의 복직권고 취지에 부합합니다”라고 돼 있다.
2006년 본격적으로 해직교사 및 교육부의 협상이 시작되면서 전교조 해직교사의 부푼 마음은 짓밟혔다. 교육부가 새로운 안(案)을 제시한 것. 당시 전교조는 교육부가 전면 실시하려는 교원능력개발평가(이하 교원평가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교육부는 전교조 해직교사에게 회심의 ‘카드’를 내밀었다.
이상호 교사는 “교육부는 전교조가 교원평가에 대해 완화된 입장을 밝히면 인사경력을 제외한 경제적·보상부분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전교조 해직교사들은 후배 교사들의 미래를 걸고 장사하라는 것 아니냐”며 반발했다. 결국 8월 교육부는 “해직기간의 교육경력 인정은 무리”라고 밝혔다. 전교조와 교육부 사이의 협상이 결렬된 것. 이 교사는 전교조-해직교사 협상이 결렬되도록 한 ‘핵심 인물’로 변양균 당시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을 지목했다.
“당시 교육부와 원회추는 공식·비공식적으로 오랫동안 협상을 했어요. 교육부는 원회추 안을 충분히 받아들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2006년 청와대가 원회추 안을 받아들이면 소요예산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거부한 거예요. 당시 청와대 예산 주무르던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변양균입니다!”
당시 정부가 추정한 비용은 모두 148억7000만원. 승급에 따른 보수 증가액으로 92억9300만원, 해직기간의 월급 및 호봉 승급에 따른 연금부담액이 55억7700만원이다. 이는 해직 교사 1명당 약 1000만원씩 받을 수 있는 액수다. 이 선생은 “당시 변 실장이 ‘예산이 많이 들뿐더러 전교조 해직교사에 보상을 해주면 해직언론인, 해직노동자들까지 보상을 요구해 예산이 더 많이 든다’고 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곧이어 2007년 여름 신정아 학력위조사건이 터지며 변 실장의 비리까지 드러났습니다. 억울한 해직교사를 위해 각 1000만원도 많다며 정책 집행을 거부했던 그 양반이 말입니다. 변 실장, 나아가 참여정부에 대해 실망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4년째 소송 중, 1심은 패소
해직교사들은 정부와의 협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사법부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2007년 11월 70여 명의 해직교사는 ‘면직무효와 호봉 정정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다. 4년째 지속되는 소송에 서동권 전 안기부장, 이철 전 국회의원, 박석무 전 국회의원, 박용덕 전 국정원 진실조사위원회 조사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박찬봉 교원정보부 장학 담당관, 정원식 전 총리, 박철언 전 청와대 정책보좌관 등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당시 전교조 교사 해직과 관련해 정부와 안기부의 담합을 아는 상당수 증인은 질병, 해외여행 등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행정소송이기 때문에 증인을 구인할 수 없다.
한편 3월30일 증인으로 출석한 박석무 전 의원은 전교조 해직교사에게 큰 힘이 됐다. 박 전 의원은 1989년 전교조 창립교사 해직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했다. 재판정 참고인석에 앉은 해직교사 70여 명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박 전 의원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당시 ‘학교 정상화 임시 조치 법안’ 통과 파동의 중심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장세동 안기부장이 있었다는데 이는 사실입니까?” (원고 대리인)
“당시 대통령과 안기부장이 주도한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박 전 의원)
“증인이 1993년 5월 발의한 ‘해직교원 복직 보상법’ 주요 내용은 무엇입니까?” (원고 대리인)
“해직교사가 교육을 바로잡고 교육민주화를 위해 전교조 운동을 한 것이지 특별히 죄를 지어 해직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는 이들에게 복직을 해서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5공은 말할 것도 없고 6공 정권 때도 교수들의 민주의식을 제어하지 않고는 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전교조를 막으려 했습니다.” (박 전 의원)
6월8일 모영기 당시 문교부 교직국장도 증인으로 출석했다.
“1989년 청와대에서 안기부, 보안사, 내무부, 대검, 문교부, 문공부, 안기부 등이 전교조 분쇄를 위한 강경대책을 세울 때 안기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요?” (원고 대리인)
“당시 전교조 사건은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관계부처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 전 교직국장)
“증인은 1989년 6월30일 ‘전교조 참여교사 중 주동자는 파면, 해임, 형사 고발하고 단순가담자 중 감봉, 탈퇴 때에는 처벌을 완화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지요?” (원고 대리인)
“실정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징계하는 것은 문교부의 방침입니다.” (모 전 교직국장)
패소 시 민주유공자증 반납할 것
명백한 증거가 다수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1심은 패소(敗訴)했다. “국가가 국가기관을 동원해 다소 불법이 있었으나 당시 법에 교사는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것. 김상완 교사는 “교사 해직 과정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가입만 해도 해직이라는 것은 지나친 처벌이다. 징계 절차를 무시한 데다가 반론권도 보호받지 못했으니 불법이다”라며 “끝까지 소송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는 정부에서 민주화 공훈을 인정받았지만 뭐가 남았습니까? 기껏 ‘유공자증’ 종이 한 장입니다. 당시 우리의 해직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판단했으면서 동시에 우리 노동조합 활동이 불법이라 보상할 수 없다니요? 정부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만약 원상회복해주지 않으면 저희 1500여 명 전교조 교사는 유공자증을 국가에 반납할 겁니다.”
7월12일 해직교사 고(故) 유상덕 교사가 암으로 사망했다. 2주 사이에 두 명이 세상을 떠났다. 현재 병상을 지키는 전교조 해직교사만도 50명이 넘는다. 이상호 교사는 비장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꼭 바로잡아야 합니다.”
2심 최종 선고일은 9월2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