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 부처, 노자(왼쪽부터)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삼교도’(작가 미상).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오로지 내 생각, 내 육신 그리고 내 영혼만으로 꽉 들어차 있을 것으로 생각해온 그 ‘나’라는 속에 수많은 나‘들’이 있다는 이 생각만큼, 현대의 사유를 잘 표현해주는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근대가 구축해온 그 ‘보편적 인간’이란 개념도 그러하다. 그 속엔 수많은 나‘들’이 있었지만 그 얼굴은 사뭇 오랫동안 가려져왔다. 그 속에서 배제되었던 ‘여성’, 서구 제국주의가 배제하고자 했던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최근의 ‘성적 소수자’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을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보편적 인간’의 개념 안에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나’로 대접받지 못하는 또 다른 ‘나들’이 내 속에 더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찌 보면 문명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하나의 문명으로 간주하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엔 ‘다른 무언가’가 언제나 득실거린다. 하나의 문명은 그 오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어떤 것은 밀어내고, 어떤 것은 그 안에 녹여내고, 또 어떤 것은 그 안에 숨긴 채 마치 하나인 것처럼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문명은 충돌하고 교류하고, 융화되면서 변화하는 다양한 ‘나들’의 덩어리인데도 말이다. 유교를 기반으로 성립한 조선 사회도 예외일 수 없다.
이 글은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이단으로 지목되어 배척되고 탄압받았던 도가의 경전 ‘노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다. 조선 문명은 다섯 권의 ‘노자’ 주석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앞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순언(醇言)’이라는 책에 얽힌 이야기가 이 글의 소재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하나의 문명 속에 정통과 이단, 주체와 타자, 나와 너라는 얄궂은 구분이 어떻게 서로 얽히고설킨 채로 어우러져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미리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이 글에서 ‘순언’의 내용을 분석하거나 철학적 해석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추리소설처럼 접근해 보자. 다만 이 글 속에는 ‘순언’에 얽힌 이야기와 관련된 과거의 인물들, 오늘날 학자들의 말과 글이 수시로 등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순언’에 얽힌 이야기는 조선 유학의 이야기이자,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독자도 이 글을 읽고 나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하며 ‘가시나무’의 가사를 읊조려보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