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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⑧

율곡 이이는 왜 ‘노자’를 주석했을까?

‘순언’에 드리운 침묵의 그림자

  • 김시천 │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muhayoo@hanmail.net

율곡 이이는 왜 ‘노자’를 주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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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언’, 그 ‘침묵’의 역사

율곡 이이는 왜 ‘노자’를 주석했을까?

충남 부여군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 김시습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자필 초상화를 채색해 2차 가공한 그림.

율곡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죽었다. 그러니까 율곡의 ‘순언’에 관한 이야기는 16세기 조선의 이야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순언’에 관한 이야기는 정확하게 1974년의 어느 날, 서울의 규장각(奎章閣)에서 시작된다. 그 어느 날 우연히 류칠노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한 권의 ‘노자’ 주석서를 발견하고, 그 책을 1975년 정초에 김길환 교수에게 전한다. 그리고 1976년 김길환 교수가 ‘순언’에 관한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순언’은 세상에 비로소 알려진다.

이 책은 ‘순언’이라는 제목 바로 다음에 “율곡 선생이 가려 뽑아서 풀이하고 구결을 달았다”(栗谷先生解口訣)는 문장이 나오고, 이어서 본문으로 이어진다. 거기에는 대개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지은이의 서문도, 간행연도도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도 김길환 교수가 ‘순언’이 율곡의 작품이라고 단정하게 된 것은, 책의 뒤에 실린 홍계희(洪啓禧·1703~1771)의 발문 때문이다. 율곡 사후 100년이 지나 태어난 홍계희가 오늘날의 논산에 해당하는 연산(連山)을 지나다 우연히 책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때는 1749년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홍계희가 율곡의 수제자였던 김장생(金長生)의 아들 김집(金集· 1574~ 1656)이 직접 필사한 ‘순언’ 한 권을 그의 후손에게서 직접 얻었다는 것이다. 혹 이 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몇 권을 간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홍계희의 발문이 끝난다. 그 외의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조선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율곡이 “불서(佛書)와 ‘노자’ 등 여러 책을 두루 살폈다”고 증언하고 있고, 율곡과 같은 시대의 송익필(宋翼弼·1534~1599)이 “‘노자’를 구차하게 유학에 일치시키려 한다”는 평을 한 것을 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다른 조선 시대 ‘노자’ 주석서인 ‘도덕지귀(道德至歸)’를 지은 서명응(徐命膺·1716~1787)이 율곡이 ‘노자’를 주석했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서명응이 율곡의 ‘순언’을 보았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서명응은 홍계희와 가까운 사이였고, 그가 보았다는 것이 홍계희가 간행해 준 것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송익필의 ‘순언’에 대한 평가 또한 홍계희의 발문에만 나온다는 점은, ‘순언’이 홍계희가 지은 위작(僞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외의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정말 ‘순언’은 율곡이 지은 것일까?



조선은 유교의 나라다. 고려 시대의 불교와 도교의 폐단을 비판하며, 고려 말에 등장한 신흥 사대부들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해, 불교와 도교를 이단(異端)으로 엄금했고, 유교적 이념의 실현을 위해 국가의 제도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유교화를 시도한 것이 조선 역사의 흐름이었다. 그런 조선 사회에서 불교의 서적이나 ‘노자’‘장자’와 같은 이단을 가까이 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이러한 금기를 어기게 되면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 곧 유교 문명의 적으로 몰려 탄압받곤 했다.

따라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더불어 조선의 가장 뛰어난 유학자로 숭앙받는 율곡이 ‘노자’에 주석을 했다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는 상당한 오명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유교 전통에서 ‘주(注)’는 ‘논어’나 ‘맹자’와 같은 유교의 ‘경전(經)’에나 합당한 학문적 작업이다. 그런데 이단의 책으로 기피해야 할 ‘노자’에 주석을 했다니, 아마도 율곡의 제자들 사이에서 이 일은 숨기고 싶고, 덮어두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순언’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하나는, 정통 주자학자 율곡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나아가 완고하고 보수적인 조선의 유교 사회가 이단인 도가에 대해 탄력적으로 소통해왔다는 증거라고 평가한 것이다. 심지어 도가 연구자들은 이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간의 평가에는 뭔가 빠진 게 있지는 않을까? 정작 설명되어야 할 아주 단순한 역사적 물음은 전혀 제기되지도 않은 게 아닐까?

만약 조선 유학이 이단에 그렇게 관대했다면, 왜 율곡이 지었다는 ‘순언’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가 오늘날 1974년에, 그가 죽고 조선이 망한 지 한참 후인 390년 만에 발견된 것일까? 도대체 ‘순언’에 짙게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 그 침묵의 시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날 우리가 해명하고 납득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침묵이 아닐까? 이 ‘침묵’의 의미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조선조 유교라는 그 ‘안(정통)’을 지나 ‘밖(이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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