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호

‘황손 가수’ 이석

“아프리카 청년들이 나를 보고 희망 가졌으면…”

  • 배수강 기자│bsk@donga.com

    입력2011-07-21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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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 새마을대학 건립 준비…“빈국 청년에 새마을정신 전수”
    • 10·26 직후 들이닥친 헌병, “황실사람 다 나가라”
    • “월남 군예대 생활은 정보활동 차원”
    • “돈 못 버는 개뼉다구 황손”에 환멸 느낀 여인들
    • 황실 복원? “일본 핏줄 황사손 인정 못해”
    • 종약원, “황사손 지명 기준은 따로 없다”
    ‘황손 가수’ 이석
    나라는 망해도 사람은 살 수밖에 없다. 의병을 일으켜 목숨 걸고 싸우거나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는 이들을 순국선열(殉國先烈)이니 의사(義士)니 하며 우러르는 것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분연히 떨쳐버렸기 때문이다.

    ‘비둘기집’을 노래한 ‘황손 가수’ 이석(70). 지금은 황실문화재단 총재라는 명함을 건네지만, 그는 ‘사람은 살 수밖에 없는’ 슬픔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석 총재는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승광재(承光齋)에 산다. 빛을 계승하는 집. 2004년 전주시가 민가 네 채를 매입해 조성한 작은 한옥이다. 빛(光)은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따왔다.

    빛을 계승하고 싶지만 그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다. ‘황손 가수’로 소개됐지만 사람들은 그를 황손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거듭된 결혼 실패와 미국에서 막노동, 찜질방을 전전했던 그의 삶은 외국인의 눈에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6월19일자 주말판에 ‘왕자 이야기(The Prince‘s Tale)’라는 제목으로 이 총재의 고단한 삶을 전했다.

    기자는 6월 중순 승광재에서 이 총재와 마주 앉았다. 이후 여러 차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칠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바리톤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승광재 여기저기에 걸린 황실의 흑백사진은 대한제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을 화제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아버지(의친왕) 사진이네요.



    “(사진을 보며) 잘생겼죠? 젊은 시절 사진입니다. 젊었을 때 대동단에 참여해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려다 붙잡혔죠. 아, 그때 잡히지 않았다면 한국 근현대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기골이 장대하고 남자다웠습니다. 나는 사동궁 서양식 건물에서 태어났고, 이후 성북동 성낙원에도 살았어요. 가끔 김구 선생이 찾아왔는데, 저는 ‘매미 아저씨’라고 불렀어요. 아버님은 종종 양주병을 들고 있었어요. 술을 많이 드시면 천장에 총을 쏘기도 했고요. 당시 오정환 비서는 ‘전하 고정하십시오’하고 말렸고, 어머니는 ‘구들장 빠진다’며 술병을 빼앗으려고 했어요.”

    만취하면 천장에 총 쏜 의친왕

    ▼ 왜 총을 쏘았나요?

    “울분이죠. 울분. 망국의….”

    ▼ 오래전 일인데 비서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신하로는 안충만·지강덕, 운전기사는 박재돌. 생생히 기억하죠. 제 아명이 영길인데, 아침에 문안 인사드리면 아버님은 ‘굿모닝’하고 인사하셨어요. 그러곤 ‘영길아, 재돌이에게 말 가져오라 해라’ 하셨죠.”

    여기서 잠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보자. 고종의 세 아들 중 순종(1874~ 1926)은 자식이 없었고, 영친왕(1897~ 1970)은 이방자 여사와 결혼해 이구(1931~2005) 황세손을 낳았다. 이구 황세손은 미국 스탠퍼드대 공학박사였지만 한국말을 못했고, 후사도 없이 2005년 일본의 한 호텔에서 의문사했다. 반면 이 총재의 아버지 의친왕(1877~1955)은 왕족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물이다. 1919년 고종이 별세하자, 그해 11월 상복으로 위장해 일부 독립운동 동지들의 안내를 받아 상해임시정부로 찾아가다 만주 안동에서 일경에게 발각됐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은 것은 명약관화하다. 의친왕은 7명의 여인에게서 13남9녀를 보았다. 11번째 아들이 이석 총재다.

    ▼ 사동궁(寺洞宮)은 어딘가요?

    “지금의 종로구 안국동 로터리에서 태화관(현재의 태화빌딩)까지 그 일대가 모두 궁이었어요. 서양식 건물과 기와집이 몰려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저이기도 했어요. 그곳에는 상궁, 나인, 청각씨(궁을 관리하는 사람) 등이 함께 살았고 일본 순경이 보초를 섰죠. 여섯째 명길(明吉) 형님은 서쪽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셨고, 일곱째 경길(慶吉) 형님은 북쪽 기와집에 살았죠. 경길 형님 집 앞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상궁들에게 혼나기도 했고요. 공주 해경(海慶) 누님 방에는 피아노도 있었어요.”

    ▼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아들을 봤으니, 의친왕께서는 이 총재를 무척 귀여워하셨겠네요?

    “그럼요. 형님들은 이미 출가하거나 어른이 됐고, 저는 막내였으니 더욱 귀여워하셨죠.”

    ‘황손 가수’ 이석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는 남양 홍씨. 홍씨가 참 착해요. 절도 있고, 예의 바르고. 19세에 저를 낳았어요. 창덕궁 전화교환수로 일하시다가 의친왕 눈에 띈 거죠.”

    ▼ 사동궁은 왜 없어졌나요?

    “이승만 정부가 민간에 불하했어요. 박정희 정부 때도 그랬고요. 헐값에 불하해 정치자금으로 썼다는 말도 있어요. 황실은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였으니까.”

    황실 사람들은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집단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석 총재도 사동궁, 성낙원, 별궁, 창덕궁 낙선재, 칠궁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칠궁(七宮)은 청와대 내(궁정동) 사적 제149호로,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 중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그는 의친왕과 어머니 남양 홍씨가 성낙원에서 1년여 딴살림을 차려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정부는 황실재산관리법을 만들어 황실 재산을 국유화했고, 구황실사무총국에서 그나마 윤대비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지만 그 돈으론 어림도 없었어요. 박정희 정부 때까지는 적게나마 생활비가 나왔죠. 그런데 10·26 이후 헌병들이 갑자기 칠궁에 들이닥치더니 나가라는 거예요.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헌병들은 ‘우린 역사 모른다. 귀찮은 존재들은 나가라’고 하더군요. 황실 가족과 딸린 사람을 치면 30명 정도 됐을 거예요. 칠궁 내 희빈 장씨 사당에 함께 살던 수길 형님은 헌병이 들이닥친 뒤 3일 만에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어요. 그전부터 황실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 가거나 숨어 살았어요. 저도 10·26 이후 미국으로 갔죠.”

    황실은 불편한 존재

    ▼ 사실상 황실 사람들을 내몰았군요.

    “말을 다 못하죠. 제 위로 형님들은 세상 물정도, 세상 살아가는 방법도 몰랐어요. 황실 법도만 익히다가 세상이 바뀌었으니 정체성 혼란, 그 자체였죠. 경길 형님은 경기도의 한 수도원에서 쓸쓸히 돌아가셨어요. 먹고살려고 아등바등했는데. 나는 그나마 노래라도 불렀으니….”

    이 총재의 존재감은 역시 노래인 듯했다. 황실의 쇠잔함을 잊고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 말이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살짝 번지더니 10여 분간 거침없이 ‘노래 인생’이 흘러나왔다. 그의 연예계 생활은 경동고 3학년 때 시작됐다. 서울 종로2가 ‘뉴월드’ 음악감상실에서 DJ를 보았는데, 건너편 ‘디 쉐네(Die Shoene)’에서는 이종환이 DJ를 보고 있었다. 당장 쓸 돈이 없던 시절, 이 총재 밑으로 세 명의 동생이 있었고, 어머니 남양 홍씨는 의친왕 사후 신당동 중앙시장과 영등포시장 등에서 국수를 팔았다. DJ는 노래와 가족부양을 동시에 만족시킨 최고의 직업이었다. 뉴월드 노래자랑에 나가 베사메무초를 불러 1등을 해 상금 1만원을 받았고, 미8군 무대와 워커힐로 옮기면서 몸값도 뛰었다.

    “미8군에서 일하던 최희준씨 자리에 제가 들어갔어요.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노래가 뜨자 최희준씨가 월급을 3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어요. 그 자리를 제가 맡았죠.”

    DJ를 하면서 외운 팝송이 도움이 됐고, 곧 영어도 익혔다. 어느 날 영어로 사회를 보자 급여는 8000원으로 뛰었다. 은행직원의 초임이 3000원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 1960년에 한국외대 스페인어과에 입학하셨는데요.

    “스페인어학과가 눈에 띄더라고요. 스페인에는 왕 제도가 있으니까 ‘얼른 외교관이 되어서 스페인으로 가 스페인 공주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연예계 생활은 반대가 심했을 거 같은데요.

    “심한 정도가 아니에요. 윤대비께서는 ‘황실이 망해도 그렇지 황손이 광대가 되느냐’며 굉장히 노여워했어요.”

    윤대비는 순종의 부인이다. 1926년 순종 서거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윤대비는 황실 최고 어른이었다. 이 총재는 후손이 없어 황족을 공평하게 대한 윤대비를 가슴속 깊이 존경했다. 1955년 의친왕 서거 이후 황실이 빠르게 몰락했을 때도 그나마 윤대비가 중심이 돼 황실은 뭉칠 수 있었다. 1964년 말 윤대비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충격이었다.

    “황손이 광대가 되느냐”

    “윤대비께서 돌아가시자 워커힐 사장에게 ‘한 달만 노래 부르지 않고 쉬겠다’고 했어요. 사회자가 없으면 쇼를 못 한다며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접었죠. 연예계 생활.”

    빈둥거리고 놀던 1965년 어느 날, 뜻밖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파월 국군총사령관 채명신 장군에게서 온 편지였다. ‘남자가수 3명, 밴드 8명으로 군예대(軍藝隊)를 꾸리려고 하니 베트남에 와서 노래도 하고 돈도 벌라’는 내용이었다. 1966년 4월1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훈련을 받고 6월 월남으로 갔다. 그러나 군예대 활동은 정보수집활동이었다고 이석은 말한다.

    “군예대 활동은 ‘정보활동’이었어요. 베트콩 마을에 가서 천막 치고 노래 불러서 호감을 사려는 거죠. 그리고 주민들로부터 베트콩의 정보를 빼내는 겁니다. 그때 라이따이한(來大韓)이 공연한다면 인기가 좋았어요.”

    어느 날 공연을 마치고 지프를 타고 가던 중 대전차지뢰가 폭발했다. 6시간 대수술을 받은 그는 1968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여전히 상흔이 남아 있다. 사고로 인해 지금도 팔이 종종 빠진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위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 남양 홍씨가 53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큰어머니 윤대비와 어머니, 두 여인의 운명으로 그는 한동안 존재의 이유를 잃었다. KBS, MBC 가요 프로그램 사회를 맡고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인기 가수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매일 술을 마셨다. 최원석 전 동아건설 회장과 야구선수 백인천과도 즐겨 만났다.

    “당시 최 회장은 인사동의 요정으로 종종 저를 불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를 손님들에게 황손이라고 소개하고는 노래를 불러보라더군요. 황손을 마음대로 부리면서 으스대는 거 같아 한마디했죠. ‘야. 네 돈 1억원은 내 돈 10만원의 값어치도 안 된다’고요. 이후 안 만나요.”

    방황 속에서 여러 여인도 만났다. 1970년 첫 번째 결혼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이후 여인들과는 ‘그냥’ 살았다. 그 사이 아들 하나, 딸 둘을 봤다. 그는 “나와 인연을 맺은 ‘귀인’만 10명은 될 것”이라며 헛헛하게 웃었지만, 황실 예의범절 속에 자란 황손과 생계를 중시하는 속세 여인들과의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여러 ‘귀인’이 공통적으로 한 “황손이 돈 벌어주느냐” “돈 못 버는 개뼉다구 황손”이라는 말에 그는 지금도 울컥했다.

    열세 번째 강도는 한국인

    10·26 이후 미국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주권 때문에 돈을 주고 한국계 미국 여성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의 ‘서류상 부인’은 결벽증이 있는 여인. “남자는 더러운 존재”라며 함께 밥도 먹지 않았다. ‘마지막 황제’ 푸이(賻儀)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부잣집 정원사로 일했고, 밤에는 총을 차고 경비도 섰다. 그렇게 4년간 돈을 모아 리커스토어(Liquor Store·동네 슈퍼마켓)를 차렸지만, 4년 동안 열세 번 권총강도를 당했다.

    “열세 번째 강도는 한국인과 멕시코인 2인조였어요. 급하니까 한국말로 ‘야 이 ××야. 빨리 내놔’하더라고요. 많이 당한 일이라 침착하게 돈을 주고 권총을 꺼내 따라가 한국인 강도에게 총을 겨눴어요. 멕시코 애가 그러더군요. ‘코리아노끼리 쏘지 마라’.”

    미국 삶에 대한 염증이 생겼다. 가게도 헐값에 팔았다. 마침 숙모(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989년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현재의 아들 엄마’와 10년 만에 만나 7년을 더 살았다. 운영하던 참치가게가 외환위기로 어려워지자 다시 ‘돈 얘기’로 다투기 시작했고, 결국 집을 나와 양산 통도사, 서울 수국사 등을 전전했다. 지프에 짐을 싣고 가고 싶은 대로 전국을 달렸다. 찜질방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서울 경복궁 앞으로 왔다. 생의 마지막 장소였다. 차를 몰고 경복궁을 들이받아 황손의 삶을 마무리하려는 그에게는 ‘이유 있는 반항’이었다. 그 사이 그의 ‘찜질방 생활’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전주시도 발 벗고 나섰다. 승광재에 거처를 마련해줬고, 전주 문화대사 역할도 맡겼다.

    ‘황손 가수’ 이석

    고종 황제 가족사진. 유모차에 앉은 덕혜옹주로 보아 그가 1~3세가량인 1913~1915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맨 왼쪽이 의친왕이다.

    “고마웠어요. 황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도 생겼고요. 지금은 전주시에서 역사해설가라고 75만원을 줘요. 이번에 150만원으로 올려준다고 했는데(웃음). 고문을 맡고 있는 회사에서도 200만원을 줘요. 지금은 전국을 돌며 황실 역사 강의를 하니 마음 편해요.”

    ▼ 강의 외에 다른 활동은 하지 않나요?

    “여기 오시는 분들을 안내하거나 문화해설도 하고, 10월에는 미국에서 한국 황실 역사 강의도 하기로 했어요. 제주도에 갈 일도 있고….”

    ▼ 제주도에요?

    “네. 그게 뭐냐면….”

    2시간여 인터뷰 동안 막힘없던 그의 답변이 순간 멈칫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고, 기자의 재촉에 난감해했다. 그는 마지못해 짧게 답했다.

    “유엔 빈곤퇴치 기금을 활용해 제주도에 ‘유엔 새마을대학’을 만들려고 해요. 기금이 52억달러 정도 되는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유엔 지원으로 세울 거예요. 몇몇 대학 관계자들과 지금 법인을 만들고 있어요. 우근민 제주특별자치도 도지사도 만나 대학 부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새마을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여러 차례 발언한 바 있다.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새마을운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해왔고, 연임이 확정된 뒤에도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유엔의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달성하는 매우 효과적인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 왜 건립하는 거죠?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을 세계 빈곤국, 아프리카 젊은이들에게 전수해주는 거죠. 유엔 자금으로 새마을대학에 입학시켜 인재로 키워 자국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들은 빈곤 퇴치를 위한 밀알이 되는 거죠.”

    ▼ 이 총재가 이사장이 되나요?

    “대학이 건립되면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어요. 빈국의 청년들이 저(패망한 대한제국의 황손)와 저의 삶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지고 일어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제가 그 정도의 상징성은 있다고 하더라고. 사라진 대한제국 황손과 함께 일어나자는 상징성….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기자는 두 시간여 그의 삶을 따라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민주공화국에서 패망한 황손의 삶은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의친왕 자녀 대부분이 숨어 살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공화국에 적응 못한 ‘개인의 무능력’탓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황실의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 황실 사람을 사회와 격리해놓은 정치지도자, 그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없었던 우리 사회는 어쩌면 황실 사람들을 더욱 나락으로 내몰았을지 모른다. 대화는 다시 황실 복원으로 흘렀다.

    ▼ 인터넷 카페를 통해 황실 복원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데요.

    “황실 복원도 좋고, 대한제국 정체성 찾기도 좋아요. 내가 전국을 돌며 역사 강의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그런데 잘못 꿰어진 단추부터 풀어야죠.”

    “나는 마음 비운 사람”

    그에게 ‘단추’는 황사손(皇嗣孫·선왕이 죽은 후 인정된 황손) 임명 문제였다. 이구 황세손이 2005년 후손 없이 사망하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빈소가 마련된 창덕궁 낙선재에서 상임이사회(이사장 이환의)를 열고 의친왕 손자 이원(50·본명 이상협)씨를 양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원씨는 의친왕 9남 충길씨의 맏아들. 미국 뉴욕에서 케이블방송 PD와 국내 홈쇼핑회사에서 일한 인물이다. 이 총재에게는 조카가 된다. 현재 이원씨는 황실 주요행사(조경단대제, 종묘대제, 사직대제, 건원릉 기신친향례, 환구대제)를 주관하고 있다. 이 총재는 2005년 그의 양자 결정에 대해 격하게 반대했다.

    ▼ 반대한 이유는 뭡니까?

    “네. 제가 데모했어요. 왜냐면 영친왕 전하는 일본 왕족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한 겁니다. 식민지화를 공고히 하려 한 거죠. 일본 핏줄은 끝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구 황세손 사후 그의 양자로 들어간다? 사후 양자는 민법에도 없는 제도입니다. 백번 양보해도 이구 황세손은 일본인 무당 아리다와 살았는데, 그렇다면 아리다의 양자로 가는 거 아닙니까. 황사손이 일본인 양자로 간다니요. 그래서 이원에게 말했어요. ‘나는 널 인정할 수 없다. 일본 핏줄 황사손이 뭐냐’고요. 그런데 종약원에서 시신 앞에서 양자 입적을 선포한 겁니다. 말이 됩니까?”

    ▼ 그럼 종약원은 왜 이원씨를 양자로 지명했을까요?

    “일본 영향을 이으려고 한 거겠죠. 종약원이 뭡니까? 궁궐에 들어오지도 못한 사람들이 황실 일을 하다니….”

    ▼ 종약원은 황실 몰락 이후 종묘제례나 각종 능(임금 묘)의 제향 같은, 사실상 황족단체 활동을 했는데요.

    “말씀 잘하셨어요. 종묘제례 때 태조에게 잔을 처음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을 그동안 누가 했습니까? 정치인 등 명망가들이 성금 내고 (초헌관을) 했지 않습니까. 종약원이, 이사장이 옳습니까? 1955년 아버님 사후 황실 힘이 없어지니까, 형님들은 법과 세상을 모르니까, 정치적으로 힘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좌지우지하고 있어요. 비참하게 산 황실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묻고 싶어요.”

    ▼ 빈소에서 ‘이구 황세손을 죽게 만든 책임이 종약원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이구 전하는 거의 아사(餓死)했어요. 정부에서 종약원을 통해 1년에 1억800만원을 이구 전하께 보내는데, 이구 전하가 제사에 안 오시니까, 돈을 보내주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이구 전하는 아리다라는 무당과 살던 데서 쫓겨난 겁니다.”

    이 총재는 종약원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종약원 이사장은 전라북도지사와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낸 이환의씨다. 종약원 측은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등 정치인들에게 초헌관을 제의했다가 여러 차례 거절당했는데, 이를 놓고 일부 황실 관련 단체는 ‘왕관 장사하다가 망신당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종약원, “황사손 지명은 지나간 얘기”

    이구 황세손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 일본의 한 호텔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는 몸이 시커멓게 변한 상태에서 발견됐는데, 이를 놓고 약물에 의한 죽음이라는 주장도 있다.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 2005년 8월 SBS는 이구 황세손의 생애와 죽음에 관해 취재했는데, 생활비를 7개월간 받지 못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양자 입적과 관련해 대한제국 황실연구가인 안천 서울교대 교수의 시각도 이 총재와 비슷하다.

    “이구 황세손은 양자를 거부하셨던 분입니다. 사후 양자를 들였다면, 조선황실 양자가 아니라 ‘아리다 가정집 양자’가 되지요. 이구 황세손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종약원 이사장이 호텔로 찾아가 이구 황세손의 약정서를 받았다지만, 거기에도 양자 입적 문제는 ‘2,3년 뒤 결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왜 종약원은 이석 총재를 꺼립니까?

    “종약원 전부가 아니에요. 이사장 등 일부가 그래요. 종약원 내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 그럼 황실 적통은 이석 총재가 이어야 하나요?

    “이원씨보다는 (내가) 가깝죠. 하지만 나는 마음을 비웠어요. 그저 찬란한 조선왕조 문화가 가려지고 잊히는 게 안타까워요.”

    한편 종약원 사무처 직원은 이석 총재의 발언을 확인하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구 황세손께 드리는 생활비는 월급처럼 정시에 준 것은 아니었고, 날짜상 변동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액 지급했어요. 종묘제례는 전주이씨 제사가 아니고 왕과 왕비에게 올리는 제례입니다. 원래 왕이 해야 하지만 현재는 대통령이 아닌가요. 대통령이 안 되면 국무총리(출신)가 할 수 있는 거고. 왕비를 배출한 문중에서도 추천을 받습니다. 참반원(참가자)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냅니다. 국고 지원을 받기 전부터 그래왔지요. 연예인(이석 총재를 지칭) 사생활로 보지 말아요.”

    이환의 이사장은 황사손 지명 문제에 대해 “다 지나간 얘기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황사손 지명 기준에 대해서는 “기준은 따로 없다. 많은 분의 의견이 모여 하나의 기준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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