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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황손 가수’ 이석

“아프리카 청년들이 나를 보고 희망 가졌으면…”

  • 배수강 기자│bsk@donga.com

‘황손 가수’ 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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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손 가수’ 이석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는 남양 홍씨. 홍씨가 참 착해요. 절도 있고, 예의 바르고. 19세에 저를 낳았어요. 창덕궁 전화교환수로 일하시다가 의친왕 눈에 띈 거죠.”

▼ 사동궁은 왜 없어졌나요?

“이승만 정부가 민간에 불하했어요. 박정희 정부 때도 그랬고요. 헐값에 불하해 정치자금으로 썼다는 말도 있어요. 황실은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였으니까.”

황실 사람들은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집단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석 총재도 사동궁, 성낙원, 별궁, 창덕궁 낙선재, 칠궁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칠궁(七宮)은 청와대 내(궁정동) 사적 제149호로,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 중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그는 의친왕과 어머니 남양 홍씨가 성낙원에서 1년여 딴살림을 차려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정부는 황실재산관리법을 만들어 황실 재산을 국유화했고, 구황실사무총국에서 그나마 윤대비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지만 그 돈으론 어림도 없었어요. 박정희 정부 때까지는 적게나마 생활비가 나왔죠. 그런데 10·26 이후 헌병들이 갑자기 칠궁에 들이닥치더니 나가라는 거예요.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헌병들은 ‘우린 역사 모른다. 귀찮은 존재들은 나가라’고 하더군요. 황실 가족과 딸린 사람을 치면 30명 정도 됐을 거예요. 칠궁 내 희빈 장씨 사당에 함께 살던 수길 형님은 헌병이 들이닥친 뒤 3일 만에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어요. 그전부터 황실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 가거나 숨어 살았어요. 저도 10·26 이후 미국으로 갔죠.”

황실은 불편한 존재

▼ 사실상 황실 사람들을 내몰았군요.

“말을 다 못하죠. 제 위로 형님들은 세상 물정도, 세상 살아가는 방법도 몰랐어요. 황실 법도만 익히다가 세상이 바뀌었으니 정체성 혼란, 그 자체였죠. 경길 형님은 경기도의 한 수도원에서 쓸쓸히 돌아가셨어요. 먹고살려고 아등바등했는데. 나는 그나마 노래라도 불렀으니….”

이 총재의 존재감은 역시 노래인 듯했다. 황실의 쇠잔함을 잊고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 말이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살짝 번지더니 10여 분간 거침없이 ‘노래 인생’이 흘러나왔다. 그의 연예계 생활은 경동고 3학년 때 시작됐다. 서울 종로2가 ‘뉴월드’ 음악감상실에서 DJ를 보았는데, 건너편 ‘디 쉐네(Die Shoene)’에서는 이종환이 DJ를 보고 있었다. 당장 쓸 돈이 없던 시절, 이 총재 밑으로 세 명의 동생이 있었고, 어머니 남양 홍씨는 의친왕 사후 신당동 중앙시장과 영등포시장 등에서 국수를 팔았다. DJ는 노래와 가족부양을 동시에 만족시킨 최고의 직업이었다. 뉴월드 노래자랑에 나가 베사메무초를 불러 1등을 해 상금 1만원을 받았고, 미8군 무대와 워커힐로 옮기면서 몸값도 뛰었다.

“미8군에서 일하던 최희준씨 자리에 제가 들어갔어요.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노래가 뜨자 최희준씨가 월급을 3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어요. 그 자리를 제가 맡았죠.”

DJ를 하면서 외운 팝송이 도움이 됐고, 곧 영어도 익혔다. 어느 날 영어로 사회를 보자 급여는 8000원으로 뛰었다. 은행직원의 초임이 3000원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 1960년에 한국외대 스페인어과에 입학하셨는데요.

“스페인어학과가 눈에 띄더라고요. 스페인에는 왕 제도가 있으니까 ‘얼른 외교관이 되어서 스페인으로 가 스페인 공주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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