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부터 12년 전인 1999년 봄, 나는 ‘신동아’의 인물탐방 꼭지 ‘이 사람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로 내려갔다. 당시 주지이던 도법스님은 사찰 울타리 밖의 실습지 이곳 저곳을 분주히 오가면서, 이제 막 문을 연 귀농학교의 갈피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은 어딘지 어색하고, 서툴고, 자신 없고, 서먹한 표정이 역력했다. 거기 비하면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농촌공동체의 복원을 역설하는 도법스님의 설법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우리의 삶이 지속가능한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생태순환의 사고, 공동체적인 마음가짐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농기술을 배우기 전에 세계관부터 바꾸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계종 총무원과 실상사가 공동 주최하여 귀농 희망자를 상대로 서울에서 15강좌의 이론교육을 먼저 실시하고 나서 이곳으로 내려와 실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취재를 마친 나는 그해 5월호에 도법스님과 귀농학교에 관련된 기사를 실었다. 물론 이후로도 나는 그 귀농학교가 도법스님이 구상한 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10년 남짓의 세월이 흐르다보니 실상사 귀농학교는 내 기억 속에서도 헤실바실 묽어져버렸다. 물론 가끔 언론 매체를 통해서 ‘생명·평화’를 기치로 탁발순례를 하는 도법스님의 모습이며, 혹은 오체투지의 고행을 마다않는 수경스님의 모습을 대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2008년 봄, 나는 뜬금없이 서울 수도권을 떠나 덜컥 지리산 산곡마을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지리산 자락으로의 이주를 뜬금없다 한 것은, 남해안의 섬마을 출신인 내가 인생 하반기의 하방(下放) 후보지로 바닷가가 아닌 산골마을을 그려본 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이 어찌어찌 꼬이는 바람에 주거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던 아내가 말했다.
“지리산 뱀사골 인근 민박마을에 맞춤한 집이 하나 나왔다는데 우리 거기로 이사 갈래?”
나는 별생각 없이 “그러지 뭐” 해버렸고, 우리는 곧 이삿짐을 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삿짐 트럭은 인월이라는 곳에서 언젠가 취재차 들렀던 바로 그 실상사를 지나더니 인적 없는 산허리 길을 한참이나 더 감아 돌다가 뱀사골 유원지를 조금 못미처 오른쪽 언덕배기의 산간마을에다 세간을 부려놓았다. 그 비탈배기 산골 집 마당에 쪼그려 앉아 사위를 둘러보노라니 ‘앞산은 첩첩(疊疊)’이요, ‘뒷산은 중중(重重)’한지라, 도읍지에서 용납받지 못하고 유배형을 받은 처지, 딱 그것이었다.
계획에 없던 지리산 생활

지리산 둘레길 개통 기념식.
그건 그렇고 전국에 있는 ‘산내면’들의 특징을 들자면 글자 그대로 산간 취락으로 이뤄져 있어서 인근의 다른 면들에 비해 인구가 턱없이 적다는 점이고, 또한 인구의 감소 추세도 다른 면에 비해서 가파르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그런데 남원시 산내면은 다르다. 2000년에 인구가 2160명이었는데 2년 뒤인 2002년엔 2339명이다. 179명이 증가한 것이다. 전라북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 기간에 인구가 늘어난 면은 산내면이 유일했다. 이 ‘경이로운’ 현상은 실상사에서 귀농학교를 시작한 때가 1999년 무렵이었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후 소폭의 증감을 계속하다가 2011년 현재의 인구는 2150명이다. 다른 면지역의 인구가 상당한 폭으로 감소한 데 비해 남원시 산내면은 11년 동안 겨우 10명이 줄어든 것이다.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른다. 애당초 안 하고 살기로 했다. 그래서 아내가 승용차를 몰고 나가버리면 나는 산간마을에 유폐당한 처지가 된다. 물론 뱀사골이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지척이어서 산내면 소재지나 인월로 나가는 버스가 다른 산골마을에 비해 자주 있는 편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실상사든 산내면 소재지든 인월이든 나들이하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제발 가끔 나가서 지역사회의 일꾼들과 교분도 나누고 지내라는 아내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염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