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이라면 좀 멀어 보이긴 해도 그 역시 지금부터 20년쯤 후인 2030년대에 태어날 세대의 생애기간에 포함될 만한 시간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속에는 그 세대의 다음 세대가 살게 될 시대가 거의 몽땅 포함된다. 그렇게 보면 100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은 계산상 그가 살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시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는 동물이다. 살아생전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 확실한 후속 세대를 위해 걱정하고 그 후대가 살게 될 날들의 아침과 저녁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도모한다는 점에서도 인간은 기이하고 독특한 동물이다. 이 별난 동물이 미래를 생각해본다는 일은 안 그래도 분주한 그에게는 결코 한가한 점괘놀이나 심심풀이 공상놀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의 ‘오늘’ 자체가 몹시 궁핍해지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시각의 한 모퉁이에서 50년 혹은 100년 후의 세계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미래예측’ 작업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감당할 만한 다른 학문 분야가 얼마든지 있고, 노상 틀리긴 해도 예측을 전문으로 하는 ‘미래학’ 계열 업종의 종사자도 많다. 다음 시대의 문명을 인문학적으로 상상해본다고 할 때의 ‘상상하기’는 미래 문명에 대한 예측이기보다는 어제와 오늘의 인간 문명을 ‘성찰하기’이며 그 성찰의 바탕 위에서 미래 문명의 모습을 미리 ‘점검하기’다. 아직 오지도 않은 문명을 미리 점검하는 일은 가능한가?
인문학적 관점에서 미래 문명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명의 조건’에 대한 점검, 다시 말해 어떤 문명이 문명이라 불리자면 거기 요구되는 최소 조건 혹은 기본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문명을 말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적용돼온 일정한 기준들이 있다. 그 기준들은 “힘이 센가?”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요약된다. 이 ‘힘’을 측정하는 잣대도 예외 없이 정치적 힘, 경제적 힘, 군사적 힘이라는 잣대다. 그러나 문명사의 전개 5000년을 지나오는 사이에,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문명을 보는 인간의 눈에는 상당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문명을 보는 ‘눈’의 변화는 문명에 대한 질문의 변화다. 문명에 대한 질문이 “힘이 센가?”에서 “문명을 문명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문명을 말하는 기준이 힘의 관점에서 ‘기본조건’의 관점으로, 다시 말해 “그 문명은 문명이라 불릴 만한 기본적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래 문명의 조건
세계의 현존 문명은 이 같은 질문의 변화와 관점 이동에 대해 아직 매우 둔감하다. 그러나 앞으로 50년 혹은 100년 동안에도 그럴까? 앞으로도 계속 인간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의 잣대만으로 문명을 말할까? 이것이 미래 문명을 미리 점검한다고 할 때 그 ‘점검’이 지니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다. 미래의 인간 문명, 특히 세계를 감히 ‘주도’하고자 하는 국가나 문명은 문명을 문명이게 하는 조건의 구비 여부라는 현대적 기준을 결코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