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일 치러진 태국의 총선은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이 이끄는 ‘프어타이(Peua Thai)당’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전체 500석 가운데 단독정부 수립이 가능한 263석을 싹쓸이한 것이다. 이로써 올해 44살의 미녀 정치신인 잉락은 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총리 자리(제28대)를 예약했다.
잉락은 탁신 전 총리의 막냇동생이다. 이제까지 그 어떤 공직 경험도 없던 그는 선거가 치러지기 불과 두 달 전 ‘히든카드’로 선거에 투입됐고, 단기간에 국민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조기 총선이 확정된 5월 초 프어타이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호각세였음을 감안하면 잉락의 등장은 분명 충격적 반전카드였다.
반면 지난 3년 가까이 정권을 유지했던 민주당 소속의 아피싯웨차치와(47) 전 총리는 충격적 대패 속에 당의 미래를 재설계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일단 군부와 민주당 모두 선거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정권이양은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태국의 정치혼란은 이번 선거 결과로 종언을 고한 것일까?
“선거에서 승리한 자는 통치할 수 없고, 통치하는 자는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The election winners can‘t rule and the rulers can‘t elections)”(그램 도벨 오스트레일리아 언론인).
선거가 끝난 직후 호주의 유명 언론인은 태국의 정치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2006년 9월 태국에서 19번째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만 5년 가까이 지속된 권력 공백에 대한 촌철살인의 정리인 셈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자’는 말 그대로 탁신과 ‘레드셔츠’로 대표되는 친(親)탁신계 정치세력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친탁신파는 지난 10년간 치러진 5번의 선거에서 ‘5연승’이라는 기적적 성과를 일궈냈다. 이전까지 군인과 관료 혹은 지방실력가들이 좌지우지했던 태국 정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군부쿠데타와 사법쿠데타로 인해 집권여당인 ‘타이락타이(TRT)’와 ‘국민의 힘(PPP)’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수장인 탁신 역시 탈세혐의로 재산을 압류당하고 여권까지 잃은 채 두바이에서 망명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통치하는 자’는 군부와 민주당을 지칭한다. 선거에서 5번 모두 패배했지만 군부와 왕당파(옐로셔츠)의 확고한 지지 속에 2회, 탁신이 실각한 이후 도합 3년에 걸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쿠데타 감행 이후 치러진 2007년 선거보다 더 치밀하게 권력기관을 활용해 친탁신 세력을 무력화하고, 민주당을 현대적 대중정당으로 변신시켜 정당성 확보를 시도했으나 또 한 번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민주주의의 최전선?
우리에겐 ‘관광지’일 뿐이지만, 태국, 즉 타일랜드(Thailand)는 면적 51.4만㎢(한반도 2.2배) 인구 약 7000만명, 1인당 국민소득 약 8000달러를 기록 중인 동남아의 강국이다. 특히 푸미폰 국왕을 중심으로 한 안정된 정치체제, 오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다양한 역사유적, 물건 값 싸고 활기찬 방콕 시내 그리고 천혜의 자연조건까지 갖춘 태국은 그 자체로 상당히 ‘호감’이 가는 나라다. 그런데 2007년부터 2010년까지의 정치현실은 이 같은 상식을 무참히 깨뜨렸다. 도심 한복판에서 사제폭탄이 터지고, 국제공항과 총리공관이 무장 시위대에 점거됐으며, 외신기자까지 총에 맞아 죽어나간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국가가 된 것이다. 2010년 4월에만 무려 100여 명의 시위대가 사망했고 건물 수십 채가 불에 타는 무정부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우리가 태국의 미덕을 논할 때 흔히 언급했던 “쿠데타조차 피를 부르지 않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지 못한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다”는 식의 전설 같은 미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이번 총선의 결과는 태국 사회가 드디어 21세기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티티난 퐁수티락 태국 출라롱콘 대학 교수).
우리가 태국의 정치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60여 년 가까이 반공(反共) 친미(親美)를 중심으로 이어온 태국의 왕정체제의 밝은 면만이 지나치게 미화되면서 발생한 한계”라고 지적한다. 1945년 체제가 성립된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수평적 권력 교체가 이뤄지지 않은 채 내부 갈등, 특히 빈부 갈등이 누적돼왔다는 얘기다.
동남아시아 정치를 논할 때, 흔히 태국에 대해 ‘정치학의 박물관’, 혹은 ‘전시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그만큼 정치가 복잡하다는 얘기다. 실제 태국에는 ‘사회주의’ ‘군사독재’ ‘총독제’ ‘의회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왕정’체제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