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초여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이상적인 열기로 뜨거웠다. 6월15일부터 열흘에 걸쳐 유엔 주관 아래 세계인권대회가 열렸다. 171개국 정부 대표와 800여 개 NGO 등 총 7000여 명이 참석했다. 유엔이 주관한 세계인권대회로는 사상 두 번째였다. 1968년 봄, 세계인권선언 제정 20주년 기념행사로 이란의 테헤란에서 조촐하게 열린 후 27년 만의 일이다.
이즈음 해서 유엔이 주도한 ‘세계대회’가 연이어 열렸다. 바로 전해인 1992년 브라질의 리우회의(환경 및 개발), 이듬해인 1994년 9월의 카이로회의(인구 및 발전), 그리고 이어서 1995년 3월의 코펜하겐 정상회의(사회발전)와 같은 해 9월의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등이다. 환경, 개발, 기후, 인권이 전 지구적인 관심을 집중시키며 새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인권이 핵심적인 시대 조류로 부상한 계기는 1989년 이후 가속화된 동구의 몰락과 냉전체제의 종식이었다. 사회권을 강조하던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권에 비중을 둔 서방세계의 인권관념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고, 인권의 범주와 관념에 대한 대략의 합의도 이루기 힘들었다. 이제 정치제도로서 사회주의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됐고, 실현할 수 있는 인권의 내용에 대한 보편적 합의가 용이해졌다. 모든 인권은 불가분, 상호의존적이라는 결론이었다. 대회의 산물은 민주주의, 경제발전과 인권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공통의 이해였다.
빈 대회에서는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대 달라이 라마가 연설했다. 대회 결과, 만장일치로 빈 선언(Declara- tion)과 인권증진을 위한 행동계획(Action Plan)이 채택됐다. 그해 12월 유엔 총회는 결의로 빈 대회의 결과물을 채택해 유엔의 정식규범으로 만들었다. 고등인권판무관실(OHCHR)을 설치하고, 회원국에 국가인권기구(NHRI)의 설립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덧붙여서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있어 준수해야 할 원칙(이른바 파리원칙)을 정립했다. 파리원칙의 핵심적인 내용은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을 보장할 것, 인적 구성의 다원화를 꾀할 것, 그리고 포괄적인 관할권을 부여할 것 등이다.
유엔과 빈 체제의 탄생
30여 명의 한국인이 빈 대회에 참가했다. 현장 활동가가 주축이 되었고 몇몇 법률가가 끼어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국제적인 안목과 경험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지구상에 동티모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 자리에서 처음 알았다. 이렇듯 한국의 인권활동가들은 국제사회의 상황과 흐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1987년 이전까지 국내 정치의 민주화가 절체절명의 과제였기에 국제사회에 눈을 돌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들은 ‘국가인권기구(NHRI)’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실로 엄청난 개안(開眼)이었다.
빈에서 돌아온 이들 이상주의자들은 제각기 가슴에 담은 인권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안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을 위한 공론화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대체로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고 후보의 100대 선거공약 속에 국가인권기구 설립 의제를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다. 상대 후보보다 국제사회 흐름을 잘 알고 있던 야당 후보가 의제를 선점한 셈이다. 뒤늦게 이회창 후보 측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설립 문제를 검토할 것을 건의한 참모가 있었다고 들었지만 공론화되지는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세력의 상식과 분위기를 생각하면 정식 의제로 채택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인권위의 설립은 기존의 사법제도만으로는 인권의 옹호에 미흡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정통 법조인들이 주축이 된 이 후보 측에서 그런 발상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도 인권위는 탄생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감안하면 유엔이 주도하는 세계적인 추세를 수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엔의 수장을 배출한 나라가 아닌가? 1993년 유엔 총회가 설립권고안을 채택할 당시에 불과 5~6개 회원국이 이런 유형의 국가인권기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2010년에는 120개국으로 확대된 사실을 감안하면 인권위의 설립은 정권의 성격과 무관한 시간문제였다. 물론 한나라당의 집권 아래 설립됐을 인권위의 위상과 내실이 현재의 모습과는 달라졌을지는 모를 일이다.
비록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지만 인권위의 탄생 과정은 지극히 힘들었다. 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숱한 난항을 겪었다. 법무부의 강력한 반대는 충분히 예상된 것이었다. 법무부에 ‘맞서는’ 기관이 아니라, 법무부가 ‘통제하는’ 기관으로 두기를 원했다. 독립성을 보장하려면 국가기관으로 할 게 아니라 민간기구로 해야 한다는 논리도 동원됐다. 대통령 임기 후반에 들어서도 정부안이 난항을 거듭하며 지지부진하자 마침내 의원입법의 길을 택했다. 지극히 근소한 차이의 표결로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2001년 11월의 일이다. 아쉬움이 남지만 독립성 등의 면에서 비교적 파리원칙에 부합하는 법이었다. 이렇듯 출범 당시부터 인권위는 정치적 논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기존의 사법·행정기관에는 느닷없는, 기이한 성격의 존재로 비치기도 했다. 인권위의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알려 하지 않고 ‘좌파정부의 전위대’로 간주해 공격하는 정치적 정서도 이때부터 잉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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