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계약직 조사관의 고용계약 해지에 항의해 1인 시위를 한 직원 11명을 징계했다. 이에 반발한 직원들이 인권위에 진정서를 내고 법적 대응을 시작하면서 내홍이 깊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인권위 위원장을 지낸 안경환 서울대 법학과 교수가 최근 인권위 사태를 보며, 인권위의 설립 과정과 바람직한 인권위 운영을 위한 제언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이즈음 해서 유엔이 주도한 ‘세계대회’가 연이어 열렸다. 바로 전해인 1992년 브라질의 리우회의(환경 및 개발), 이듬해인 1994년 9월의 카이로회의(인구 및 발전), 그리고 이어서 1995년 3월의 코펜하겐 정상회의(사회발전)와 같은 해 9월의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등이다. 환경, 개발, 기후, 인권이 전 지구적인 관심을 집중시키며 새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인권이 핵심적인 시대 조류로 부상한 계기는 1989년 이후 가속화된 동구의 몰락과 냉전체제의 종식이었다. 사회권을 강조하던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권에 비중을 둔 서방세계의 인권관념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고, 인권의 범주와 관념에 대한 대략의 합의도 이루기 힘들었다. 이제 정치제도로서 사회주의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됐고, 실현할 수 있는 인권의 내용에 대한 보편적 합의가 용이해졌다. 모든 인권은 불가분, 상호의존적이라는 결론이었다. 대회의 산물은 민주주의, 경제발전과 인권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공통의 이해였다.
빈 대회에서는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대 달라이 라마가 연설했다. 대회 결과, 만장일치로 빈 선언(Declara- tion)과 인권증진을 위한 행동계획(Action Plan)이 채택됐다. 그해 12월 유엔 총회는 결의로 빈 대회의 결과물을 채택해 유엔의 정식규범으로 만들었다. 고등인권판무관실(OHCHR)을 설치하고, 회원국에 국가인권기구(NHRI)의 설립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덧붙여서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있어 준수해야 할 원칙(이른바 파리원칙)을 정립했다. 파리원칙의 핵심적인 내용은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을 보장할 것, 인적 구성의 다원화를 꾀할 것, 그리고 포괄적인 관할권을 부여할 것 등이다.
유엔과 빈 체제의 탄생
30여 명의 한국인이 빈 대회에 참가했다. 현장 활동가가 주축이 되었고 몇몇 법률가가 끼어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국제적인 안목과 경험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지구상에 동티모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 자리에서 처음 알았다. 이렇듯 한국의 인권활동가들은 국제사회의 상황과 흐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1987년 이전까지 국내 정치의 민주화가 절체절명의 과제였기에 국제사회에 눈을 돌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들은 ‘국가인권기구(NHRI)’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실로 엄청난 개안(開眼)이었다.
빈에서 돌아온 이들 이상주의자들은 제각기 가슴에 담은 인권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안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을 위한 공론화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대체로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고 후보의 100대 선거공약 속에 국가인권기구 설립 의제를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다. 상대 후보보다 국제사회 흐름을 잘 알고 있던 야당 후보가 의제를 선점한 셈이다. 뒤늦게 이회창 후보 측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설립 문제를 검토할 것을 건의한 참모가 있었다고 들었지만 공론화되지는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세력의 상식과 분위기를 생각하면 정식 의제로 채택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인권위의 설립은 기존의 사법제도만으로는 인권의 옹호에 미흡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정통 법조인들이 주축이 된 이 후보 측에서 그런 발상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도 인권위는 탄생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감안하면 유엔이 주도하는 세계적인 추세를 수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엔의 수장을 배출한 나라가 아닌가? 1993년 유엔 총회가 설립권고안을 채택할 당시에 불과 5~6개 회원국이 이런 유형의 국가인권기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2010년에는 120개국으로 확대된 사실을 감안하면 인권위의 설립은 정권의 성격과 무관한 시간문제였다. 물론 한나라당의 집권 아래 설립됐을 인권위의 위상과 내실이 현재의 모습과는 달라졌을지는 모를 일이다.
비록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지만 인권위의 탄생 과정은 지극히 힘들었다. 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숱한 난항을 겪었다. 법무부의 강력한 반대는 충분히 예상된 것이었다. 법무부에 ‘맞서는’ 기관이 아니라, 법무부가 ‘통제하는’ 기관으로 두기를 원했다. 독립성을 보장하려면 국가기관으로 할 게 아니라 민간기구로 해야 한다는 논리도 동원됐다. 대통령 임기 후반에 들어서도 정부안이 난항을 거듭하며 지지부진하자 마침내 의원입법의 길을 택했다. 지극히 근소한 차이의 표결로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2001년 11월의 일이다. 아쉬움이 남지만 독립성 등의 면에서 비교적 파리원칙에 부합하는 법이었다. 이렇듯 출범 당시부터 인권위는 정치적 논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기존의 사법·행정기관에는 느닷없는, 기이한 성격의 존재로 비치기도 했다. 인권위의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알려 하지 않고 ‘좌파정부의 전위대’로 간주해 공격하는 정치적 정서도 이때부터 잉태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인권위
2008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왼쪽)을 만나 국제 인권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안경환 당시 인권위 위원장.
게다가 나는 인권위의 설립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지도 않았다. 엄동설한에 명동성당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하는 활동가들의 소식을 듣고도 한 번도 현장에 들르지 않았다. 마음은 주되 몸은 인색한 편이었다. 강의, 연구, 보직, 학내 일만 해도 힘에 부쳤다. 아무리 세상에 대한 책임, 실천하는 지성을 내세워도 내게는 학교가 가장 소중했다. 그래서 교수로서 본연의 역할을 고집하는 편으로, 의도적으로 현장과 거리를 두려고 애쓰기도 했다.
나의 취임에 시민단체의 반응은 비판적이었다. 인권단체연석회의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은‘심히 우려되는 바’라고 했다. 내가 ‘자리’를 찾아다니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인데다, 한국의 인권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며, 인권 감수성이 모자란다는 것이 이유였다. 원래 시민단체의 평가는 균형감을 잃기가 일쑤다. 이상주의자, 원칙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겨서 받아들여야 한다.
일부 신문은 내가 거의 모든 일간지에 칼럼을 썼고, 이슈에 따라 진보와 보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확실한 ‘관(觀)’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런가하면 같은 사실을 유연하다, 합리적이다, 균형 감각이 있다, 친화력이 있다 등의 표현으로 평가하며 ‘기대를 거는’ 언론도 있었다. 나 자신은 전연 개의치 않았지만 그 정도면 크게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권위에 아주 문외한은 아니었다. 인권위가 설립된 직후 초대 위원장인 김창국 변호사의 요청에 의해 인사위원으로 직원의 채용에 관여했다. 아시아·태평양국가인권기구포럼(APF)의 자문법률가(AJ)에 위촉돼 국제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다만 인권위의 의욕적인 행보는 사안에 따라서 좀 과도하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권위는 당시 나의 인권의식 수준보다 상당히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언로가 막혀 있던 각종 사회적 약자들의 호소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신생 국가기관으로서 강한 존재감을 심겠다는 직원들의 넘치는 의욕과 사명감이 때때로 대중적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기도 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나를 인권위원장에 임명하면서 임명권자가 사전에 주문한 사항은 없었다. 임명장을 받고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 의례적인 격려의 말 몇 마디를 던진 뒤 대통령은 재빨리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인권위에 대해 일정한 정치적인 통제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최소한에 그치겠다, 그런 취지였다. 나도 말을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약간 흠칫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그러라고 했다.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하려는 듯 비쳤다. 첫째, 나는 정치적인 입장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인권위의 업무를 수행하겠노라고 했다. 둘째, 국제적인 업무에 주력해 나라의 위상을 올리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은 국제적인 업무는 좋은 착상이라고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인권위와 정부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다. 인권위의 ‘거침없는’ 행보에 노 대통령이 격노한 적도 있다. 아무 구속력이 없는 의견일 뿐이지만 인권위의 쓴 소리는 정부로서도 성가시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관계 부처의 누적된 불평이 보고돼 대통령이 그렇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후일 그 시절에 국무총리를 지낸 분에게서 들었다. 내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정치적 통제’ 운운했던 배경에도 이러한 선입관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내심으론 불만이 많았어도 공적인 자리에서 대통령은 언제나 인권위는 ‘쓴 소리’를 하라고 만든 기관임을 인정했고, 심지어는 정부와 같은 의견을 내는 인권위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까지 했다. 인권위의 특성을 십분 이해하거나 최소한 양해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통령이었기에 상임위원을 대동한 업무보고 자리에도 특별한 긴장은 없었다. 나 스스로 청와대와 거리를 두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청와대에서도 인권위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면서, 내심 일차적 과제로 삼았던 조직 내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모든 위원과 직원을 끌어안자.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자.’ 수시로 다짐했던 내심의 업무수칙 제 1호였다.
이명박 정부의 인권위
정권이 바뀌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인권위의 업무에는 변화가 없어야 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인권은 ‘좌’도 ‘우’도 아니고 ‘진보’도 ‘보수’도 아닌 보편적인 가치”라고 주장해온 나이기에 더욱더 새 정부를 설득해야 할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나의 명제를 원론적으로는 수긍하면서도 미지근한 자세에 내심 불만을 가졌던 직원들도 새 정부와 사이가 ‘크게 나쁠 리 없는’ 위원장에게 기대를 꽤 거는 눈치였다. 그러나 내 역량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2008년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정부조직의 윤곽을 발표했다. ‘과도한 위상’의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당초에는 ‘고충처리위원회’ ‘부패방지위윈회’ ‘행정심판위원회’ 등과 통합해 하나의 위원회로 만드는 안이 있었다고 한다.
밀실작업이라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인권위가 독립기관이라는 주장은 누구도 이해하지 않았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인권고등판무관의 서신이 인수위 위원장 앞으로 도착했다. 밀사 자격으로 판무관실 고위직이 날아와서 인수위 담당 간사를 은밀하게 만났다.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으로 변경하는 것은 독립성에 대한 침해로 국제사회에 비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야당도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여성부와 통일부를 폐지하려던 당초의 안도 수정됐다. 결국 일종의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고 인권위는 원상대로 존속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문제의 3개 위원회는 국민권익위원회로 통합해 국무총리 직속으로 두도록 했다. 일단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취임 후에도 새 대통령은 인권위의 업무보고를 받지 않았다. 인권위는 독립기관이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 국회의장은 관례대로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청와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차례 공식, 비공식 요청을 보냈지만 회신이 없었다. 초기에는 미뤘고, 나중에는 아예 묵살했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인권위에 대해 잘 모르면서 왜곡된 보고를 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대통령을 직접 대면해 진상을 알리면 편견을 불식하고 전향적인 설득을 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까지 기대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1년5개월, 끝내 나는 대통령을 대면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의 후임자는 정상적인 업무보고를 했다고 들었다.
국제적인 치욕
2009년 3월30일, 인권위의 업무와 인원을 축소하는 대통령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방만한 운영’을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었다. 2008년 가을, ‘촛불집회’에 대한 인권위 결정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을. 40여 명이 졸지에 직장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직업 공무원 출신이 아닌 별정직, 계약직 등 ‘외인부대’가 주된 피해자가 됐다. 모든 국가기관과 공무원은 그동안 불편한 존재였던 인권위의 무력화에 반색했다.
2009년 이래 대한민국은 국제인권사회에서 치욕을 겪고 있다. 유엔은 물론 명망 있는 국제인권단체들이 앞 다퉈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했고, 여러 차례 공개서한과 메시지를 보냈다. 집회, 시위의 자유의 과도한 제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사생활의 침해 등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인권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유엔의 특별보고관이 방문하는 국제적인 수치도 겪었다. 한국에 대한 유별난 관심은 경제후진국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되면서도 민주화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중되기도 했다.
특히 2009년 3월부터는 인권위 기구 축소가 국제사회의 중요 의제로 떠올랐다. 대한민국 인권위는 120개 유엔 회원국의 국가인권기구로 구성된 국제조정위원회(ICC)의 부회장국이자 2010년 3월에 회장국을 수임하는 것으로 국제 간에 사실상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기에, 이 사태에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사회의 동향을 성의 있게 보도하는 언론은 드물었다. 나는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가운데 이러한 조치가 인권위 독립성을 침해하는 행위임을 주장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1년7개월이 경과한 2010년 10월에야 비로소 6대 3의 결정으로 인권위는 헌법에 규정된 국가기관이 아니기에 심판을 제기할 당사자 자격이 없다며 각하결정을 내렸다. 어쩐지 당당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당사자만의 반응일까? 언론 보도는 없었다. 국내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인권위 강제 축소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강행할 만한 단기적 이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불행한 일이다. 국제사회에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오랜 세월에 걸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직원 징계의 비극
지난 2년 동안 인권위에 애정을 가졌던 많은 사람이 떠나거나 절연했다. 일부 직원은 사실상 쫓겨났다. 그중 많은 사람이 현임 위원장을 특정해 비판했다. 또다시 10여 명의 직원에게 징계처분을 내렸다. 한 계약직 공무원의 해고(내지는 계약 해지)를 계기로 벌어진 일련의 항의 행위가 시발점이었다. 국가공무원법의 ‘집단행위금지’ 규정을 위반하고 ‘품위유지’ 의무를 어겼다는 이유다. 진정서를 제출하고,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리고, 언론에 기고하고, 한 사람씩 번갈아 피켓을 들었다. 위원장의 입장에서는 이들도 자진해서 떠나기를 바라거나, 쫓아내고라도 싶은 문제아들일지 모른다. 징계에 불복한 이들은 법적 소송을 준비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기관의 총체적 비극이다. 기관장의 입장에서는 몹시도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반드시 옳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공식 출범 당시 김창국 초대 위원장(오른쪽 두 번째) 등 위원들이 현판식을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직원들 사이의 불신과 반목의 골이 깊어질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10년 전, 신생 기관으로 출범하면서 인권위에는 다양한 배경의 일꾼들이 모여들었다. 상당한 경력을 가진 직업공무원에다 연구소·시민단체 출신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인권’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통해 화합의 장을 만들어왔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장기인 사람과 문제를 푸는 데 훈련된 인력이 서서히 조화를 이루었다. 사람의 일이라 목전의 이해관계에 따라 작은 반목과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큰 무리 없이 연착륙했다. 역대 장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이제 이 사건을 계기로 힘들여 이루었던 화합의 무드가 깨어질까 심히 걱정된다. 전직자인 내가 분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깥에서 온 이른바 정무직은 잠시 관리하다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남은 직원들은 평생의 동료다. 이들은 나라와 인권위의 일상을 끌고 나갈 인적자원, 유엔 용어로 ‘인권옹호자’들이다. 이번 징계가 전력을 기준으로 일부 직원을 탄압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인권위의 장래가 밝을 수 없다. 징계란 잘못을 바로잡는 행위다. 다른 의견을 참지 못해 내리는 징계는 상급자가 하급자를 다스리는 가장 비열한 짓이다.
인권위의 업무와 성격
인권위는 많은 일을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시민의 진정을 받아 조사하고, 그 결과 인권의 침해나 차별이 있었다고 판단되면 해당 기관에 시정할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진정할 자격이 있다. 진정이 없어도 직권 조사를 통해 인권현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정부에 대해 정책을 권고할 수도 있다. 법원에 대고 의견을 낼 수도 있다. 인권 연구와 교육의 책임도 있다. 일반 대중에게 덜 알려진 업무는 국제인권규범의 국내정착을 감시하고 촉진할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유엔 체제의 틀 속에 있기에 준(準)국제기구적인 성격을 띤다. 때때로 국내의 보편적인 관념에 어울리지 않는 인권위의 입장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민단체와의 협력은 유엔 체제의 기본 전제조건이다. 이렇듯 광범위한 업무를 담당하는 인권위이기에 담당자의 자격과 능력이 중요하다.
정권 교체에 따라 정책과 정무직의 성향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러나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승계돼야 할 이념과 가치가 엄연히 존재한다. 인권이란 그런 것이다. 전문적인 식견과 경험은 모든 공직에 요구되는 자격요건이다. 그런데 인권의 경우는 누가 전문가인지에 대한 합의된 기준이 없다. 법률가, 종교인, 현장 활동가, 학자 등 후보 직업군도 다양한데다 인권의 주제와 범주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그러기에 공론을 거치면서 전문성과 자질을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인권위원장과 위원 후보자에 대한 공개적인 검증절차가 없는 것은 크나큰 제도적 취약점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이 문제가 지속적으로 지적되었다. 현 위원장이 그런 공개 절차를 거쳐 취임했더라면 원천적 자격 시비를 잠재울 수 있고, 시민사회에서의 입지가 이다지도 취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하의 대량징계라는 무리수를 강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권위원 중에 법률가가 지나치게 많은 것도 장점보다 단점이 크다. 인권은 ‘법’만의 문제가 아니다. 법률가들의 인권관은 법원의 판결에 묶여 있기 십상이다. 법은 세상의 변화에 가장 늦게 반응하는 제도적 규범인 반면, 가장 앞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인권이기 때문이다.
인권위도 국가기관이다. 따라서 정권의 이념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주제별로 걸음걸이를 조절할 수 있다. 막말로 200일 넘게 고공의 크레인 위에서 아래를 향해 절규하는 김진숙의 애소에 침묵할 수도 있다. 그것이 진지한 고민의 결과 내린 결정이라면.
독립기관의 존립 근거는 구성원의 자부심과 사명감이다. 정부 내에서 독립의 대가는 고립이다. 그 외로운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것이 인권위의 생명수다. 독립기관으로서의 인권위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려면 세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독립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정부의 이해와 포용이다. 둘째, 독립성에 대한 인권위 구성원 스스로의 자부심과 사명감이다. 셋째, 국민이 인권위를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세 가지 조건, 그 어느 것도 취약하기 짝이 없다. 어떤 성격의 인권위를 가질 것인가? 대통령의 참모 내지는 시동으로 만족할 것인가, 그렇다면 인권위는 아예 문을 닫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국가기관은 이미 부지기수, 지천으로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