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눌타리 덩굴과 열매인 과루실.
나무꾼이 그 소리를 따라가보니 커다란 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동굴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달게 목을 축인 나무꾼은 나무 그늘 아래 누웠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결에 웬 사람 소리가 났다. 비몽사몽 중에 맞은편 나무 그늘에서 바둑을 두는 두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꾼은 혹시 저들이 신선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한 노인이 “우리 동굴에 올해 황금박이 두 개나 열렸네” 하고 말하자 다른 노인이 “쉿!” 하며 “건너편에 나무꾼이 자고 있는데 다 듣겠네” 하며 주의를 줬다.
“듣는다고 해도 뭘 걱정하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텐데.”
“그렇지. 칠석날 정오에 동굴 앞에 서서 ‘하늘 문 열려라, 땅 문 열려라, 황금박의 주인이 들어간다’ 하고 주문을 외워야 동굴 문이 열리지”.
나무꾼은 그 이야기를 듣다 잠을 깼다.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방금 봤던 노인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꿈치곤 너무도 생생해 나무꾼은 꿈속에서 들은 대로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칠석날이 되었다. 나무꾼은 산으로 올라가 동굴 앞에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며 돌문이 열렸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번쩍이는 물체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하늘로 뻗은 나무덩굴에 금빛 찬란한 박 두 개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흥분한 나무꾼은 진귀한 보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따들고는 한달음에 산을 내려왔다. 집에 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든 것은 보물은커녕 식용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열매였다. 나무꾼은 크게 실망해 이를 마당에 내던져버렸다.
며칠 뒤 나무꾼은 다시 그 동굴 가까이 나무를 하러 갔다. 그러다 누워서 쉬고 있는데 또 그 노인들이 나타났다. 다시 노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는데, 그들이 황금박을 도둑맞은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노인들은 황금박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만 용도를 알면 황금보다 더 귀한 약재라고 했다. 그 열매를 달여 먹으면 낫기 어려운 폐의 병을 고치고 열을 내리는 좋은 약이라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내던져버린 황금박을 찾아 정성스럽게 그 씨를 땅에 심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에 주렁주렁 황금박이 열렸다. 마침 그해 기침과 가래가 끓고 숨결이 가빠지는 환자와 폐병 환자가 많았다. 나무꾼은 황금박의 열매를 달여 환자들에게 주었는데 모두 병이 나았다. 주변에 이 신기한 약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이 약재의 덩굴이 나무나 울타리를 타고 기어올라가 높은 누각(樓) 같은 곳에서 참외(瓜) 같은 열매를 연다 하여 ‘과루(瓜蔞)’라고 부르게 됐다. 과루는 ‘신농본초’는 ‘괄루(?樓)’라 쓰고 있고, ‘과라(果?)’라고도 하는데 이외에도 이명(異名)이 많다.
열매는 과루실
시골 마을 돌담장을 담쟁이덩굴처럼 무성하게 덮고서 소박한 흰 꽃을 피워내는 과루는 우리 이름으로 ‘하눌타리’라 한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산야나 인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이다. 덩굴손이 있어 호박이나 오이처럼 큰 나무나 담장 울타리 등에 잘 달라붙어 높은 꼭대기까지 뻗어 올라간다. 이로 인해 ‘하늘타리’ 또는 ‘하눌타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과루를 ‘천원자(天圓子)’라고도 해 이를 번역한 것이 하눌타리가 됐다는 말도 있다.
박과(호로과)의 식물로 꽃도 박꽃처럼 밤에 피어서 아침까진 실타래를 푼 듯 여러 갈래로 갈라진 꽃을 피우다가 낮이 되면 조막손같이 오므라든다. 7~8월에 수꽃과 암꽃이 같은 줄기마디에 달린다. 암꽃은 꽃만 있는 수꽃과 달리 둥근 씨방이 달려 있는데, 수꽃의 화분을 받아들이면 꽃이 떨어지고 씨방이 커지기 시작한다.
장마가 끝나고 오곡이 익는 가을이 오면 하눌타리는 시든 잎들 사이로 황금색의 빛깔 좋은 열매들을 내보인다. 이 열매를 ‘과루실(瓜蔞實)’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옛이야기 속의 나무꾼이 그랬듯이 과루실을 거들떠보는 이는 거의 없다. 생긴 건 그럴듯하지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눌타리는 담을 치료하는 약재로 많이 쓰인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하나 있다. ‘이름만 좋은 하눌타리’다. 겉모양새나 이름은 그럴듯한데 실속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하눌타리를 이렇게 개살구 취급하는 것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다. 열매와 뿌리, 잎까지 현대의학으로도 안되는 난치병을 치료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약재다.
‘언제 쓰자는 하눌타리냐’라는 속담도 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무식해서 쓰지를 못하는 답답한 인간을 비꼬는 말로도 쓴다.
한의학에 ‘십중구담(十中九痰)’이라는 말이 있다. 10가지 병 중 9가지가 담병(痰病)이라는 뜻이다. 흔히들 신체의 어느 부위에 심한 근육통이 왔을 때 담이 결린다고 하거나 눈 아랫부분이 거무스레해지는 증세인 ‘다크 서클(dark circles)’이 있으면 담이 많다고 한다. 탁한 가래가 많은 침을 뱉을 때도 담이 성하다는 말을 쓴다. 이 정도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담의 용례다.
심장 부위가 아프면서 등짝이 쩍 벌어질 듯한 증상이나 명치끝이 답답해지고 툭하면 체하거나 속이 메스껍고 토하고 위와 장이 굳어져 온몸이 아픈 것, 머리가 어지러워 갑자기 혼절하는 증상도 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담이란 단어가 붙은 한의학적 질병 명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담이란 말은 서양의학에는 없는 개념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눌타리는 이 담을 치료하는 약재의 하나다. 그런데 과거에도 이 하눌타리가 어떤 병에 쓰이는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듯하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에 실린 이야기다. 담병에 걸려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고생하던 어떤 이가 이 하눌타리를 따다 그냥 벽에 걸어두고만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에 놀러 왔던 사람이 보고 말했다. “당신은 담을 앓으면서 왜 저 하눌타리를 안 쓰고 걸어놓기만 하고 있는 거요?” 그제서야 병자가 화들짝 놀라며 “아니, 저게 담을 치료하는 데 좋다는 거요?” 하고 반문했다. 여기서 ‘언제 쓰자는 하눌타리냐?’ ‘어디에 쓰자는 하눌타리냐?’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기침이나 해수에 좀 쓸 요량으로 걸어두었지만 담으로 인해 생긴 흉비와 결흉 같은 어려운 병증을 고치는 약인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명의별록’이나 ‘동의보감’ 등 옛 의서에 나오는 하눌타리의 효능은 다음과 같다. 흉비(胸痺)를 낫게 한다. 심과 폐를 윤택하게 하고 손발의 거친 주름을 없앤다. 피를 토하는 증상과 사혈장풍(항문으로 피를 쏟는 것으로 오래된 치질 등에서 많이 보이는 증상), 숨이 차고 담이 있는 기침(痰喘)과 결흉(結胸)을 낫게 한다 등이다.
담으로 인한 흉비에 큰 효과
흉비는 담음이나 어혈 등으로 인해 가슴이 그득하면서 얼굴이 붓거나 숨이 차고 아파서 반듯이 눕지 못하는 병이다. 가슴이 막히고 흉부의 통증이 심해져 등까지 통증이 뻗치는 증상을 동반한다. 이를 심통철배(心痛徹背)라고 한다. ‘금궤요락’의 과루실을 이용한 처방을 보면 천식 기침 가래 호흡촉박 등 증상과 함께 대부분 심통철배를 기술하고 있는데, 임상에서도 대부분 격렬한 통증 때문에 호흡할 때 가슴과 등이 빠개질 듯하므로 숨조차 쉬기 어렵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이 흉비를 현대의학의 협심증이나 관상동맥성 심질환 또는 이와 유사한 병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필자도 이런 증상을 치료해본 일이 꽤 있는데 이때 과루실이 꼭 쓰인다. 물론 과루실 한 가지만 쓰는 것은 아니다. 증상에 따라 반하나 혜백, 황련, 지실 등의 약재가 배합되는데 과루실이 주된 역할을 한다. 이 과루실이 들어간 처방들은 그 효과가 너무 드라마틱해 하루 이틀 만에 병이 호전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약은 효과가 더디다는 속설과 달리 그 신속한 치료효과에 환자도 놀라고 의사도 놀란다.
결흉은 명치끝이 그득하니 아프고 가슴이 이유 없이 두근거리며 속이 쓰리고 신물이 오르기도 하며 상열감이 있는 증상이다. 예의 심통철배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에 따라선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하고, 계단을 오르거나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어지럽기도 하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끊이질 않고 식생활이 불규칙한데다 외식이 잦은 현대인에게 흔한 증상이다. 양의학은 속 쓰리고 신물이 자주 오르는 증상을 보고 역류성식도염 등으로 진단해 제산제와 진통소염제, 소화제 등을 쓰지만 증상이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도 과루실이 위력을 발휘한다. 담음(痰飮)이 변해 생긴 병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환자 중 역류성식도염 진단을 받고 오랫동안 양약을 먹었지만 호전과 재발을 되풀이하다 과루실과 황련, 반하가 든 처방으로 치료된 예가 적지 않다. 어떤 환자는 본태성 고혈압으로 수십 년 동안 양약을 복용하다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올라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웠다. 늑골 부위가심하게 딴딴하게 굳어 있고 살짝 눌러도 통증이 심했다. 과루실이 들어간 위의 처방으로 그런 증상이 없어지고 몸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소갈병의 성약 과루근
약리적으로 보면 과루실의 주성분은 트리테르페노이드 사포닌이다. 이 성분은 폐암과 후두암, 복수암(腹水癌), 육종 등의 암을 억제하는 항암효과가 인정된다. 씨앗인 과루인에도 있지만 열매의 껍질에 이 성분이 더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도 씨앗만 쓰는 것보다 열매 전체를 쓰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것도 잘 익은 숙과가 효과가 크다. 중국의 근대 명의 장산뢰도 ‘본초정의’에서 ‘흉비를 치료하고 소종산결(염증을 가라앉게 하고 맺힌 덩어리를 푼다는 뜻의 종양 치료법)하는 데는 껍질과 씨가 다 있는 전(全)과루를 써야 한다. 그런데 덜 익은 것을 채취해 말려놓은 것은 보기에는 좋으나 약력이 약해 효과가 없으니 차라리 안 쓰는 것이 낫다’고 하고 있다.
하눌타리 열매, 과루실만 약이 되는 게 아니다. 곡괭이질을 해 과루의 뿌리를 캐보면 무나 고구마처럼 생긴 길쭉한 덩이뿌리가 나오는데 이를 ‘과루근’이라 한다. ‘천화분(天花粉)’이라고도 부른다.
이 과루근은 한방에선 ‘소갈(消渴)의 성약(聖藥)’이라 부를 정도로 그 대접이 극진한 약이다. 소갈은 물을 많이 마시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데도 몸은 여위고 소변량은 많아지는 증상이다. 현대적으로는 당뇨병이나 요붕증에 해당된다. 그러나 과루근엔 인슐린처럼 곧바로 혈당을 내리는 효과는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갈을 치료한다는 걸까.
하기야 현대의학의 인슐린도 혈당을 조절할 뿐 당뇨를 치료하는 것은 아니다. 약물치료는 진즉에 포기했다. 안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현대의학이 손든 것이 어디 당뇨뿐인가. 고혈압, 관절염, 비염, 아토피 등등 흔하디흔한 질환들조차 치료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 초저녁에 포기한 질환들이다.
과루근은 치료 기전이 전혀 다르다. 체내의 열로 인해 진액이 소모되어 입이 마르는 증상에 열을 내리고 진액을 보충해 갈증을 푼다. 당뇨로 인해 생기는 소갈증도 열로 인해 진액이 소모되어 나타나므로 이를 치료한다는 것이다. 소갈의 성약이라는 말을 견강부회해 당뇨병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어쨌든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는 ‘다음(多飮)’을 증상으로 하는 당뇨에 효과가 있다.
동의보감에는 “소갈로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그득한 것과 장위에 오래된 열로 몸과 얼굴이 누렇고 입이 마르는 것을 치료한다”고 했다. 또 “고름과 종독을 삭히며 유옹(유선염과 유방의 종양)과 치루를 고친다. 월경을 잘 통하게 하고 타박으로 인한 어혈을 푼다”고 하고 있다.
과루근은 각종 화농성 질환, 유선염, 황달에 좋다. 그리고 임신 때 태반의 융모가 지나치게 증식해 마치 포도송이처럼 자궁 안에 가득 차는 포상기태나 자궁암 등에도 응용하면 효과가 있다. 육종과 복수암 세포를 억제한다. 월경불순을 바로잡고 자궁의 건강을 돕는 효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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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이나 제주 등 남쪽지역에선 하눌타리의 등속식물인 노랑하눌타리가 많이 자란다. 열매가 약간 타원형인 것이 하눌타리와 다르다. 약으로 쓰는 데는 큰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