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보다 나이가 네 살 어린 리하르트 바그너는 활동 기간은 36년 더 길었다. 이 두 사람은 19세기 독일 음악을 이야기할 때 어느 한쪽을 빼버리면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대척점을 이루는 작곡자들이다. 그런데 유대인 멘델스존과 유대인을 페스트에 비유한 바그너,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이 만든 음악 두 곡이 우리나라의 결혼식에서 늘 함께 연주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세상은 바뀐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할 수밖에.
(왼쪽)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 (오른쪽) 리하르트 바그너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1809~1847)보다 나이가 네 살 어린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활동 기간은 36년 더 길었다. 이 두 사람은 19세기 독일 음악을 이야기할 때 어느 한쪽을 빼버리면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대척점을 이루는 작곡자들이다. 그런데 유대인 멘델스존과 유대인을 페스트에 비유한 바그너,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의 곡이 우리나라의 결혼식에서 늘 함께 연주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은 바뀐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유대인 엄친아’ 멘델스존
사람들은 함부르크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스존을 두고 펠릭스(Felix, 행운아란 뜻)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평생을 호사스럽게 산 음악가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1729~1786)으로 당시 칸트, 헤르더에 버금갈 정도의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지적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범상치 않은 두각을 나타낸 ‘엄친아’였다. 그렇지만 그는 유럽인, 기독교인의 무의식 속 공공의 적인 유대인이었다.
이 때문에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차별받지 않는 미래를 살아가도록 기독교인으로 만들었으며, 멘델스존은 자신이 유대인이란 사실보다 독일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독일 음악가였다. 예컨대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슈베르트의 여러 작품 등 많은 곡을 재발견해 그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인맥을 활용해 독일 음악가들이 유럽에서 인지도를 높일 수 있도록 물심양면 후원한 사람이었다. 또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하고 슈만과 같은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해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음으로써 라이프치히를 실질적으로 명망 있는 음악도시로 만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다섯 명의 독일인 아이를 낳은 아버지였다.
멘델스존이 26세에 허약한 몸을 이끌고 라이프치히에 와서 죽는 날까지 12년 동안 이 도시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을 때,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고 자란 바그너는 전 유럽을 방황하며 굴곡진 잡초 같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의 지휘자로 부임할 무렵 바그너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6살 연상의 여배우 민나 플라너와 결혼한 후 쾨니히스베르크에 정착했다. 그렇지만 정착생활은 잠시였고 얼마 후 빚쟁이들에게 쫓겨 야반도주하는 신세가 돼 오랫동안 라트비아, 파리, 드레스덴 등 전 유럽을 기약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멘델스존과 바그너를 정반대의 존재로 만든 사람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바그너는 가장 독일적인 게르만 신화를 이상으로 삼아 게르만 민족에게 보편적 긍지를 심어줄 오페라 음악 작곡과 이론 정립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바그너의 모습과 사상을 후대의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발견하고 심취하면서 이미 죽은 이 두 작곡가의, 물과 기름으로 갈라지는 새로운 운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독일인의 우수성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예로 우상화한 반면 유대인인 멘델스존의 음악은 짓밟고 격하했다. 박물관에 있던 멘델스존의 모든 유품과 악보를 불태웠으며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그를 기념해 게반트하우스 근처에 세운 동상도 철거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히틀러는 ‘카르미나 부라나’의 작곡가 카를 오르프(1895~1980)에게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대신할 새로운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토록 했다. 우리가 학창 시절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유명한 가곡도 유대인 출신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의 시에 멘델스존이 곡을 붙였다는 이유로 당시 히틀러에 의해 금지곡이 됐다. 이렇게 히틀러는 멘델스존과 바그너의 영광과 수난을 생전과 다르게 바꾸어놓았다.
“세계 음악계에서 대성하려면 실력은 필수이고, 거기에 절세미인(미남) 혹은 동성연애자이든지 아니면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이 농담을 농담으로 흘려버릴 수 없는 것은 게오르그 솔티(지휘자·1912~1997), 아이작 스턴(바이올리니스트·1920~2001), 앙드레 프레빈(지휘자·1929~), 로린 마젤(지휘자·1930~), 다니엘 바렌보임(지휘자·1942~), 이츠하크 펄먼(바이올리니스트·1945~), 핀커스 주커만(바이올리니스트·1948~)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유대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영화감독, 빌 게이츠와 같은 사업가 등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 세계 인구의 0.2%(약 1300만명)에 불과한 유대인이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20%, 세계 억만장자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각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히틀러가 우상화한 바그너
아돌프 히틀러는 바그너의 모습과 사상에 심취해 가장 독일적인, 게르만 신화의 이상으로 정립하려 노력했다.
이탈리아의 경우를 간략히 살펴보면, 1516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베니스에서 유대인을 위한 소수민족 거주구역(게토)을 만들어 유대인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지금도 베니스에는 당시의 거주지역이 남아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 분리된 공간에서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해 진 후부터 해 뜰 때까지는 게토지역 밖으로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낮에 게토지역 밖으로 나갈 때에도 붉은색의 뾰족한 모자(일부 다른 도시에서는 노란색)를 써 유대인임을 반드시 표시해야 했다. 이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도, 상거래를 할 수도 없고 전문직 종사도 허용되지 않아서 기독교인들이 죄악시하는 금전대부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절박하게 내몰리며 생존을 위해 고리대금업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도 유대인에 대한 당시의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은 중계무역 도시로 발전하면서 비교적 타인의 사상과 표현이 자유로웠던 베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유대인 ‘샤일록’을 인정머리 없는 잔인한 고리대금업자로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셰익스피어가 재정적인 담보가 전제되어야만 했던 베니스 유대인들의 80년 게토생활에 대해, 그리고 차별과 멸시를 겪으면서 금융업을 이어간 당시 유대인 생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당시 전 유럽에 만연해 있던 유대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단편 역사소설 ‘바허라흐의 랍비’를 비롯한 많은 문학작품에서 묘사된 것처럼, 유대인의 처참한 생활과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공공연히 유럽 각지에서 실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자유와 평등이란 혁명이념을 앞세우면서 이 이념을 전파하려는 정치적 계산으로 정복지의 모든 유대인 게토를 없애고 유대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허용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에서 물러간 다음 프로이센 국왕은 유대인들의 자본이 가진 사회적, 경제적 파장을 감안해서 1812년 유대인의 차별금지에 관한 칙령(Emanzipationsedikt)을 선포하고 유대인의 부분적 자율권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 칙령은 1815년 이후 프로이센이 획득한 지역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칙령에 반발하는 반(反)유대 운동이 거세어져 독일 내 여러 도시에서는 폭력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결과 1800년대 후반까지 유대인의 거주지 제한은 여러 독일연방국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이네를 비롯한 많은 독일계 유대인이 프랑스로 이주한 것은 프랑스에서는 1830년 7월 혁명 후 유대인에게도 동등한 법적 권리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이름 바꾼 작곡가들
이 시기에 유대인 작곡가의 상당수는 사회적으로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온 반갑지 않은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유대인 이름을 자신이 소속된 국가에 맞게 개명했다. 그랜드오페라 최고의 작곡가라고 칭송받는 자코모 마이어베어(1791~1864)의 본명은 ‘야콥 리프만 마이어베어’로 성은 ‘베어’이고 외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야콥 리프만 마이어’가 원래 이름이다. 그런데 중간 이름과 성을 하나로 합치고 이름을 이탈리아식의 ‘자코모’로 바꾼 것이다. 펠릭스 멘델스존도 기독교로 개종하고 바르톨디를 이름 뒤에 덧붙여 유대인 표시를 감추려 했다. ‘유대인 여자’라는 그랜드오페라를 작곡해 인기를 얻은 프랑스 작곡가 자크 프로망탈 알레비(1799~1862)의 본명도 ‘엘리아스 레비’였다. 반유대주의가 강했던 독일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오페레타의 선구자 자크 오펜바흐(1819~1880)도 원래 이름은 ‘야콥’이었으나 프랑스식의 ‘자크’로 바꾸었다.
당시의 독일 음악계에서는 유대인 작곡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음악이 낯설고 그로테스크하며 비독일적인 감상성과 애절함으로 유대인적인 성격을 드러낸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유대인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에 클라리넷이 자주 나오며 구슬프고 우울한 느낌과 이국적이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주는 것은 그의 출신배경이 음악에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식이다. 또한 작곡가이자 비평가로 활발한 활동을 한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은 마이어베어의 작품에 대해 추잡하고 부자연스러운 음악과 천박한 리듬이라고 평했다. 물론 비평가로서 슈만이 찬사를 보낸 작곡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이어베어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이 같은 비평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듣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의 분위기는 유대인의 작품을 예술이 아니라 민족적 특징의 발현으로 간주해 사람들은 마이어베어를 유대인에 결부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던 것이다.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에 참가한 관객들이 맥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
바그너가 파리 음악계의 거물로 프랑스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마이어베어를 찾은 것도 같은 시대였다. 바그너는 독일에서 빚쟁이들을 피해 런던까지 갔다가 초췌한 몰골로 파리의 마이어베어 앞에 나타나 자신의 오페라 ‘리엔치’를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다. 바그너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다. 바그너는 로마의 호민관이었던 실존인물 ‘리엔치’를 그린 작품을 통해 마이어베어가 추구한 범세계적 대하서사 오페라를 프랑스에서 추구하려 했다. 마이어베어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서 젊은 후배를 성공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그래서 바그너는 유대인과 프랑스 음악계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1842년 ‘리엔치’가 독일 드레스덴에서 초연되는 것을 기회로 궁정악장으로 취직해 독일로 귀국했다. 이때부터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반유대적인 성향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50년 ‘예술과 혁명’ ‘음악에서의 유대주의-Dsa Judentum in der Musik’에서 유대인의 악습으로 충동적인 성격, 금전에 대한 탐욕, 나태함, 독창성의 결여 등을 지적하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바그너의 이러한 편견은 명성이 높아지면서 더욱 심해져서 1870년에는 유대인에게 “페스트나 다름없는 놈들”이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을 정도가 됐다.
‘리엔치’ 추천 물거품…반유대주의 강화
1872년 본인의 소망이던 바이로이트 극장이 세워질 때에는 그의 반유대사상에 동조하는 많은 독일 귀족이 지원했고, 당연히 그의 언행에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은 극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우연히 나타난 일이 아니라 유럽 역사에 깔린 반유대주의와 바그너의 생각을 재발견해서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그너는 작곡가 베버가 직접 지휘하는 ‘마탄의 사수’를 관람하고 베버를 자신의 이상적 인물로 여기면서 오페라 작곡가의 꿈을 키운 사람이다. 베버가 작곡가, 지휘자, 비평가, 사상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처럼 바그너도 같은 길을 걸었다. 바그너는 대본까지 직접 집필하면서 사상, 음악, 연극, 무대미술이 일치하는 총체적 종합예술로의 오페라를 지향한다. 바그너는 인물의 등장이나 생각, 감정, 기억, 상황, 느낌에 일정한 멜로디와 박자, 즉 모티프를 사용했다. 이런 감정이나 등장의 모티프, 다시 말해 라이트모티프(leitmotiv-유도동기)를 사용해 대사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음악의 입체적인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바그너는 24살 연하인 코지마 리스트(1837~1930)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코지마 리스트는 바그너의 친구이자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와 파리 사교계의 꽃이었던 마리 다구 백작부인 사이에서 혼외 자녀로 태어난 딸이었으며, 당시 바그너 추종자의 하나인 지휘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해 두 딸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일찍부터 리스트의 정신적 아내였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은 이 지적인 여인은 후일 바그너보다도 더 인종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때, 스위스 루체른 호수 근처에 머물던 바그너와 독일 뮌헨에 있던 코지마는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Wille)와 표상(Vorstellung)’에서 따온 빌(Will)과 포어슈텔(Vorstel)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은밀하게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결혼 후 코지마라는 든든한 우군이자 완벽한 예술적 동반자를 얻은 바그너는 이전과는 달리 정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았고, 독일 바이에른의 왕 루드비히 2세의 전폭적인 재정적 지원 덕분에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의 안정된 생활은 비판적 혁명과 진보적 변화를 외쳤던 그의 사회적 관점을 변화시켰다. 바이로이트 축제에 몰입했고, 피를 나눈 가족처럼 교유했던 니체(1844~1900)와는 철천지원수가 됐으며, 이전의 신념에 찬 사회주의자의 모습은 어디론가 증발했다. 이를 두고 바그너 연구자들은 바그너가 현실 상황에 충실한 엘리트 중심적 대형작품 제작자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바그너는 이전에 그가 보여준 진보적이고 인종주의 사상 중 사회비판적 목소리는 버리고 인종주의적 비판은 더욱 강화한 것이다.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가 처음 개막되고 바그너는 1883년 베니스에서 요양 중 사망했지만 바이로이트 축제의 명성은 코지마가 바그너의 음악적 이념을 생전과 마찬가지로 유지시키면서 세계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코지마 체제’의 바이로이트 축제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대 최고의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는 절대 초청하지 않았다. 말러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바그너가 56세에 얻은 첫아들인 지크프리트(1869~1930)가 잠시 이런 말도 안 되는 인종주의에 반기를 들었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바이로이트 축제의 운영권은 어린 미망인 비니프레트(1897~1980)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이 비니프레트는 코지마를 뺨칠 정도로 대대로 내려오는 반유대주의에 적극 동참해 히틀러의 환상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 여인이었다. 비니프레트는 히틀러와 함께 공연을 관람하며 찰떡궁합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바이로이트 축제의 방향을 좀 더 선동적이고 독일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사적인 은밀한 관계에까지 사람들의 상상이 발전할 정도로 두 사람은 이념적으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화해 시도하는 이스라엘과 바그너
히틀러는 바그너가 죽은 지 6년 후 태어났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히틀러와 바그너의 후손들 사이의 범상치 않은 관계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 수많은 부정적 이야기를 낳은 원인이 됐다.
물론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바그너의 큰손녀, 반나치주의자인 프리델리트가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탈출해 망명했지만, 바그너의 가족이 차례로 나치즘에 동조하면서 남긴 핏자국을 가리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종전 후, 비니프레트는 축제의 모든 권리를 연합국 측에 의해 박탈당했다가 바그너의 유일한 며느리라는 이유로 4년 뒤 복귀했다. 전후의 분위기 때문에 그녀는 공공연하게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성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960년대 말에는 나치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인사의 후손들을 바이로이트로 초청해 대대적인 환영식을 하기도 했다. 비니프레트의 큰아들 빌란트(1917~1967)는 오페라 연출가로 무대장치와 연출에 많은 변화를 시도했지만 폐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어릴 때 모두들 두려워하는 히틀러를 ‘늑대 아저씨’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던 동생 볼프강(1919~2010)이 축제 운영권을 이어받아 축제를 57년간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바이로이트 여름 축제가 몇 년 전에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는 것을 사람들의 망각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편협한 생각일까? 유대인 작곡가 마이어베어의 작품을 공연해 진정한 화합과 공존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던 청사진이 몇 십 년째 계획으로만 머물고 있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1859년에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썼다. 자연상태에서 모든 생물은 열등한 생물이 도태되고 우등한 생물만이 종을 번식시켜 적응한다는 이론이다. 당시 진화론은 다윈의 의도를 벗어나서 엉뚱하게도 서구 열강의 해외침략, 식민지배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또 국가 내부적인 부의 불평등, 사회적 계급 차이를 호도하는 목적으로, 독일보다는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에서 더욱 요긴하게 사용됐다. 자연과학에서 출발한 진화론이 인종주의와 연결되어 반유대주의 논리에 사용된 것은 역사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이러한 인종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대중의 환상을 만족시키는 게르만 세상 건설을 선동하기 시작한 것은 더욱 비극이었다.
히틀러에게 바그너는 독일인의 이상적 모습이 투영된 완벽한 인물이었고 그의 음악은 독일 음악의 척도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있는 유대인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공포에 떨면서도 밤낮으로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최고의 음악인 바그너의 음악을 들어야 했고,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극장에서는 매번 바그너의 작품을 공연하며 히틀러를 찬양했다. 유대인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에게는 끔찍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음악 연주가 금기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문제와 관련해서도 예술가의 이념과 작품을 분리해 생각하는 변화가 서서히 감지되고 있다. 2010년 11월에는 바그너협회 이스라엘지부가 합법적으로 결성됐으며, 2011년 7월에는 100회 바이로이트 축제를 기념하는 개막행사에 이스라엘의 체임버 오케스트라(ICO)가 초청되어 바그너의 ‘지크프리트’를 연주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