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돌 그룹 비스트의 노래 ‘비 오는 날엔’이 최근 19금 판정을 받았다.
청춘남녀가 헤어진 뒤 상대를 그리워하는 감상적인 내용으로 ‘낭만밴드 여우비’라는 인디밴드의 곡 ‘여자와 남자가 이별한 뒤에’의 노랫말이다. 이별 후 쓸쓸한 기분을 표현한, 조금은 평범한 가사인데도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이 곡을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했다.
심의 결과에 따라 19세 이하 청소년은 이 곡을 음반이든 MP3로든 들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다. ‘19금(禁)’이 된 이유는 딱 하나, 마지막 부분의 가사 ‘술 한 잔’ 때문이다.
술은 담배와 마약처럼 청소년에게 해로운 약물로 규정돼 있어 이 노래가 어린 청소년에게 음주를 조장할 우려가 있고 따라서 그들이 청취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청소년 보호 차원이라지만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다음은 중고생에게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 비스트의 곡 ‘비 오는 날엔’이다.
‘비가 오는 날엔 나를 찾아와/ 밤을 새워 괴롭히다가/ 비가 그쳐 가면 너도 따라서/ 서서히 조금씩 그쳐가겠지/ 취했나봐 그만 마셔야 될 것 같애/ 뭐 네가 보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냐…’
대중가요의 기본 정서라고 할 만한 외로움과 처절함, 헝클어진 마음을 그린 곡이지만 이 역시 ‘취했나봐 그만 마셔야 될 것 같애’라는 대목에서 걸려 19금 판정을 받았다. 인디밴드 보드카레인의 ‘심야식당’이란 노래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게 간절한 것은/ 얼음보다 차가운 한 모금의 맥주/ 그리고 기름진 안주들/ 나는 오늘 마셔야겠어/ 니가 보고 싶지만 전화를 받을까 모르겠네…’
말할 것도 없이 ‘한 모금의 맥주’와 ‘나는 오늘 마셔야겠어’라는 대목이 문제였다. 황당한 보드카레인은 항의의 표시로 청소년 대상으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비오는 날엔’의 기획사 큐브엔터테인먼트도 “곡 주제는 음주 조장과 무관한 이별에 대한 이야기”라며 여성가족부 장관을 상대로 결정취소 소송을 냈다. 이런 입장에 처한 노래가 몇몇 곡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지난해 2월 이후 무려 868곡이 청소년보호위원회(이하 청보위)로부터 유해매체 판정을 받았다. 요즘 노래와 옛 노래 가리지 않고 무더기로 19금 딱지가 붙는 실정이다.
그중에는 폭력과 욕설 등 누가 봐도 청소년이 접해선 안 되는 곡이 대부분이지만 상기한 것들처럼 판단하기 애매한 곡도 적지 않다. 청소년이 대중음악의 주요 수요층인 상황에서 많은 노래가 줄줄이 청소년 유해물로 묶이자 불만이 팽배해진 가요계도 반격 차원의 줄 소송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가요계 불만의 첫째 원인은 술과 담배에 대한 당국의 가혹한 해석이다. 청소년보호법 규정에선 술과 담배가 청소년 유해물이겠지만 술과 담배는 상기한 대로 대중가요의 표현 정서인 외로움과 비참함을 상징하는 도구로 작용하며 이게 없으면 대중가요는 부르는 맛, 들을 맛이 없어진다. 청보위의 판정에 따른다면 청소년은 술 담배와 같은 언어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바르디바른 건전가요만을 접해야 한다.
대중가요를 왜 듣는가
이것은 대중가요를 왜 듣는지에 대한 해묵은 질문을 낳는다. 대중가요는 바른 생활을 위한 장(場)이라고 할 수 없다. 규율과 규칙으로 짜인 직장업무와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쉼과 여유로 재충전할 때 필요한 것이 대중예술이요 대중음악이다. 이 때문에 가요 상당수가 일탈과 파격을 표현하거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일상의 현실과 분리선을 긋는,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대중음악을 듣고 생생한 감동을 얻는 것이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교과서와 같다면 무엇 하러 노래를 찾겠는가.
청보위와 실제 심의 주체인 9인 음반심의위원회에 대한 음악계의 불신이 고조되는 이유는 ‘대중가요적 심의’가 아닌 ‘교과서적 심의’를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놓고 예술 심의를 해야지, 대중음악을 가지고 어떻게 도덕성과 청렴성 심의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여성가족부와 청보위 그리고 실제 심의를 진행하는 음반심의위원회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이들 기관에서는 유해성 논란을 두고 일각에서 군사정부와 유신시절로 회귀한다는 식으로 맹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응수한다.